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31)화 (31/120)

31화. 원인을 알 수 없는

“머리 아파.”

에일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검지로 살살 비볐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지 삼 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그때와 같은 통증이 일었다. 제각각 다른 강도로 찾아오는 지끈거림에 에일린은 중간에 한 번씩 눈을 감고 고통이 가시길 기다렸다.

“마마, 의사 불러올까요?”

“괜찮아. 그때 받았던 약이 남았지?”

“네.”

에일린은 당시 의사가 했던 진단을 떠올렸다.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심리적 긴장이 두통을 일으키는 것 같다고 하니 몸을 이완시킬 수 있는 약을 처방해주었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아직 대공비로 정식 업무를 받기 전이라 다행이었다. 하루빨리 적응해야 제 몫을 해나갈 수 있단 생각에 에일린은 억지로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렸다.

“식사까지 할 거니까 그렇게 안 봐도 돼.”

에일린이 걱정하는 눈으로 보는 제인을 안심시키려 미소를 지었다. 정말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랬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준비하겠습니다.”

“간단하게 부탁해.”

“알겠습니다.”

제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방을 나섰다. 점점 좁혀지는 문틈으로 에일린이 다시 이마를 짚는 걸 본 제인은 고심에 빠지더니 이내 결정했다는 듯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제인이 사라진 복도에 클로에가 나타났다. 그녀는 에일린의 방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똑똑 노크를 건넸다.

“누구죠?”

“클로에에요.”

“들어와요.”

안에서 들려온 허락에 클로에가 미소를 지으며 들어갔다.

***

제인이 간 곳은 로이드의 집무실이었다. 앞서 칼릭스 원로가 있어 제인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 로이드가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슨 일이지?”

“지난번과 같은 이유입니다. 마마께 일이 생기면 오라고 하셔서…….”

제인이 말끝을 흐렸지만 로이드가 바로 알아들었다.

“에일린이 아파?”

“그렇습니다. 저번과 같은 통증을 호소하셨습니다.”

“의사는?”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그때 처방받으신 약을 가져오라 했습니다.”

같은 처방이 나올 걸 알고 그런 거다. 제인의 보고에 로이드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의사가 뭐라고 했었지?”

“심리적 긴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로이드가 일정한 속도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 옆에서 내용을 듣던 칼릭스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결혼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였다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고요.”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원인이란 게 딱 정해질 수 없다는 듯 말한 그는 로이드에게 어떻게 하겠냐는 듯 바라보았다. 제인은 모르겠지만 칼릭스는 에일린의 일로 로이드를 찾아왔었다. 로이드가 한껏 미간을 찡그렸다가 입을 열었다.

“부탁하죠.”

“걱정 마십시오.”

로이드가 말을 건 상대는 제인이 아닌 칼릭스였다. 칼릭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디아가에 갈 거야. 마차를 준비하도록 해.”

로이드의 지시에 제인이 예를 취하고 밖으로 나갔다. 제인이 나가자 로이드는 칼릭스를 돌아보았다.

“하루. 하루 안에 알아내야 할 겁니다. 에일린이 정말 긴장해서 몸이 아픈 거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바로 손을 써야 하니까요.”

로이드는 원로원이 에일린에게 손을 뻗은 게 아닌지 칼릭스에게 조사할 것을 맡겼다. 칼릭스 역시 일의 심각성을 알기에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은 지우고 심각하게 말했다.

“연락병으로 쓸 자가 필요합니다. 내 사람을 쓰면 원로원에서도 알 겁니다.”

칼릭스 원로의 말에 로이드는 적당한 인물을 골라보았다. 생각보다 답이 빨리 나왔다.

“러츠 경으로 하지요.”

“클로에 아가씨에게도 상황을 알리란 거군요. 알겠습니다.”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나가려고 몸을 돌렸던 로이드가 무슨 생각에선지 되돌아와 창가로 다가갔다. 집무실이 본채에서도 제법 높은 층에 있어 후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로이드의 시선은 무감했다.

“내가 왜 이 방을 집무실로 정했는지 압니까?”

“후원이 예뻐서요?”

칼릭스의 가벼운 대꾸에 로이드가 후원을 보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잊지 않으려고…… 절대 잊지 않으려고 이 방을 잡았습니다.”

로이드는 원로원들이 머무는 별채를 보았다. 어린 자신을 두고 끊임없이 속살거리던 이기적인 자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공가의 평판도 쉽게 내던지는 자들이었다. 황족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우성 알파가 아니었다면 어린 날의 로이드는 원로원의 계략에 언제 비명횡사했을지 모른다.

