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맹랑한 대공
알란이 직접 대공과 얼굴을 맞대고 결정한 일이었다. 후계를 조건으로 잡긴 했지만 그건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었다. 처음부터 결혼을 하라고 대공을 먼저 찌른 건 알란이었다. 그리고 대공은 그런 알란과 대립하는 대신 평화로운 방법을 택했다.
원로원 모두를 상대하는 대신 결혼할 상대를 구해왔다. 원하는 게 결혼이라니 들어준다는 식이었고 혼인을 약속한 적당한 가문도 있었다. 거기서 데려온 게 베타일 뿐. 얼얼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지만 다 끝난 일이었다.
이건 뭐 결혼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였다.
알란은 대공의 맹랑한 태도를 떠올리며 입술을 씰룩였다. 다 컸다고 제 마음대로 굴고 있지만 그래봐야 아직 어린 놈이었다.
알란이 들썩이는 원로들을 가라앉히려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진 않소.”
가벼운 듯 무거운 목소리.
그는 이 모든 소란을 잠재울만한 방법이 있다는 듯 굴었다.
로버트 원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장 대공만 설득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대공비가 아이를 가지겠다는 의지가 있으니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아이를 가지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겠지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텐데 그걸 막을 수도 없고…….”
“후계를 낳아 그녀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고 할 테니 꼭 막아야 합니다.”
원로들이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원로들의 말에 의하면 어떻게든 아이를 가지려고 눈에 불을 켤 에일린은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집무실 옆에 비워둔 방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방의 쓰임은 결정했지만 막상 제 것을 들이려니 망설여졌다.
“내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하지만 안전할지 믿을 수 없어.”
앞으로 연구하고 싶은 건 많은데 혹시나 제 연구일지가 밖으로 나돌기라도 하면 안 되었다. 누군가 그것을 확인해보지 않고 만들어내면 큰일이니 어디든 나만이 이용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어떡하지?”
금고를 만들까? 아니면 안 보이는 데에 숨겨둘까?
***
“혹시 여기 이로얀이라는 사람이 있어?”
에일린이 제 머리를 매만지는 제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제인이 잠시 생각하느라 손이 내려왔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엔 없습니다. 집사에게 가서 물어볼까요?”
“음…… 아니야.”
에일린은 살짝 실망했지만 다시 제인을 보았다.
“내가 고용인들을 좀 보고 싶은데 무작정 찾아가면 어떨 거 같아?”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그래?”
“대공비 마마시니까요.”
“그럼 근처에서 다른 일을 하면 괜찮을까?”
“그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제인은 에일린의 생각을 전부 들여다보지 못한 채 적당한 대답을 꺼냈다. 그러자 에일린이 잘됐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럼 오늘은 밖에서 티타임을 할게.”
“준비하겠습니다.”
제인이 나가고도 에일린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에일린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아닌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오랜만이야.’
에일린은 결혼식 후 처음으로 보는 오빠의 모습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냈다. 그날 들었던 충격적인 이야기 때문에 오빠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오빠의 표정이 생각보다 밝은 것도 억지로 꾸며냈다고 여겼다.
‘오빠, 결혼하고 처음인 거 알아? 잘 지냈어?’
에일린이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넸다. 대공을 마음에 들어 했던 오빠였으니까 적어도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오빠가 어떤 말을 하든 잘 들어주고 싶었다.
‘응. 결혼하고 바로 널 부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에단이 어렴풋이 웃었다. 그 모습에 에일린은 조금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지냈어?’
‘대공비가 되었으니 배워야 할 게 많아서 바쁘지만 괜찮아. 그리고 모두 잘해줘.’
거짓말.
에일린은 결혼식 날 에단을 흉보았던 고용인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오빠를 흉본 게 아니라 하나, 누가 들을지 모르는 복도에서 그렇게 떠드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 에일린의 반응에 에단은 대답을 듣지 않고도 알고 있다는 듯 굴었다.
‘정말이야.’
하지만 정작 대공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는 게 맞을까 싶었다. 그래도 대공비라고 무시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닌 척 굴려고 하지만 에일린의 반응이 썩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 맞다.’
에단이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거기에 반가운 얼굴이 있더라.’
‘반가운 얼굴? 그게 누군데?’
대공가에 그들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있었나? 에일린이 궁금한 듯 보자 장난기가 동한 에단이 씩 미소 짓기만 했다.
‘뭐야.’
‘너도 알아볼지 모르겠어서 궁금하네.’
누군지 말해 주지 않고 그 주변을 빙빙 돌았다.
‘힌트를 줄게. 맞춰봐.’
에단이 어떤 힌트를 줄까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이는 동안 에일린이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하고 있었다.
‘전쟁, 전략가, 승리.’
‘그게 뭐야. 우리가 언제 전쟁을 치르기라도 했어? 그리고 전략이라니 애들 싸움도 아니고, 어?’
