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반성해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에바 부인이 자신을 향한 인사에 에일린을 보았다. 요즘 지켜보기만 하는 자신에게 꾸준히 말을 걸어오는 것도 모자라 나갈 때면 꼭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네왔다. 그때마다 단답으로 대답하던 에바 부인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에일린을 향해 섰다.
막 책을 덮던 에일린이 무슨 일인가 싶어 에바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내일부터는 수업의 방식을 바꾸겠습니다.”
그건 즉 지금까지 지켜보던 걸 그만두겠다는 의미였다. 그에 에일린이 기쁜 듯 방긋 웃었다.
“그럼 내일부터 우리 마주 보고 마음껏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잘됐네요. 저 궁금한 것도 많았어요.”
에일린이 책을 품에 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대답 없는 에바 부인에게 계속 말을 걸었던 에일린은 대화가 가능해진다 하니 기쁜 모양이었다.
“그럼 내일 만나요.”
에일린이 살랑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오늘도 이로얀 오빠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방도 생각해야 하니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에바 부인은 나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거기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도 밖에서 티타임을 하실 건가요?”
“음, 오늘은 세탁실에 가 보려고 했어요.”
“어째서 그렇게 틈만 나면 나가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에일린이 말끝을 흐렸다. 에일린이 과거에 들었던 기억을 토대로 누군가를 찾는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냥 찾는 사람이 있다고만 해도 왜 찾는지 물어볼 수도 있어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보고 싶어서요.”
“고용인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네.”
에일린이 짧은 대답으로 대화를 잘랐다. 에바 부인과 나눈 대화에 있어 처음으로 에일린이 먼저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에바 부인은 더 물어보지 않고 나갔다. 에일린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깊이 숨을 내쉬었다.
“에단 오빠. 그냥 이로얀 오빠가 무슨 일을 한다고 말해 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대공가 고용인을 다 살펴볼 기세로 뒤지진 않았을 텐데.
에일린의 혼잣말에 두 사람이 재채기를 했다. 한 사람은 에단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거기서 뭐 해?”
“클로에 아가씨를 기다렸습니다.”
“날 왜?”
“이제 곧 방학이지 않습니까. 따로 맡길 게 있으면 주십시오.”
“안 그래도 혼자 가지고 가기엔 좀 부담스러웠는데 잘됐네.”
클로에의 엄살에 러츠 경이 미소 지었다.
***
“대공 전하.”
로이드를 보는 기사의 얼굴에 착잡함이 서렸다. 보고를 위해 왔지만 다른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는 제라미 경은 보기 드물게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지?”
로이드가 막 서류를 내려놓으며 깍지를 꼈다.
“대공비께서 저희의 훈련을 지켜보셨습니다.”
“들었어. 열심히 훈련했다며?”
“네. 오랜만에 죽을 만큼 했습니다.”
“잘됐네.”
“그런데 또 온다고 하셨습니다.”
기사의 하소연에 제라미가 슬그머니 입을 가렸다. 대공비의 엉뚱한 짓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이 기회에 실력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로이드가 별일 아닌 듯 말하지만 실은 기사가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다.
그저 언급하지 않을 뿐.
“단장의 훈련이 평소보다 과해졌습니다. 다음에 또 마마께서 온다면 저희 죽습니다.”
기사가 말려달라 구는 말에 로이드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에일린의 이번 행동이 의외였다. 수업을 어떻게 듣는지야 에바 선생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런데 티타임 시간에 장소를 엉뚱한 데로 잡는다는 발상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스러운 한편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에일린은 이제 어엿한 대공비가 되었고 대공가의 살림을 책임질 사람이었다.
고용인에게 관심을 주는 것 자체가 좋아 보였다. 하지만 정작 고용인들이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일터에 대공비가 들어와 빤히 보고 있으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닌가 보다.
에일린의 마음을 모르고 불편해하니 적당한 중재가 필요했다.
“에일린을 불러와.”
로이드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기사가 결연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지금 시간에 대공비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듯 그의 움직임엔 거침없었다.
기사가 나가고 난 후 로이드가 몇 가지를 더 지시하는 모습을 보던 제라미 경이 말했다.
“확실히 재밌는 분이시군요.”
“그렇지?”
“네, 지켜보는 맛이 있는 분입니다.”
“제라미 경.”
