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24)화 (24/120)

24화. 만일 오메가라면

분명 처음엔 대공이 싫었다. 제 오빠를 죽게 만든 원인이라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에게 오빠를 넘기지 않으려 거짓말을 하고 자신이 대신 결혼했다.

그런데 어딘가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원망해야 할 상대였던 대공이 밉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지금껏 그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다. 사람 속을 긁는 말투나 내려다보는 눈빛에 가끔 울컥하는 걸 제외하면 나쁜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싫다고 한 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툭툭 내뱉는 말투에 은근한 배려가 깔려있었다.

정말 제 오빠의 사이클을 일으켜놓고 전쟁터에 간 걸까?

“베타인데 굳이 그런 가정을 해야 하나?”

다정하진 않고 그냥 평소와 다름없는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어쩜 저렇게 대화를 뚝 잘라먹을 대답을 잘하지, 싶으며 끊어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만일이라고요. 당신의 페로몬에 히트가 왔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로이드가 힐끔 에일린을 봤다가 다시 서류로 눈을 내렸다. 그의 반응에 제 질문이 정말 별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에단 오빠를 버려두고…….

“당연한 걸 왜 물어. 안아야지.”

“……안아요?”

에일린이 의외의 대답을 듣자 못 믿고 되물었다. 질문을 바꿨다.

“만약 제가 아니라 오늘 처음 본 사람이라면요?”

“쓸데없는 질문을 하라고 앉혀둔 거 아닌데.”

적당히 하라는 의미에도 에일린은 진지했다. 당장 그녀는 로이드가 어떤 타박을 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가 내뱉는 대답이 중요했다.

“처음 본 사람이라도…… 안을 거야.”

로이드는 잠깐의 머뭇거림 후에 솔직히 말했다. 대신 다른 말을 빠르게 덧붙였다.

“물론 사이클 안정제로 가라앉힐 수 있다면 가라앉히겠지. 하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안을 수밖에.”

질문이 그를 흔들었는지 방금까지 잘도 넘어가던 서류가 넘어가지 않았다. 로이드는 아예 펜을 내려놓으며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내보였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혹시나 사랑하는 상대만 안아야 한다거나 어쩜 자기를 두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대답하기만 해.”

가만 안 둔다는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는 에일린은 잠깐 머뭇거렸지만 그가 말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대답이 의외라서 그랬다.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안 해요.”

“당신도 봐서 알겠지만 러트와 히트는 단순히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야.”

로이드는 에일린이 베타이기에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대놓고 경계선을 긋는 말을 하진 않았다. 오메가 오빠가 있어 알지 않냐고 에둘러 말했다.

‘직접 겪어봐서 알아요.’

에일린이 속으로 대답했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이나 알파의 러트 사이클은 일정 주기마다 오는 하나의 발정기였다. 오메가는 알파의 노팅을 받아야 하고 알파는 오메가의 안에 노팅을 하는 게 발정기를 가라앉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단순하다고 해도 그 조건을 채우지 못할 때 따라오는 대가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노팅을 받지 못한 오메가는 작열통에 괴로워하고 알파는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두통에 몸부림친다.

“평소에 억제제만 잘 먹어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사이클의 고통을 덜겠지만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건 차라리 죽고 싶다 여겨질 정도지. 그런 고통을 주고 무시하는 자는 알파 자격도 없어.”

그 말은, 상대방이 고통을 느끼기 전에 안아주는 게 알파인 로이드의 책임감이라는 거다.

“물론 지금껏 그런 일은 없었어. 당장 나로 인해 누군가의 사이클이 꼬인 적도 없었고 가문엔 사이클 안정제가 있거든.”

로이드는 당연히 그런 일이 없을 거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즉 처음부터 에일린의 질문은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듯.

에일린은 로이드의 말을 곱씹었다. 분명 안지 않을 거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래야 말이 됐다. 자신의 오빠를 두고 나갔던 것과 앞뒤가 맞지 않자 에일린은 다른 가정을 떠올렸다.

“남자 오메가는 어떻게 생각해요?”

“대체 얼마나 조건을 주렁주렁 달아올 생각이야.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

“그럼 왜…….”

로이드가 눈을 찌푸리며 에일린과 눈을 마주쳤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에일린은 오빠에게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질문한 건데 오히려 더 꼬여버렸다. 자기 때문에 남이 히트가 온대도 상관없다거나 남자 오메가를 싫어한다고나 그런 대답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전부 에일린의 예상을 빗나갔다.

