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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26)화 (26/120)

26화. 관심의 형태 (2)

“요리가 입맛에 안 맞아? 그 사라 부인의 애플파이라도 갖다줘?”

“괜찮아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비일즈 요리사의 요리는 아주 훌륭해요.”

“그럼 이유가 뭔데. 흙이라도 집어 먹고 싶을 때까지 굶을 거야?”

멍청한 생각이라는 듯 로이드의 시선에 한심함이 어렸다. 그 반응에 에일린이 억울한 마음에 그를 보다가 곧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식사를 안 한 것도 아니고 한 번이었다. 그것도 기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제가 식사를 건너뛴 게 그렇게 문제인가요?”

에일린의 무덤덤한 질문에 로이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생각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보던 에일린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느끼고 뒤늦게 말을 붙였다.

“절 많이 걱정하시네요.”

“그렇게 늘어져 있으니까 그렇지. 이러면 내가 뭘 보여줘도 반응을 못 할 거 아니야.”

로이드의 언성이 높아졌다.

“보여줘요? 뭐요?”

“……따라와.”

로이드는 날카로운 턱을 들어 밖을 가리켰고 에일린이 그의 신호에 따라 일어났다. 지금껏 그는 친절히 설명해줄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직접 봐야 하는 경우엔 입을 열지 않는 편이었다.

에일린이 느린 속도로 그를 따라 나가니 로이드가 혀를 한 번 치곤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자신의 속도에 맞춰준 게 분명한 움직임에 에일린은 새삼 신기한 듯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뭘 그렇게 봐.”

“진짜 성격 더러운 사람 맞아요?”

로이드가 뚝 멈췄다. 그는 앞을 보던 시선 그대로 생각에 빠졌다가 천천히 에일린을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황당하다는 감정에 에일린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걸 대놓고 묻고 싶어?”

“저한테 속도를 맞춰주니까 그렇죠. 되게 배려 깊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에일린은 나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 남자가 잘해 주니까 그런 말이 나온 건데.

“그래, 다 내 탓이지.”

로이드가 에일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갑자기 화살의 방향을 그에게 돌려버리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에일린이 그를 보았다.

“소문이 어떻게 퍼지든 가만히 놔둔 내 탓.”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손가락이 간지러워 에일린이 손을 둥글게 말았다. 저절로 둘이 손을 잡게 되자 로이드가 다시 앞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대신 시선은 여전히 에일린을 보고 있었다.

“속도 올린다. 잘 따라와.”

손잡았다고 로이드는 아까보다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혼자서 걸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라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 에일린은 뒤늦게 하나를 깨달았다.

소문이 어떻게 퍼지든 놔뒀다는 건 자기 입으로 자기 성격 안 더럽다고 한 거지?

***

“제 집무실이요?”

“그래.”

로이드가 간 곳은 에일린의 집무실이었다.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난 그가 먼저 들어가라는 듯 눈짓했다. 팔짱까지 낀 게 아무것도 손대지 않을 듯한 분위기였다. 에일린이 작게 숨을 내쉬고 직접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면서 보이는 집무실의 전경.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둘러보던 에일린이 다소 무심히 말했다.

“달라진 걸 모르겠어요.”

“당연하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가 달라졌겠어.”

로이드가 에일린을 스쳐 먼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당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움직였다.

“그런데 왜 문을 열어보라고 했어요.”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에일린은 로이드의 뻔뻔한 얼굴을 보며 기가 막혀서 물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에일린의 물음에 답하기보다 다시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이번엔 에일린의 개인 공간으로 마련된 문이었다.

에일린이 또 문을 열라는 뜻에 포기한 듯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음?”

어딘가에 걸린 것처럼 문고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더불어 잡아당겨도 꿈쩍하지 않았다. 에일린이 몇 번 더 당겨보고는 로이드를 보았다. 설마 이것 때문에 집무실에서부터 문을 열어보라고 한 걸까?

“맞아. 이곳은 따로 잠금장치를 달았어.”

로이드가 에일린의 옆에 서서 품에 넣어둔 무언가를 꺼냈다. 은색의 열쇠였다. 그걸로 잠금을 풀자 아까와 다르게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로이드가 들어가라는 의미로 기다리고 있자 에일린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들인 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기분이 남달랐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한 번 잠금을 해제한 게 마음에 들었다.

“감사해요.”

