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사이클 안정제
방에서 나온 로이드는 아직도 침대에 있을 에일린을 떠올렸다. 결혼했고 매일 밤 한 침대에서 자고 있지만 둘의 사이에 깊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에일린이 다른 여자와 다르게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다거나 분위기가 다르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붕하게 뜬 갈색의 머리카락은 헝클어뜨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거 말고는 별거 없었고 매끄러운 피부는 잡아당기고 싶게 생겼다. 거기다 늘 자신을 또랑또랑 바라보는 눈은 예쁘긴 하지만 평범했다.
전체적으로 예쁘고 평범한 아가씨였다. 이미 예쁘단 생각을 하는 것부터 에일린에게 일말의 호감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로이드가 걸음을 옮겼다. 로이드는 어느새 제 옆에 다가온 제라미 경의 기척을 알아챘다.
“제라미 경.”
“네, 주군.”
“사이클 촉진제 개발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아직 연구 중입니다.”
“누군가에게 쓴 일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라미 경이 확실하지 않아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확실해?”
“아직 그 부작용을 완전히 없애지 못해서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로이드는 부친과 함께 하나의 연구를 시작했다.
알파의 형질을 타고난 그들은 페로몬의 조절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연구로 대표적인 두 가지 성질의 실험을 진행하였고 각각 사이클 안정제와 촉진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체에 무해하면서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사이클 안정제가 먼저 상용화되었지만, 촉진제는 아직 상용화되기엔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연구일지를 가져와. 더불어 연구원들 역시 따로 불러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하.”
“뭐지?”
막 집무실로 들어온 로이드가 책상을 돌아가는 동안 제라미 경이 말해도 되나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뭐야.”
“대공비 마마께는 언제 말하십니까?”
“뭘?”
“사이클 안정제가 우리 가문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요.”
로이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서류를 가져왔다. 오늘 해야 할 일을 가늠하던 그는 흘리듯 대충 말했다.
“그게 뭐라고. 말하면 되잖아.”
“하지만 안정제에 관한 건 가문에서도 극비로 취급하는 사항입니다.”
“에일린은 내 아내야. 대공비라고.”
“…….”
“더 할 말 있어?”
“없습니다.”
제라미 경이 묵례 후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로이드는 서류에 손을 대는가 싶었지만 집중하지 못하는 듯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제라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둘의 결혼은 1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나중을 생각할 때 말하지 않는 게 맞지만, 로이드의 결정은 변함없었다. 단 1년이라 할지라도 로이드는 에일린을 정말 제 아내로 여길 생각이다.
***
로이드가 나가고 홀로 남은 에일린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어제 술을 마시자고 할 때까지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쪽으로 관심 있어 할 줄 몰랐어요.]
헤어지기 전 클로에의 말이었다. 그녀는 에일린의 상당히 깊은 지식에 놀랐다.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자신과 대화하는 데 아무 문제 없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에 에일린은 책을 읽었다고만 했었다. 어떤 선생 없이 혼자만 해왔다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저한테 말했다는 건 숨겨야 할 내용은 아니라는 거죠?]
마지막에 일어나기 전 클로에가 건넨 질문이었다. 에일린은 굳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클로에가 연구를 한다는 말에 기뻐서 자신의 관심을 드러냈는데 로이드에게는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다.
실은 에일린은 저 혼자만 공부하고 연구했던 게 다라 내세울 게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빠에게도 말하는 게 좋겠어요.]
[그게 중요한가요?]
에일린은 저 혼자만의 연구가 될 텐데 혹시 이것마저 대공비의 역할에 맞물려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
[혹시 제가 대공비라서 그런가요?}
클로에가 고개를 잘게 저었다.
[저보다 오빠가 더 많이 알아서 그래요.]
에일린은 가만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왔다. 그리고 로이드에게 말하려고 조금은 유한 분위기를 만든다는 게 술이었다.
“술만 마셨고 한마디도 못 했네.”
에일린이 이불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다 턱을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에가 페로몬과에 다닌다면서 운을 띄웠지만 그다음이 막혀버렸다. 그러면서 에일린은 차마 클로에처럼 자신 역시 그쪽으로 연구하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에일린이 망설였던 이유가 있었다. 회귀 전에도 에일린은 제가 만든 약을 케이지 상인에게 넘긴 적이 있었다. 그때 상인은 그것을 따로 연구소로 보내 임상시험을 거친 뒤 나올 거라고 알려줬다. 시험의 결과를 물어봤을 땐 사람에게 써도 크게 문제가 없다는 결과에선 기뻐했지만 그 후에 전해준 말은 딱히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 약이 팔리지 않았다고 했나?”