“대공님 되게…… 자애로운 분이라고요.”

“욕이야?”

“칭찬인데요.”

“좋게 들리지 않는데?”

“설마요.”

에일린이 마저 차를 마시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차가 맛있네요. 이 향은 무슨 허브를 블렌딩했죠?”

에일린이 어물쩍어물쩍 차로 화제를 돌렸다. 이미 다 식었는데도 향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말을 꺼냈는데 실제로도 나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내어줄게.”

“이 차요?”

“사이클 안정제.”

에일린이 괜찮다고 대답하려다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뭐.”

이제 에일린에게 방해를 받는다는 기분에 로이드의 대답은 심통 맞았다.

“혹시 우리 결혼식 날 에단 오빠 괜찮았어요?”

결혼하고 난 후 에단 오빠를 찾아갈 생각을 못 했다.

“그걸 이제야 물어보네.”

알고도 말 안 하고 있었던 듯 로이드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새겨졌다.

“잊고 있었어요.”

멍청하긴. 가장 중요한 건데 그걸 왜 잊어. 잊길.

에일린은 너무도 당연한 걸 생각 못 한 자신이 한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빠를 들여다봤어야지, 에일린이 한참 자신을 탓하는 생각을 이어갈 때였다. 에일린의 표정으로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 로이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무 일 없었어.”

에일린이 제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내리며 그를 보았다.

“……없었어요?”

“그래. 집에 돌아갈 때까지 확인했고 돌아가서도 매일 들여다보게 했지.”

“정말이죠?”

“가서 확인해 보던가. 당장 클라우디아 백작부터 그 집 고용인 전부 찾아가면 되겠네.”

그렇게 의심할 거면 왜 맡겼냐는 듯 로이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느끼며 에일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반쯤 힘이 빠진 몸이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고마워요.”

“알면…….”

로이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중간에 멈췄다. 고마우면 뭘 하라는 듯 조건을 걸려는 것 같은데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가봐.”

로이드는 에일린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여기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방해돼. 그냥 나가.”

로이드가 졌다는 듯 한 손으로 제 이마를 감싸며 다른 손을 내저었다.

반성하라고 데려왔는데 이상하게 그만 꼬인 기분이었다.

***

아침에 일어난 에일린은 기지개를 켜다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지끈거리는 통증에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던 에일린은 불쑥 다가온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머리 아파?”

“네.”

벌써 착장을 마친 로이드가 에일린의 머리에 턱 손을 올렸다. 그대로 쓱쓱 거칠게 쓸어주는데 그게 시원해서 에일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리 감았어?”

“어젯밤에 씻었어요.”

“그래?”

“……냄새나요?”

“응.”

에일린이 파드득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급하게 로이드의 손을 벗어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앞으로 넘어왔다.

“미안해요.”

“좋은 냄새 난다고.”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해 주지.”

“고개 숙여.”

에일린이 턱을 든 상태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싫어요.”

“좋은 말 할 때 이리 와.”

로이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오지 않으면 억지로 데리고 오겠다는 듯한 눈빛에 에일린이 엉거주춤 원래대로 고개를 내렸다. 다시금 쓰다듬어주고 있는 손길을 느끼던 에일린이 웅얼거렸다.

“이게 부부 사이에 나눌만한 스킨십인가요?”

“아니지.”

“그런데 계속 이렇게 하려고요?”

“그럼 어떡하라고. 5살이나 어린 신부가 무섭다는데 상관없이 들이댈까?”

“그건 아니지만…….”

에일린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자신의 거부감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로이드에 대해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연무장에 나갈 거야?”

“그러고 싶지만 안 가려고요.”

“왜?”

“반성하라면서요. 그래서 오늘부터 안 나가려고요.”

에일린은 지루하지 않게 티타임을 즐겼던 게 아쉬우면서도 순순히 포기했다.

“아냐, 다녀와.”

“다녀오라고요?”

“그래, 덕분에 훈련이 잘되는 거 같아.”

로이드가 흔쾌히 갔다 오라고 밀어주자 에일린이 솔깃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이드가 나간 후 에일린이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어제 집무실에서 나눈 대화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로이드는 당연히 책임지겠다고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 그를 향한 불신과 다름없었다.

그럴 거라면 그런 질문을 왜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내가 오해하고 있던 걸까?”

에일린이 제 머리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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