32화. 에일린의 능력
결혼하고 나서도 에일린은 어딘가 나가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첫 외출이 결정되었다. 조금 얼떨떨해하고 있었는데 익숙한 풍경이 보이면서 에일린은 집에 가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스쳐 가는 나무를 보던 에일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 볼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로이드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면 민망해요.”
“아픈지 확인하는 거야.”
“괜찮…….”
“내 앞에선 애써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
로이드가 차갑게 잘라버리는 통에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두통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가라앉질 않았다. 거기다 갑자기 끌려와서 빈속이라 그런지 울렁거림도 있었다.
“이리 와.”
로이드가 에일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단호한 어투에 에일린은 왜 그런지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로이드의 손이 에일린의 손을 감싸는 것도 모자라 손목까지 틈 없이 잡아주었다.
그대로 당기는 힘에 따라 에일린의 몸은 반쯤 통제를 잃고 그에게 딸려갔다.
“아…….”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맞닿을 정도로 옆에 붙자 에일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무 가깝잖아요.”
“가까이에서 보려고.”
로이드는 에일린의 턱을 들어 제게 잘 보이도록 각도를 조절했다. 정말 아내가 아파서 확인하려는 듯 로이드는 미간을 조금 좁힌 채 에일린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내렸다.
에일린은 그의 이마를 보다 눈꺼풀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직도 전남편의 학대를 잊지 못한 몸이 그를 피하고 싶어 했다. 저번엔 괜찮았던 거 같은데 의식하는 순간 몸이 굳은 것이다. 언젠가 괜찮아지겠지, 생각하면서도 그게 당장 오늘은 아니라는 게 그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얼굴빛이 더 안 좋아졌어.”
“그래요?”
“춥기라도 한 건가?”
로이드의 말에 에일린이 손등으로 제 볼을 가렸다. 당장 손등에 느껴지는 열감보다 로이드의 시선이 더 신경 쓰였다.
“담요로 덮어줄까?”
“더, 더워서 안 덮어도 돼요.”
에일린이 반사적으로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마음대로 해.”
에일린이 굳은 걸 알고 퉁명스레 구는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구원의 목소리라도 되는 듯 에일린이 로이드에게서 일어났다. 제자리에 있기 힘든 에일린이 아예 직접 문을 열 요량이었다. 그런데 간발의 차이로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을 확인한 에일린이 울컥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뛰어내렸다.
“오빠.”
에단이 제 허리에 매달려오는 에일린의 무게에 잠시 휘청거렸다. 문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뒤로 넘어질 수도 있었다. 에단은 잠시 에일린을 내려다보다 그녀의 등에 팔을 둘렀다.
“이렇게 덥석덥석 안으면 안 돼.”
“가족이니까 괜찮잖아. 내가 온 거 어떻게 알았어?”
에단에게서 몸을 떨어뜨린 에일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오빠를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오빠의 살아있는 모습에 행복한 마음만이 가득 차올랐다. 에일린의 물음에 에단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가벼운 미소로 대답했다.
“대공님께서 연락주셨어.”
“그래?”
에일린이 뒤를 돌아봤다. 이제 마차에서 내린 로이드는 별거 아닌 듯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고마워요.”
에일린이 고마움을 전했다. 로이드가 그 인사를 받으며 기사의 보고를 받았다. 그가 지시를 내리려 거리를 벌리자 에일린이 다시 에단을 돌아보았다. 제 앞에 서 있는 에단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미래가 달라져 지금의 에단은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그랬지. 보고 싶은 만큼 걱정도 되고.”
“걱정?”
“내 동생이 잘하고 있을까, 혹시나 못 따라가고 버벅대고 있진 않을까.”
에일린은 늘 오빠의 눈에 아이로만 비칠 제 모습을 알고 입술을 퉁 내밀었다.
“충분히 잘하고 있어. 예법 선생에게도 칭찬 많이 받아. 또 집무실도 생겼는데 대공님께서 만들어 주셨어. 그 옆에는…….”
“자랑하려고 온 거야?”
“아…….”
에일린은 짐짝처럼 마차에 태워진 것에 대해 얼떨떨했던 감정을 지웠다. 솔직히 로이드가 갔다 오라고 떠밀지 않았다면 쉽게 오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 계속 있을 건 아니지?”
언제 다가왔는지 로이드가 아직도 여기 있었냐는 듯 말했다.
“기쁨의 재회도 좋지만 들어가는 게 좋겠어. 당신 빈속인 거 알지?”
