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칼릭스 원로
에일린이 클로에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무렵, 로이드의 집무실로 누군가 찾아왔다.
“바쁘지 않다면 시간 좀 내주겠습니까?”
“바쁩니다.”
로이드가 냉정하게 잘라버렸지만 칼릭스 원로는 허락이라도 받은 듯 안으로 들어왔다. 로이드는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오는 칼릭스 원로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럴 거면 왜 바쁘냐고 물었습니까?”
“조카와 차 한 잔 마시고 싶은 걸 어쩝니까.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와야지.”
칼릭스 원로가 뻔뻔히 대답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로이드에게 와서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로이드가 마지못해 그의 앞에 가서 앉자 칼릭스 원로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신 회의에서 보던 때와 다르게 칼릭스 원로의 얼굴엔 로이드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데려온 아가씨와 결혼하니 기분이 좋습니까?”
조카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칼릭스가 가신 회의 때 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나쁘지 않습니다.”
“직접 만나보니 아주 사랑스러운 아가씨더군요.”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본 칼릭스 원로가 지긋한 미소를 만들었다.
“전하의 성격으로 봐서는 아무나 앞에 있는 여자에게 청혼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보석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전하의 안목이 좋은 건지 모르겠군요.”
“보면 모릅니까? 안목입니다.”
로이드의 뻔뻔한 대답에 칼릭스 원로가 그냥 나갈까 하는 표정으로 문을 보았다.
“농담만 할 거라면 나가세요.”
“원로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 왜 그런답니까.”
어떤 일인지 듣기도 전에 로이드가 대뜸 짜증을 부렸다. 제 일에 사사건건 방해하는 원로 때문에 그간 일이 많았다.
“사이클 안정제를 빼앗지 못해 더욱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칼릭스 원로가 덤덤하게 말했다.
“내 것을 못 빼앗아서 안달 났네요.”
“그나마 대공 자리는 못 뺏어가는 게 어딥니까. 적어도 대공이 되는 건 막지 않았습니다. 비록 꼭두각시로 부리려 하긴 했지만.”
칼릭스 원로는 언뜻 원로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그들의 욕심을 꼬집고 있었다. 원로들은 로이드를 어린 나이에 가주 자리에 앉히고 그의 모든 것을 단속하려 들었다.
“대공께서 마음대로 할 때 건들지 못해 분해하더니 이번에도 계획을 세우고 있더란 말이죠.”
로이드는 꼭두각시가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제멋대로 굴었다. 그 와중에 로이드를 둘러싼 소문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제가 원하는 대로 굴 수 있어서 편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일을 벌이고 있다니 로이드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뭘 한답니까?”
“모릅니다.”
칼릭스 원로의 깔끔한 대답에 로이드가 기가 찬 표정으로 물었다.
“……숙부는 대체 원로원에 왜 들어갔습니까?”
“40살의 창창한 숙부를 원로원에 집어넣은 조카가 할 말은 아니지요. 나이가 안 맞다고 안 놀아주는 걸 어쩌라고요.”
“지금 그게 할 말입니까?”
이거만큼은 칼릭스 원로도 할 말이 많았다.
“몸에 좋다는 약을 밥보다 더 많이 먹어본 적 있습니까? 주름 펴는 팩을 밤새 붙여본 적 있어요? 있으면 어디 말해 보세요.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안 끼워줍니다.”
칼릭스의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에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하지 않아도 될 노력 때문에 더 끼워주기 싫을 거 같다는 속내를 들킬까 봐.
로이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마저 감춰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칼릭스가 크흠, 헛기침과 함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그들 중 누가 움직였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로이드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다. 그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원로들이 무슨 짓을 벌였을까 생각해 봤다. 그러다 문득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에일린.”
툭 내뱉은 이름이었지만 바로 알아들은 칼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벌써 대공비에게 손을 뻗었을라고요.”
“그건 숙부의 생각이고요.”
그렇게 경계선을 그어버리면 그들이 파고들어 오는 걸 경계할 수 없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에일린에게 손을 뻗었다는 가정까지 가져와야 했다. 칼릭스가 알아서 에일린의 하루를 정리했다.
“그래요. 그렇다고 치면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우선 대공비는 하루 내내 수업을 듣지요?”
분명 칼릭스가 말을 받아주고 있는데 로이드가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자신의 아내인데 엄한 칼릭스가 말하고 있으니 기분이 별로였다. 하지만 굳이 칼릭스의 말을 막지 않았다. 대공비의 하루 일정은 대공가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가뜩이나 새로 들어온 사람인데 그 행동도 평범하질 않아서 그랬다.
“사방팔방에 테이블을 깔아두고 티타임을 즐기고요.”
칼릭스가 턱을 매만지며 목울음을 흘렸다.
“워낙 사방이 트인 곳으로 다니니 어디 뭐 은밀하게 말을 걸 수도 없겠어요.”