그 약의 특성상 쓰일 데가 없다고 했던 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에일린은 그것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전남편의 학대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뭐? 약을 만들어? 연구를 해? 오메가라고 꼴에 약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거야? 그냥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 잘 어울려.]
전남편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오자 에일린이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
“클로에 아가씨가 왔습니다.”
제라미 경의 보고에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라고 해.”
한나절이 넘도록 서류를 보느라 피로한 눈을 감고 있는 사이 구두 소리가 들렸다.
“어제 온 거로 아는데?”
로이드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클로에가 대공가에 오자마자 바로 보고가 들어왔다. 이후 자신을 찾아오기는커녕 곧바로 에일린에게 간 것도 알고 있었다.
“오빠가 바쁜 거 같아서 천천히 온 거야. 마침 시간이 남아서 새언니도 보러 간 거고.”
클로에가 소파에 앉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원래부터 오자마자 로이드를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서 뻔뻔하게 거짓말로 넘어갔다. 클로에의 뒤엔 러츠 경이 자리했다.
“에바 선생의 수업이라고 해서 겸사겸사 가봤어. 그런데 새언니 보니까 말이야.”
클로에가 어제 에일린과 처음 만나고 둘이서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
“되게 순수한 사람이더라. 말도 잘 통했어.”
“그거 다행이네.”
클로에가 좋아한다니 나쁠 게 없었다. 어제 에일린도 클로에를 마음에 들어 했었다.
“오빠가 되게 다정하게 대해 준다고 하던데?”
“그래.”
“나한테는 엄청 못되게 굴면서.”
로이드가 다시 서류를 들다가 미간을 좁혔다.
“왜 여동생에게 다정하게 대해 줘야 하지? 까마귀보다 못한 존잰데.”
차라리 까마귀를 챙기지. 싶은 로이드의 반응에 클로에가 흥분해서 말문이 막혔다. 클로에는 어제 에일린의 오빠와 닮았다는 말에 차라리 까마귀를 닮은 게 낫다고 한 걸 떠올렸다. 로이드에게 한 방 먹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던 클로에가 언성을 높였다.
“나도 오빠 싫어.”
“애냐? 18살이나 돼서는…….”
“아악.”
한쪽에서 얌전히 보고 있던 러츠 경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얼굴로 대공 남매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대공은 별거 아닌 말로 사람을 흔드는 재주가 있었다.
“할 말 다 끝났으면 연구하러 가지?”
“싫어. 당분간 새언니랑 모임에 다닐 거야.”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다고 말 한마디 해 오는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바로 연구하러 가라니. 클로에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거절했다.
“분명 새언니 혼자 가면 여우 같은 부인들에게 잡아먹힐 거야. 그러니 내가 같이 가려고. 이건 전적으로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알지? 우성 알파의 동생이라고 당한 경험이 있어서 새언니를 도와줄 수 있는 거잖아.”
“든든한 아군이네.”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반쯤 장난스럽게 한 말이지만 클로에가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기한테 비교당해서 속이 상했을 텐데 이렇게 대들지언정 어긋나지 않고 자란 건 기특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하나 정도는 들어줄게.”
“정말? 그럼 사이클 안정제 독점권 나 줘. 내가 더 잘 팔 자신 있어.”
“그건 안 돼.”
“원하는 거 들어준다며.”
“네가 연구해서 발명해. 남의 거 탐내지 말고.”
로이드가 절대 줄 수 없다는 듯 굴자 클로에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그럼 처음부터 사이클 안정제 빼고 다 줄 수 있다고 하든가. 클로에도 한껏 찡그렸던 표정을 지우며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빤 새언니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알았어?”
“무슨 능력을 말하는 거지?”
“몰라?”
클로에가 살짝 당황했다가 곧 어제 에일린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오빠 아직 모르는구나.”
새언니가 말하지 않은 걸 자신이 말해도 되나 고민했다. 분명 어제 헤어질 때만 해도 말할 것처럼 굴었는데 왜 안 했지?
“몰라. 나도 말 안 할래.”
이유는 모르지만 클로에는 순전히 심술이 올라 입을 다물었다. 오빠가 모르는 걸 자기만 안다고 생각하니 괜히 우쭐하는 마음도 들었다.
“뭐야.”
로이드가 눈썹을 찌푸리며 클로에를 보았다. 이제껏 서류를 본다고 클로에를 스쳐보던 게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대놓고 보고 있었다. 그 반응에 클로에가 재밌다는 듯 잔미소를 지었다.
“나 갈게. 새언니 만나러 가야지.”
클로에가 상쾌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