에일린이 뭔가 떠오르는 듯 굴자 에단의 미소가 짙어졌다. 에단이 기대감에 반짝이고 있자 에일린이 아슬아슬하게 생각나는 기억의 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기억이 떠올린 듯 환하게 웃었다.
‘우리 어릴 때 했던 전쟁놀이 말하는 거지? 그때 항상 골목대장이 이겼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이로…… 이로얀 오빠?’
‘맞아.’
‘정말? 이로얀 오빠가 대공가에 있었어? 진짜? 어떻게 만난 거야? 거기서 무슨 일 하는데?’
반가운 이름에 에일린은 쉬지 않고 물어봤다.
‘대공가에 고용됐어. 그렇게 뒷골목을 휩쓸고 다닐 때도 열심히 뛰어다니더니 그대로 컸어.’
‘그런데 왜 지금 말해 줘. 나도 갔을 때 보면 좋았잖아.’
‘나도 결혼식 날 처음 마주쳤어. 지나가다 마주쳤고 또…… 도움도 받았고. 그런데 진짜 몰라보겠더라.’
도움을 받았다는 말에서 에단의 표정이 잠깐 가라앉았다가 곧 신이 나서 그의 이야기를 해왔다. 에일린은 에단의 표정을 못 본 척 잠깐 시선을 돌렸다. 창밖의 푸르른 나무를 보는 에일린의 귀로 에단의 맑은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나보고 여전하다면서 너도 여전하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너도 여전하다고 했어. 여전히…… 말썽쟁이라고.’
‘오빠.’
에단의 웃음소리에 묻힌 에일린의 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일린은 비록 자신을 놀린대도 오빠의 웃음소리가 싫지 않았다. 오빠의 얼굴에 맺힌 웃음은 처음으로 보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건 오늘 아침이었다.
“오빠의 일은 막았지만 아직 의문이야. 그 사람이 어떻게 도와줬을까?”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만 알아도 앞뒤 상황을 맞춰볼 수 있을 거다. 에일린은 사람 한 명 찾을 시간이 있을지 가늠해봤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면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로얀을 찾기로 생각을 굳힌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여기에 놔두면 돼.”
“……알겠습니다.”
제인이 하얀 테이블에 찻잔 세트를 내려놓으면서도 오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앞의 대공비가 자연스럽게 찻잔을 드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하려다 이내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인이 물러나면서 말을 거는 사람이 없어지자 에일린은 더욱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였다.
“장소가 달라져서 그런지 더 맛있어진 느낌인데?”
뭔가 향이 그윽해지고 끝맛이 깔끔했다. 가끔 나와서 마시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다 좋았다.
“합!”
“머리 위로!”
“자세 흐트러진다!”
여유로운 에일린에 반해 상당히 절도 있고 우렁찬 기합이 울렸다.
“검 끝이 살아 있어야지! 다시 천 번!”
“끄으윽.”
에일린이 잔을 든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람에 모래가 섞였나?”
모래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아 내뱉는 중얼거림이었다. 에일린의 눈이 앞을 향했다. 두 단 정도의 높이를 두고 위에 있는 에일린은 의자에 앉아서도 앞에 있는 광경이 잘 보였다.
바로 연무장이었다.
“절대 쓰러지지 마라.”
“하지만…….”
연무장에는 수십 명의 기사가 단장의 지휘 아래 훈련을 받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자도 있었고 연무장을 도는 사람도 있었다.
에일린은 그 연무장이 잘 보이는 곳에 테이블을 옮기고 티타임을 하며 지켜봤다. 난데없이 나타난 대공비의 존재에 갑자기 훈련의 강도가 올라간 것도 모른 채.
잠시 쉬는 시간인 건지 기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그마저도 다음 훈련을 위해 숨 한 번이라도 더 마셔야 한다는 일념에 신경 써서 앉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단장이 무거운 시선을 들어 대공비를 바라보았다. 막 잔을 들었던 대공비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단장은 앓는 소리를 내다가 대공비에게 다가갔다.
“대공비 마마 계속 여기 있으십니까?”
“아, 혹시 무슨 문제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오늘은 유독 날이 더워서…….”
“그건 괜찮아요. 바람도 잘 불고 가만히 있어서 덥지 않아요. 난 신경 쓰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더 할 말이 없어진 단장이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포기하고 물러났다. 대공비가 되자마자 기사들의 실력을 감시하겠다는데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
에일린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구는 소리에 단장이 돌아봤다. 혹시 잊고 있던 일이라도 생각난 걸까?
“앞으로도 쭉 보려고 하는데 혹시 훈련이 없는 날이 있나요?”
“…….”
전혀 달갑지 않은 질문을 떠안은 채 단장이 자리로 돌아갔다. 묘하게 처진 것 같은 그의 어깨를 에일린은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단장이란 자리가 쉽진 않겠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에일린이 고개를 들어 마저 훈련을 지켜보았다.
“저기에 이로얀 오빠가 있나?”
아니면 다른 곳을 지켜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