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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27)화 (27/120)

27화. 클로에

에바 부인의 수업은 하루를 건너뛴 후 재개되었다. 로이드가 에일린의 모든 일정을 다 미루는 바람에 에바 부인 역시 왔다가 돌아간 것이다. 내심 달라질 수업에 기대하고 있던 에일린은 하루를 더 기다린 끝에 에바 부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부터 어떤 수업을 하나요?”

에일린이 기대에 차서 물었다. 그 모습이 이제 막 사교계에 관심 있어 하는 소녀 같았다.

“처음부터 마마께선 인사를 많이 하셨습니다.”

로이드에게 들었던 말이라 에일린은 차분하게 그녀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적받았다고 해서 기분 나쁘기보단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니까.

“잘하셨습니다.”

“……네?”

예상치 못한 칭찬에 에일린이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대공비가 되어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다. 아니면 그러지 말라고 더 강조하려는 건가 싶었다.

“마마께서 인사할 때마다 고용인이 좋아하는 걸 봤습니다. 현 대공 전하께는 볼 수 없는 자애로운 모습이지요. 그런 점에선 두 분께서 잘 어울리시는군요.”

에바 부인의 얼굴 어디에도 빈정거리려는 표정이 보이지 않아 에일린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감사해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장소에 한해서입니다.”

에바 부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무적으로 받아쳤다.

“밖에선 누구보다 인사에 인색한 분이 되십시오. 마마께서 리하스트 대공가의 안주인이 되었다는 걸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제 행동 하나하나에 대공의 이름이 붙는다고 하니 에일린이 자세를 고쳤다. 에바 부인의 말을 더 자세히 경청하기 위해서였다.

에바 부인이 에일린의 앞에 3개의 초대장을 내려놨다.

“이건 마마께 전해달라며 받은 초대장입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마마의 앞으로 초대장이 많이 올 것입니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요.”

에일린이 웃으며 검지를 들었다. 결혼하고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지금까지는 받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에바 부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 말고도 더 있습니다.”

“그래요? 어디 있나요?”

에일린이 초대장을 살피는 사이 누군가 들어왔다. 슬쩍 돌아보니 찻잔을 들고 오던 제인인데 그녀가 에일린과 눈이 마주치자 난감한 듯 제 뒤를 가리켰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처음 보는 여성이 제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제가 선생에게 말했어요. 저 올 때까지 초대장을 모아달라고요.”

그녀는 에일린과 눈을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시누이 짓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저 제가 와서 말해 주고 싶었어요.”

그제야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대공의 여동생인 클로에였다.

“클로에 리하스트예요. 허락 없이 들어와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보다 이유를 계속 말해 줄래요?”

에일린은 당장 대공의 여동생을 만난 놀람보다 그녀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다.

“이제껏 전혀 교류하지 않았던 가문과 정략결혼을 맺었던 걸 밝히는 것도 모자라 결혼 상대를 밝혔죠. 그래서 대공비가 누군지 궁금한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특히나 우성 알파랑 결혼한 상대가 베타이니까…….”

클로에가 에바 부인에게도 아는 척을 하고는 근처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도 좋냐는 무언의 신호에 에일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 알파 동생이 베타라는 것보다 더 난리 날 게 뻔해요.”

클로에는 자리에 앉으며 방금 에일린이 보던 초대장을 훑었다. 그리고 하나의 초대장을 톡 가볍게 눌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제밀란가의 성을 본 에일린이 뭔가 떠오르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클로에와 눈이 마주쳤다.

제밀란가는 리하스트 대공가처럼 알파만이 가주를 해 오고 형질을 주시하는 가문이었다.

“제시카는 오메가로 발현하고 줄곧 오빠에게 마음을 표현해왔어요. 그러니 좋은 감정으로…… 초대장을 보내진 않았을 거예요. 새언니에게 어떤 마음으로 다가갈지 몰라요. 그럴수록 더욱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클로에가 중간에 한숨을 쉬며 말을 아꼈지만 어떤 내용이 생략되었을지 예상되었다. 모두가 탐내던 우성 알파와 결혼한 상대가 베타. 에일린도 줄곧 생각해왔다.

“새언니도 예상하고 있을 테니 그냥 말할게요. 전 이 집안을 골라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우성 알파의 부족한 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새언니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죠.”

클로에는 자신을 빗대 에일린의 상황을 짚어줬다. 냉정하게 말하던 클로에가 바로 말을 이었다.

