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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29)화 (29/120)

29화. 술버릇

같이 술 마시자고 한 것치고 로이드는 술잔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마시는 건 상관없는지 에일린은 제 술잔만 비워갔다.

“그렇게 한 번에 마시면 빨리 취할 텐데? 이러다 술주정도 부리겠어?”

로이드가 적당히 마시라고 말했지만 이미 에일린은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볼이 달아올라서 이젠 입술만큼이나 붉어졌다. 한 잔을 완벽히 비운 에일린이 대뜸 외쳤다.

“저 취했어요.”

“응. 그래 보여.”

“그래서 하는 말인데 딱 한 대만 때려도 돼요?”

“그런 마음이었어? 인제 보니 내 아내가 날 많이 미워했구나.”

로이드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귀한 몸이라 때리면 안 돼요?”

“귀한 몸인 건 맞는데 마음대로 해.”

에일린에게 맞는 걸 반기는 것보다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단 얼굴로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일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거라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질 뻔했다. 로이드가 손을 뻗었지만, 다행히 에일린이 테이블을 짚으며 알아서 균형을 찾았다.

“불안하네.”

말이 느려진 것 말고도 몸을 가누는 게 힘들어 보였다.

“내일 어떤 얼굴로 날 볼지 기대돼.”

로이드가 재밌다는 듯 중얼거리는 동안 에일린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테이블을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 걸리는 병이나 잔을 로이드가 슬쩍슬쩍 치우고 있으니 에일린이 쉽게 그의 앞에 도달했다.

“아무 이유 없이 때리는 거 아니에요.”

“이유가 뭔데?”

“자꾸 다른 사람 같아서요.”

“뭐? 당신이 아는 내가 따로 있나 봐?”

“그래서 혹시나 한 대만 때려보면 알까 해서요.”

에일린이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로이드가 얼마든지 때리라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품 안에 있는 에일린에게서 움직임이 없었다. 왜 가만히 있는지 몰라 로이드가 눈을 뜨자 제 얼굴을 보고 있던 에일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감상할 줄 알았으면 더 감고 있을 걸 그랬나?”

그때였다. 에일린이 검지로 로이드의 볼을 콕 찔렀다. 볼살이 없어 푹 들어가진 않아도 온기가 느껴지자 에일린이 손을 떼서 제 검지를 보았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야. 진짜네. 진짜야.”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말하는데요?”

“못 알아듣게 말하잖아.”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끝을 쥐었다. 에일린은 자기가 한 말을 곱씹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로이드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진짠데요.”

“그게 뭐야.”

로이드가 다른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리며 웃었다. 그는 에일린의 말을 해석하기보단 그녀의 술주정으로 넘기며 귀엽게 보았다. 맞잡은 손을 통해 에일린의 움직임을 느꼈다. 가만히 있는지 손에 힘이 안 들어가다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제야 움직이네, 싶은데 또 움직임이 멈췄다.

“제게 비밀공간을 만들어 주고…….”

에일린이 로이드의 허벅지에 제 무릎 하나를 올렸다. 별안간 닿아오는 걸 넘어서 다리를 올린 행동에 로이드가 입을 다물고 그녀를 지켜봤다.

“넘어지지 않게 손잡아주는 게 전부 믿기지 않은데 진짜라고요. 진짜 대공님이에요.”

에일린이 마저 다른 다리마저 올렸다. 두 무릎이 그의 허벅지를 누르는데도 로이드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떨어지지 않게 에일린의 허리를 받쳤다.

“그런데 진짜 대공님이 맞나? 다른 사람이 갑자기 대공이 된 건 아니죠?”

에일린이 헷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자기가 말하고도 이해 안 된다는 듯 구는 에일린의 물음에 로이드가 기가 찬 듯 웃었다. 에일린이 자기보다 살짝 눈높이가 낮은 로이드의 눈을 보았다. 어두운데 탁한 느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뜨지 않은 밤하늘과 같은 눈동자에 빠진 듯 바라보던 에일린이 손을 들었다. 정말 한 대 때리려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에일린의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로이드가 묻자 꼼짝없이 있었던 에일린이 뒤늦게 제 상태를 알아차린 것처럼 움직였다. 그의 이마를 때리려고 손을 내리는 줄 알았는데 닿을 때의 충격이 없었다. 깃털처럼 살포시 내려앉은 손은 로이드의 이마를 살살 어루만지다 위로 올라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에일린은 그의 머리카락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자꾸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아니야, 미운 말도 잘해. 그런데 자꾸 잘해 주니까……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잖아요.”

