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9)화 (19/120)

19화. 시간이 돌아와도 그 감정은 남는다

“에일린.”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일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행동이 매우 민첩해서 에일린은 그가 순식간에 다가왔다고 여겼다.

피할 틈 없이.

“이리 와.”

입술을 맞대기 좋은 각도로 로이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에일린이 뒤로 상체를 물렸지만 그가 따라왔다. 오히려 소파와 로이드 사이에 갇혀버렸다.

그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거부하기 어려웠다. 이제 완연히 술이 올라서인지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분명 아까 에단 오빠의 기억이 떠올라 그가 미웠는데 지금은 취해서 머릿속이 엉망으로 꼬여버렸다.

결혼식, 입맞춤, 첫날밤. ……아프고 슬펐던 기억.

“싫어.”

에일린의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로이드가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려고 살짝 고개를 뒤로 뺐을 때 에일린이 소파를 붙잡던 손을 들었다. 에일린이 괴로운 듯 그의 가슴을 쥐어 잡듯 긁어댔다.

점점 손끝에 힘이 실리며 에일린이 눈을 감고 무작정 앞의 남자를 밀어냈다. 에일린은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한 후 겪었던 첫날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싫었다. 제게 쏟아지는 페로몬이 거북했고 억지로 가져야 할 관계가 끔찍했다.

“하지 마. 싫어. 나는…… 나는 아직.”

“에일린.”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잡아채며 그녀의 격한 움직임을 통제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에일린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벗어나려 몸부림쳐댔다.

“하지 마. 싫어요. 싫어. 제발…….”

에일린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텅 비어 있었다.

“하아, 에일린.”

결국 로이드가 에일린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 손목을 잡을 때와 다르게 에일린의 거부가 한결 덜해졌지만 그렇다고 그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계약 결혼이라 하나, 술에 취해서 남편을 거부하는 아내라니.

로이드는 에일린이 얌전해질 때까지 품에 안은 채 놓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일린의 몸에서 힘이 빠짐과 동시에 잠든 걸 알았다. 로이드는 그녀를 안아 침대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눕히니 에일린이 잠결에 모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마치 자신을 작게 만들어 숨고 싶다는 듯 그렇게.

“그런다고 안 보이겠어?”

툴툴대는 것에 비해 에일린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런 술주정이 있을 줄 몰랐는데.”

로이드가 에일린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껏 제게 할 말 다 해온 듯 굴었는데 감춘 게 제법 있었다.

비장한 얼굴로 청혼할 땐 언제고 관계를 맺는 걸 무서워했다. 자기가 전쟁터로 떠날 줄 알았다니 안 할 수도 있겠단 생각했겠지.

“그럴 거면 아이를 말하지 말던가.”

능청스럽게 아이를 입에 담던 에일린의 뻔뻔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로이드는 깊게 잠든 에일린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거야 나중에 에일린이 일어나면 확인할 수 있으니 잠깐 접어뒀다.

“내가 시간이 없는데 어쩐다.”

에일린과 결혼하겠다고 결정한 순간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얽매어왔던 관습에서 벗어날 방법이 떠올랐다. 형질을 띄지 않는 아이를 낳아 원로원의 형질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끊어낼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대공가를 떠나기 전 에일린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그녀에게 의무를 강요하며 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만…….

“으음.”

에일린이 잠결에 어디가 불편한지 눈을 찡그렸다. 로이드가 에일린의 볼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살살 떼주었다. 그러자 에일린의 얼굴이 다시 편안하게 바뀌었다. 찡그린 표정보다 미소 짓는 얼굴이 더 잘 어울렸다.

“신경 써야 할 게 많네.”

로이드가 귀찮다는 듯 말했지만 표정은 성가시다기보다 걱정하는 쪽에 가까웠다.

억지로 맺는 관계는 끌리지 않았다. 이게 모두 에일린이 웅크리고 자서 그렇다.

***

언제 잠들었지?