“그렇죠.”
“맙소사. 어서 식사부터 준비하라고 해야겠네. 들어오세요.”
에단이 부재중인 부모를 대신해 로이드를 안내했다.
***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에일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집사의 다정다감한 인사에 괜히 눈시울을 붉혔다가 매일같이 보던 고용인의 면면을 둘러볼 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인지 붕 떠오른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
로이드의 물음에 에일린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부모님을 대신해 키워준 고용인 모두가 에일린에겐 가족과 같았다.
“멜번 허브차입니다.”
“고마워.”
에일린은 익숙한 향에 잠시 눈을 감고 즐기다 집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별말씀을요. 식사는 바로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에단으로부터 사정을 들은 집사가 빠르게 말을 뱉은 후 응접실을 나섰다.
“에일린.”
로이드의 부름에 에일린이 그를 돌아보았다.
“자고 갈 거지?”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얼마 만에 온 집인데 에단과 인사만 하고 돌아가기엔 아쉬웠다. 하지만 혼자 온 게 아니라 망설여졌다. 로이드가 자고 간다면 같은 방에서 자야 할 텐데 에일린이 제 방의 침대를 떠올렸다.
작아, 너무 작아.
그러나 침대보다 로이드의 일정이 될지 몰라 에일린이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시간이 된다고 왔지만, 저녁에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대공님께선 많이 바쁘세요?”
“바빠.”
“그럼 여기서 자고 가긴 힘든 거죠?”
“자고 가고 싶어?”
“그러고 싶지만, 대공님의 시간을 빼앗으면서까지 무리하고 싶지 않아요.”
“아파서 온 거잖아. 자고 가.”
로이드가 에일린의 결정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에일린이 침대가 좁은 것도 말해 봐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아파?”
“어? 그동안 긴장했나 봐. 머리가 조금 아파서.”
에일린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남몰래 에단의 표정을 살폈다. 서로 웃으며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에단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심한 건 아니야.”
“약은 먹었어?”
“의사한테 처방받았어. 그리고 정말 심하지 않다니까?”
“네 약은? 네 약은 안 들어?”
“어?”
에일린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하지만 에단은 다시 설명할 마음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에단이 말한 약이 뭔지 깨달은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남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눈빛이 오가는 사이로 로이드가 운을 띄웠다.
“에일린에게 신경 쓰지 못한 제 탓입니다. 미안합니다.”
“아니요. 그게 어떻게 대공님의 탓일까요. 오히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단이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젓더니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언젠가 한 번은 대공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이 맞을 거 같네요.”
“뭡니까?”
로이드가 먼저 에일린에게서 시선을 뗐다.
“에일린이 아직 대공비로 부족한 아이인 거 압니다.”
에단은 에일린이 고위 귀족 부인이 되어 걱정이 많았다. 서로 맞는 가문끼리 결혼을 해야 하는데 클라우디아가에 비하면 리하스트 대공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집안이었다.
“다들 얼마 못 버틸 거라고 하더군요. 거기다 에일린은 베타이기도 하고요.”
에단이 바깥에 떠도는 소문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다소 제 동생을 향한 공격적인 말이 될 수도 있었다. 에일린은 오빠의 의중을 헤아려 보려고 애를 썼다.
에일린이 오메가로 발현하는 건 이전 생이라 할지라도 에단 오빤 몰랐다.
오빠가 죽고 난 후에 발현했으니까.
“그래도 에일린이라면 잘할 겁니다. 제 동생이지만 어릴 때부터 영특했거든요. 부끄럽게도 저보다 더 이해가 빨랐고 공부를 잘했습니다.”
에단의 말에는 에일린을 향한 포근한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에일린이 최근까지 관심을 주던 분야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한 시간을 조금 안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빠…….”
에일린이 에단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의 말이 빨랐다.
“이번엔 의사가 처방해줬다지만 다음엔? 네가 만든 걸 먹어도 된다면 미리 말하는 게 나아.”
“그건 그렇지만…….”
에일린도 로이드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그런 게 뭐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지금껏 로이드가 보여줬던 행동은 그렇지 않았지만 에일린 혼자 지레짐작을 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에단의 설득에 에일린이 로이드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궁금해하는 것 외에 딱히 불쾌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밀이 뭔지 빨리 말하라는 듯 약간 불퉁했다. 그 덕분인지 에일린은 그에게 말할 용기가 생겼다.
“이제 내가 이야기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