흘리듯 한 말을 로이드가 잊지 않았다는 게 감동이었다. 그래서 에일린은 그에게 제 마음을 표현했다.

“아직이야.”

로이드가 에일린의 뒤쪽으로 갔다. 아무것도 없는 벽 앞에 선 그가 제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에일린은 그가 왜 거기 있는지 의아하면서도 순순히 따라가자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잡았다.

“여기에 손을 대봐.”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목을 잡은 채로 벽 쪽으로 이끌었다. 에일린이 손끝을 펴서 벽을 다 짚었다. 벽에 손을 댄 이유가 뭘까 하면서.

그때였다. 벽에 선이 가기 시작하더니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에일린이 놀라 한 걸음 물러나자 로이드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줬다. 에일린은 로이드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한 채 벽의 움직임을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벽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놀랐다.

이내 벽의 일부분이 옆으로 밀려나더니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가 진짜지.”

귓가에 닿아오는 뜨거운 숨과 목소리에 에일린이 어깨를 움츠렸다. 앞을 보고 있어 동요한 표정을 감췄지만 놀랐다. 그러다 로이드의 목소리에 담긴 기대감에 에일린은 다시 앞을 보았다.

어떻게 된 걸까?

“당신의 손이 닿아야지만 반응하도록 만들었어.”

이런 기술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에일린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하듯 로이드가 말을 덧붙였다.

“대대로 대공가를 노리는 자들이 많았지. 그러다 보니 생긴 가문의 일급 기술이야. 몇 군데에 이런 공간이 숨겨져 있어.”

“대단하네요.”

에일린의 눈동자에 학자 특유의 열감이 서렸다. 당장 이 비밀공간이 필요한 것도 제 연구자료를 넣어두려던 것 때문이 아닌가.

“이건 당신이 아니면 열지 못할 거야. 그러니 필요할 때마다 쓰면 돼.”

그간 생각해왔던 고민 하나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에일린이 선반으로 공간을 나눈 벽 안의 공간을 보다가 로이드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신의 고민을 쉽게 들어준 그도 내부를 보며 괜찮은지 파악하고 있었다. 에일린의 시선을 느낀 로이드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쳐왔다.

“왜? 아직도 머리 아파?”

“이젠 괜찮아졌어요.”

에일린이 고개를 저으며 아프지 않단 대답을 꺼냈다. 정말로 집무실에 오고부터는 지끈거리는 두통이 사라졌고 속도 가라앉았다. 이 모든 변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시선을 돌려 비밀공간을 보았다.

“그런데 저한테 이런 걸 알려줘도 돼요? 저는 일 년 후에 이 집을 나갈 텐데 이런 기술이 있다는 걸 말하면 어떡해요.”

에일린의 가벼운 언급에 로이드의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그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빛으로 에일린을 보았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야. 이제 적응해나가는 중인데 벌써부터 나갈 생각인 거야?”

“나가는 건 정해져 있으니까요.”

에일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로이드의 대답에 금세 평정이 흐트러졌다.

“당장 나갈 생각부터 하는 아내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네.”

로이드의 반쯤은 가벼운 그러나 그냥 무시할 수 없는 말에 에일린이 동요했다. 대공비로 있을 동안 허술하게 있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의 말대로 나갈 생각은 계속 저변에 깔아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예리한 시선을 가진 자에게 들키는 건 아닐까?

“에일린.”

로이드가 에일린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돌렸다. 그를 향해 돌아선 에일린이 로이드의 목울대를 보았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이 나가서 누구에게 말해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야겠지?”

“아까는 장난이었어요. 말하지 않을게요.”

“이건 상관없다고 했을 텐데. 내가 짚으려는 건 당신이 나가겠다는 거야.”

“아.”

로이드가 에일린과 눈을 마주친 그대로 제 말을 흘려듣지 못하게 짚듯이 말했다.

“나갈 생각할 시간에 나에게 집중해. 나 역시 에일린, 당신에게 집중할 테니까.”

로이드가 반쯤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은근함을 담았다. 자신 역시 에일린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를 아내로 맞았으니 신경 쓸 것이다. 첫날밤 에일린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그가 의식하지 않아도 신경이 쓰였으나 그것을 감춘 채 로이드가 에일린의 턱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잊었어? 당신 내 아이도 낳아야 해.”

에일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린 서로에게 관심을 주는 거야. 알겠지?”

로이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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