“…….”

“어떡하지?”

에일린의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말에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에일린이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잠들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잠에서 깬 에일린은 등을 데우는 온기에 로이드를 떠올렸다. 어제 술을 마시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다음부터는 끊겨버린 몇몇 기억만 떠올랐다. 술에 취해서 그의 몸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지?’

술에 취했다고 설마 로이드를?

‘아냐. 단정 짓지 말자.’

그냥 몸 위로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왔을 수도 있지. 그리고 바로 침대에 가서 잤다면 별일 아닐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제 배를 가로지르는 팔이었다. 로이드와 한 침대에서 잠들 때는 많았지만 이렇게 가까이 붙은 채로 눈뜬 적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로이드에게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를 깨울까 봐 걱정되는 것이다.

에일린이 천천히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애벌레처럼 꼬물거리는 것과 다름없지만 지금으로는 그게 가장 은밀하게 움직이는 방법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으니 이제 그의 팔만 치우면 될 일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잔뜩 잠긴 목소리와 함께 배를 가로질렀던 팔이 에일린의 몸을 잡아당겼다. 겨우 벌린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지자 에일린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저 일어났어요.”

“조금만 더 자자.”

“그럼 더 주무세요. 저는 그만 일어날…….”

“에일린.”

로이드가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아니면 이 팔이라도 풀어주세요.”

“싫어.”

“왜요?”

“어제 내가 진짠지 계속 확인한 사람이 물을 질문은 아닌데? 나한테 안겨서 잠들었잖아.”

에일린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로이드에게 안겨서 잠들었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으니 가만히 누워있기 민망했다.

“저 어디 숨고 싶어요.”

에일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이드가 그녀의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그를 마주 보게 될 자세라 에일린이 고개를 숙였다. 로이드는 에일린의 붉어진 얼굴을 보더니 웃었다. 이럴 줄 알고 얼굴이 보고 싶었다.

“어제, 술 취한 후 기억해?”

“아니요.”

“아주 잘했네. 잘했어.”

로이드가 혀를 차며 빈정거리는 말에도 에일린은 반박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술주정 부린 쪽이 잘못이다. 심지어 기억을 잃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면 더더욱. 에일린이 시무룩해져 있으니 로이드가 그녀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나게 해 줄까?”

“어제 일이요?”

“그래.”

“……말해 주세요.”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예 답답하게 있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에일린은 대답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로이드가 돌연 상체를 기울이더니 에일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지면서 에일린이 잠시 멍하니 반응하는 걸 잊었다. 그에 비해 이마에 느껴진 감촉은 아직 남아있었다.

“혹시 제가…….”

에일린이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당신을 덮쳤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자연스러운 스킨십은 뭘까요?

“비슷해.”

“어…….”

어떻게 덮쳤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일린의 난처한 기색을 고스란히 읽은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내 몸 위로 올라와서 날 만졌지. 이제 우리 스킨십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겠어. 그렇지?”

에일린은 방금 제 이마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긴 했다. 그래도 급하게 가고 싶진 않아서 어떻게든 그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에일린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로이드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나가지 마.”

“왜요?”

로이드가 직접 창문을 열어 밖을 보여줬다.

아까도 어렴풋이 느꼈던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에일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실내 연무장에서 훈련한다고 하니 거기서 티타임 하고 오후 수업이 끝나면 와서 쉬어. 머리는 안 아파?”

로이드의 질문에 에일린이 제 머리를 집어봤다.

“괜찮아요.”

로이드가 문득 에일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볍게 그녀의 턱을 들게 해서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반쯤 감긴 에일린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나와 있지 않을 땐 취할 만큼 마시지 마.”

술버릇이 별로라서 안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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