“새언니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초대장을 모아두라고 한 거예요. 제 마음대로 굴어서 미안해요.”

클로에가 앉은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결혼식 때 에일린은 클로에를 스치듯 본 게 다였다. 많은 하객 속에서 가까이에 앉아 있기에 봤지만 직접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자리에서 클로에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고 순수한 사과까지 건네왔다.

“그렇다고 절대 눌려선 안 돼요. 차라리 결혼 잘한 주제에 뭐가 저렇게 콧대가 높냐고 들어도 물러나지 말라고요.”

“네.”

“그러라고 오빠가 에바 부인을 들인 거 같으니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클로에가 안 봐도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에바 부인에게 많이 배웠어요. 절대 기죽지 않을 방법이요.”

클로에가 에바 부인에게 고맙단 눈인사를 건네자 에바 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마셨다. 에일린과 클로에가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는 것이다. 에일린이 클로에의 앞에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말을 걸었다.

“클로에 아가씨라고 부르면 되죠?”

“그럼요.”

“에일린 리하스트, 클라우디아가가 제 친정이에요.”

“잘 알아요. 저 결혼식 때 에단 클라우디아 공자를 만났었어요.”

“그래요?”

클로에가 오빠를 언급할 줄 몰랐기에 에일린이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제 앞에 천사가 서 있었어요.”

클로에는 에단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딱 그것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자 에일린이 맞다고 웃었다.

“저 이번에 새언니 보고 싶어서 진짜 빨리 왔어요. 새언니 얼굴을 보기 전인데도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 공통점이 있잖아요.”

클로에의 말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떠올려보던 에일린이 바로 하나를 떠올렸다.

“오빠가 있는 거요?”

“맞아요. 특히나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의 동생이고 우리 둘 다 베타라는 게 닮았잖아요.”

그래서 괜히 마음이 간다는 클로에의 말에 에일린이 제 앞에도 차를 가져오며 웃었다. 그녀 역시 클로에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것부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조금도 숨김이 없다. 그게 로이드를 닮은 듯했다. 남매라 그런가?

에일린이 차를 마시다 말고 클로에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성격만 닮은 게 아니었다.

“진짜 닮았네요.”

에일린이 홀리듯 말했다. 클로에의 얼굴 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클로에는 정말 싫다는 듯 진저리치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랑 닮았단 소리 말아요.”

딱 정곡을 짚는 말에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어릴 때부터 닮았다는 소리 지긋지긋하게 들었어요. 까만 거 말고는 하나도 닮은 거 없어요. 그 정도면 까마귀도 닮은 거지.”

클로에가 정말 싫다는 듯 몸서리쳤다.

그래서 에일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시원시원하게 트인 눈꼬리나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얼굴형이 닮았다. 하지만 클로에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짧은 콧대나 도톰하고 작은 입술 때문인지 클로에는 귀여운 분위기가 잔뜩 풍겨 나왔다.

그 반응에 에일린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대공의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운 사람일 줄이야.

“대공 전하는 만나고 오셨습니까?”

이제껏 가만히 지켜보던 에바 부인의 물음에 클로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으로 봐서 오자마자 여기로 온 게 분명했다.

“내가 왔다고 해봐야 연구실로 보낼 게 뻔한데 왜 가요.”

“클로에 아가씨. 그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엄연히 대공가의 주인이 머물고 계시는데…….”

“알았어요.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클로에가 손을 들어 에바 부인의 잔소리를 막았다.

“저 이제 학생 아니거든요.”

“절 선생으로 불렀으니 여전히 우리의 사이는 선생과 학생이지요.”

“가끔 보면 오빠보다 더 독한 거 아시죠?”

클로에가 앓는 소리를 내다가 에일린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마침 궁금한 게 있었던 에일린이 옳다구나 끼어들었다.

“연구실이요? 연구를 하세요? 혹시 어떤 걸 연구하세요?”

“어?”

에일린의 적극적인 질문에 클로에와 에바 부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상황을 알고 있냔 눈빛이 오갔지만 둘 다 모르는 일이었다.

“페로몬에 관한 연구가 주이고 억제제 같은 약을 연구해요. 어머.”

클로에는 매처럼 붙잡힌 제 손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이 클로에의 손을 낚아챈 것이다.

“우리 정말 닮은 점이 많네요.”

에일린의 눈동자에 몽롱한 기운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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