진지해야 할 이야기라 칼릭스가 곧 웃음을 그쳤다. 본래대로 돌아온 칼릭스가 다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간접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건데…….”
그 이상은 칼릭스도 짚이는 게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알아보려면…….”
“에일린을 옆에 둬야겠습니다.”
“음?”
로이드의 말에 칼릭스는 왜 대화가 그렇게 흐르지? 하며 말을 삼켰다.
“그래야 더 확실히 살필 수 있으니까 한 말입니다.”
“그렇군요. 전 또 마음에 들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분명 로이드는 아니라고 했지만, 어지간히 아무렇게나 골라온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대고 싶은 게 대공비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그럼 무엇일지 떠올려 보지요.”
칼릭스의 물음에 로이드가 손쉽게 하나를 떠올렸다.
“사이클 촉진제.”
현 대륙에 퍼진, 누가 발명했는지 모를 사이클 안정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억제제로 미처 막지 못한 사이클을 가라앉힌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발명이었다. 그 안정제가 대공가에서 나오는 건 소수의 인물만 알고 있었다. 원로원이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로이드가 가진 독점권을 탐내고 있었다. 더불어 지금 연구 중인 사이클 촉진제 역시.
“촉진제는 아직 연구 중에 있습니다. 나오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러니 원로원에서 지금 당장 무슨 짓을 하기엔 성급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칼릭스의 생각은 달랐다.
“말 그대로 연구 중이지요. 손을 댄다면 댈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다지만…….”
칼릭스가 다시 자신의 의견을 말하다가 로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 가정은 아니겠지요? 대공비와 촉진제를 동시에 건드리는 건…… 아무리 그들이라도 절대 하지 않겠지요.”
칼릭스가 어떻게든 아니라는 이유를 들먹이고 싶었지만 당장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 자신도 그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걸 알기 때문에.
로이드의 표정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
에일린이 상기된 얼굴로 방에 돌아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클로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어떤 수업을 듣는지 전부 흥미로운 요소였다. 특히나 에일린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아카데미와 전공이었다.
“오늘은 늦었네?”
먼저 방에 와 있던 로이드가 에일린을 눈짓하더니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에일린이 홀린 듯 로이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방에서도 서류를 보는 그가 자신을 보도록 손짓했다.
“클로에 아가씨를 만났어요.”
“그래?”
“네.”
“그래서 기분이 좋은 거야?”
로이드는 에일린의 달아오른 볼을 보았다.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볼이 발긋발긋한 것이 맨들한 사과 같았다.
“클로에 아가씨가 페로몬과에 다닌다면서요.”
“그래. 베타면서 페로몬과에 간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오히려 자신은 베타라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서 갔지. 그냥 무난한 과를 선택하면 좋았을걸.”
“베타니까 더 좋지 않아요?”
탐탁지 않았다는 로이드의 말에 에일린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꼭 그 안에 속한 사람만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나는 모르는 미지의 세계니까 더 알고 싶고 그러잖아요.”
“……그런 쪽이었어?”
“뭐가요?”
“클로에와 같은 생각이냐고.”
“네. 클로에 아가씨랑 저 닮은 점이 많았어요.”
에일린은 솔직히 말했다.
“클로에 아가씨께서 아카데미에서 어떤 수업을 듣는지 말해 줬어요. 전공 위주로 수업하기도 하지만 가끔 선택과목으로…….”
“잠깐만.”
로이드가 에일린의 말을 끊었다.
“저녁은 먹었어?”
“어…… 어쩌다 보니 저녁을 건너뛰었네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클로에랑 닮았다며. 걔도 신나서 그 이야기를 했을 테지. 식사를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잠깐만요.”
에일린이 일어서려는 로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먹겠다고 해봐. 억지로 먹일 수도 있어.”
“그런 게 아니라 먹고 싶은 게 생각났어요.”
“말해 봐.”
에일린이 뭔가 생각하는 듯 굴더니 선뜻 하나를 말했다.
“술 마실래요.”
“밥 먹으라고 했더니 술을 마시겠다고?”
로이드의 물음에 에일린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엄한 술로 튀는 거야.”
“제가 원래 술을 즐기진 않거든요.”
“지금 술 마시겠다고 해놓고 그런 말이 나와?”
“어쨌든요.”
로이드는 앞뒤가 안 맞는 말에도 일단 들어주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에일린은 정말 술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에 덕분인지, 기분이 들떠서 오늘은 술이 마시고 싶었다.
“기껏 생각하더니 술이라니, 진짜 예상을 뛰어넘네.”
로이드가 기가 찬 듯 웃음을 흘렸다. 한편으론 에일린의 엉뚱한 발상이 재밌어서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로이드가 가만히 있으니 에일린이 넌지시 제안했다.
“같이 술 마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