“저들을 다 치워버리고 가문을 반듯하게 세울 겁니다.”

로이드는 원로원의 구성원을 떠올렸다. 초대 대공이 황권을 포기하고 가문을 세울 때 데려온 충신, 대공의 핏줄을 이어 가문에 남은 자 등 일정 자격을 갖춘다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초기의 원로원은 대공가를 든든하게 지탱해주던 기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공가를 휘청이게 하는 썩은 기둥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지울 수 없잖습니까. 아무리 저들이 대공가를 갉아먹고 있다 할지라도 기둥은 기둥입니다. 기둥을 빼버리는 순간 대공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칼릭스가 안타깝다는 듯 눈을 들었다. 자신도 마음 같아서야 당장 원로원을 전부 밀어버리고 싶었다. 로이드가 자괴감이 서린 미소를 지었다.

“만약 이번에도 정말 원로들이 한 짓이라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로이드의 목소리에 실린 증오를 읽은 칼릭스는 씁쓸히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다녀오지요.”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칼릭스가 인사를 건네고 집무실을 나갔다.

***

“아쉽다.”

“미안해요.”

“뭐가요. 새언니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미안할 게 어딨어요.”

클로에가 상관없다는 듯 굴면서도 내심 아쉬운 티를 감추지 못했다. 에일린을 찾아온 건 그녀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괜찮다면 자신과 같이 연구하는 건 어떠냐고 물어볼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에일린의 안색이 좋지 않으니 클로에는 전부 미뤄버리고 그녀의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에바 선생에겐 내가 말할게요. 오늘은 쉬어요.”

“그렇지만 저번에도 수업을 넘겼는걸요. 오늘은 그렇게 심하지도 않으니까…….”

“클로에 말을 듣는 게 좋겠어.”

마침 로이드가 들어오며 클로에의 편을 들어주었다. 에일린과 클로에가 동시에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머리가 울려와 입을 다문 사이 클로에가 반응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클로에가 시계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너야말로 왜 여깄어.”

“새언니 보러 왔지.”

클로에는 당연한 듯 말하며 오히려 로이드가 여길 온 걸 이상하게 보았다.

“오빠 바쁘지 않아?”

“바빠. 그러니 네가 에바 선생에게 말해. 나는 에일린과 갈 데가 있어.”

“새언니 아픈데 어딜 간다고 그래?”

로이드는 클로에의 만류에도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에일린의 손을 잡았다. 대뜸 잡은 거 치고 아프지 않아, 에일린은 그 손에 기대 수월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단하게 잡아주는 힘에 에일린은 로이드의 뒤를 따라가며 클로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어딜 간다고…….”

“칼릭스 원로에게 가 보면 알 거야.”

로이드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줄 사람을 콕 집었다. 그러니 따라올 것처럼 일어났던 클로에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끌려 나온 에일린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벙한 반응이었다. 그러다 로이드가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자 뒤늦게 마차의 존재를 알아챘다.

“갑자기 웬 마차인가요?”

에일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티타임을 해야 하는데 이유도 모른 채 끌려온 것도 그렇고 아직 수업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에단 만나고 싶지 않아?”

로이드는 친절한 설명 대신 불친절한 질문을 택했다. 하지만 그건 에일린에게 딱히 확인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녀에게 에단은 언제나 보고 싶고 그리운 가족이니까.

“만나고 싶어요.”

“내가 시간이 되는 게 지금뿐이야. 그래서 지금 가려고.”

얼떨떨했던 것에 비해 반가운 말이었다. 에일린이 다시 한번 확인해 보려고 되돌아보니 로이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친정에 간다고 하니 일단 마차에 엉거주춤 발을 올렸다.

마차에 앉은 에일린은 맞은편에 자리 잡은 로이드를 의심스럽게 보았다.

“아무 이유 없는 거 맞죠?”

“내가 무슨 목적이라도 있는 듯 말하네.”

“갑작스러우니까 그렇죠. 혹시 저 아픈 거 때문은 아니죠?”

에일린의 솔직한 대답에 로이드가 속 시원한 듯 웃어댔다.

딱히 좋은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웃어대나 싶을 때 로이드는 여전히 웃음이 남은 눈으로 에일린을 보았다.

“맞아.”

“……정말요?”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묻는 말에 로이드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자꾸 아프니까. 집에서 편하게 쉬면 낫겠지.”

걱정되는 마음에 잔소리를 하는 게 보여서 에일린은 더 묻지 않았다. 자꾸 가라앉으려는 기분은 이제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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