제라미 경은 예전에 로이드가 한 말을 떠올리며 동조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사고를 치고 또 그 도가 넘지 않는 적당한 선이라는 게 흥미로웠다. 또 대공비의 의외의 행동이 대공가에 은근한 활력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재밌다고 하는데 갑자기 로이드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남의 아내를 지켜보는 취미가 있었어?”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변태 같네.”
“주군?”
제라미 경이 억울하다는 듯 바라보는데도 로이드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갈색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았지만 조금씩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인지 느슨한 분위기를 풍기는 에일린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에일린은 로이드의 집무실이 낯설어 가볍게 훑으며 다가왔다. 로이드는 제라미 경에게 장난치던 그 표정 그대로 소파를 턱짓했다.
“거기 앉아.”
“여기요?”
에일린이 어디를 가리키냐고 둘러보고 있는데 제인이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이쪽입니다. 마마.”
며칠간 바깥으로 찻잔을 옮기고 다녔더니 이젠 익숙해진 듯 빠르게 테이블에 찻잔 세트와 디저트가 세팅되었다. 얼떨결에 소파에 앉아 새로 차려진 찻잔 세트를 보는 에일린은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에일린은 일단 제 앞으로 찻잔을 끌어당기긴 했는데 뭐가 뭔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로이드가 있는 앞에서 차를 마시라니 에일린은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은 불편함에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오늘 티타임은 여기서 해.”
“왜 여기서 차를 마셔야 하죠?”
“왜겠어. 고용인들이 당신 불편하다고 하니까 그렇지.”
그제야 로이드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겠는지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거기서 반성해.”
***
차를 마시던 에일린이 로이드를 힐끔거렸다.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등 신경 쓰지 않는 듯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한 공간이라는 게 적잖이 신경 쓰였다.
‘내가 부담스러웠구나.’
로이드를 앞에 둔 에일린이 깊이 반성했다. 빤히 바라보기엔 부담스러울까 봐 티타임을 가장했는데 그냥 제 존재 자체가 걸렸다니. 눈치 없이 몰랐던 걸 간단한 상황으로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 로이드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에일린은 제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한편 조금 억울한 마음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부담스럽다고?’
에일린의 존재감은 로이드에 비하면 발톱에 낀 때만큼이나 작았다. 물론 대공비라는 신분이 있지만 대공에 비할까.
에일린이 잔을 든 채로 다른 손에 턱을 기댔다. 맑고 푸른 하늘을 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짙은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를 보면서 차를 마셨다.
차가 식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에일린의 눈동자가 천천히 앞으로 돌아왔다.
사실 한 번쯤 이런 시간을 바랐다. 이로얀 오빠를 찾는 것 이상으로 저 남자에 대해 알고 싶었다. 우성 알파로 태어나 모든 걸 갖춘 남자. 그래서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사람.
그런데 에일린이 지켜본 로이드란 사람은 책임감 있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더불어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에일린은 문득 남자의 속이 궁금했다. 소문에 기대어 듣는 것이 아니라, 저 남자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말해.”
로이드가 서류를 보던 시선을 들었다.
“보라고 해서 본 건데요?”
“손이 안 움직이잖아.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에일린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 차도 안 마시고 로이드만 봤는지. 그를 관찰하려고 그런 건 맞지만 할 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떤 말부터 할까 고심하던 에일린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주제를 먼저 꺼냈다.
“집무실 옆에 있는 방이요.”
에일린은 그 방에 커다란 책상 하나를 들였다. 다른 걸 들이기엔 아직 고민이 많았다.
“저만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인 건 아는데요.”
“맞아. 당신의 허락 없이 드나들지 못할 거야.”
“그것도 들었지만 조금 더 확실한 공간이 필요해요.”
로이드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에일린을 보았다.
“몰래 들어올 사람을 경계하는 거야?”
“대공가에서 그런 사람이 있진 않겠지만 혹시나 해서요.”
로이드가 기분나쁠까 봐 에일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대공가를 의심하는 건 곧 대공을 의심하는 것과 같아서 괜히 말을 꺼냈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조금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빠른 시일 내에 만들어줄게. 궁금한 건 그게 다야?”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까지 연결해주는 로이드의 배려에 에일린이 남몰래 입술을 물었다 놨다.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다.
“제가 만일 오메가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