에일린은 잠들기 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엔 어쩌다 잠들었냐며 기억을 되짚진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깼어?”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에일린은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가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아 있었다. 설마 여기 계속 앉아 있던 건 아니겠지? 에일린은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그의 질문에 대한 답만 했다.

“잠 깼어요.”

“아니, 술 깼냐고.”

“……네.”

에일린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술에 취했다고 느끼기 직전 로이드의 얼굴이 흐려지고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있어 전남편과의 첫날밤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던 모양인지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설마 그를 착각하고 도망친 걸까?’

차마 로이드에게 물어보기 난감한 주제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에일린은 가장 기본적인 말부터 꺼냈다.

“죄송해요.”

“사과하지 마.”

“하지만 제가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차라리 취한 게 나았어.”

로이드가 밤새우면서 뻑뻑해진 눈가를 가볍게 눌렀다.

“취했으니 솔직하게 반응했겠지.”

“그게 아니라…….”

에일린이 어떻게든 말을 고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갈 길이 멀다.”

로이드의 한숨과 함께 섞여나온 말에 에일린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어제 제 의외의 행동에 놀랐을 텐데 그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결혼했고 그 일을 잊지 못해 그랬다는 말을 어떻게 할까. 사과하지 말라니 죄송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에일린은 입을 다문 채 로이드의 눈치를 봤다.

“한 달.”

에일린은 갑자기 그가 시간을 말해오자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한 달 후에 떠나야 해. 출정식에 맞추려면 내가 여기 있을 시간은 그뿐이거든.”

“아…….”

그제야 그가 왜 한 달을 언급했는지 알겠다.

“적응하는 데 한 달이면 충분할 거야. 그리고 나는 떠나기 전에 당신을 안을 거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의문이 로이드의 말에 소리 없이 흩어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그의 유예 기간과 함께 딸려오는 목적이었다.

“한 달이요?”

“그래. 그 이상은 안 되니까 알아서 적응하도록 해.”

그게 말한다고 적응이 될까? 에일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음엔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것뿐이었다.

“그 전에…….”

로이드가 심드렁히 말을 꺼냈다. 실상 제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가 홀라당 까먹은 에일린을 어떻게 발라먹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로이드가 하나를 제시하고도 모자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노력해야지. 안 그러면 지금이나 한 달 뒤나 뭐가 다르겠어.”

에일린은 순간 제 생각이 읽힌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로이드의 행동이 더 빨랐다. 불쑥 손을 내밀어버리자 에일린이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잠깐만요.”

에일린이 뒤늦게 누웠던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늦었다.

그의 손이 제 손을 잡을지 아니면 볼을 매만질지 몰랐다. 실은 성적인 의미를 담으려면 다른 곳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우습게도 에일린은 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이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그를 두려워할 것이다. 결국 로이드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툭.

머리 위에 올라온 손은 뭔가 투박하면서도 다정한 듯 따뜻했다. 어떤 성적인 느낌도 없이 담백한, 제 오빠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올릴 때와 비슷했다.

“…….”

이렇게 닿아오겠다고 말하는 걸까? 몇 번 머리를 쓰다듬어오자 에일린은 피할 마음이 사라져 얌전히 있었다. 오메가로 발현하고 겪었던 기억 때문에 성적인 접촉에 다소 부담을 느끼는 데 반해 이런 접촉은 솔직히…… 좋았다.

“이건 또 거부하지 않네.”

로이드가 에일린의 머리카락을 한 줌 쥐어 살살 쓸어내렸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괜찮냐는 물음에 에일린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그때를 다시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아침부터 괜히 가슴이 울렁거려서 에일린이 로이드를 보려고 눈만 위로 떴다.

“저 이제 일어날게요.”

그만 손 떼달라는 의미에 로이드가 순순히 놓아줬다. 에일린이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옆으로 자리를 옮긴 로이드가 시계를 보았다.

“오늘부터 대공비에 대한 수업이 시작될 거야. 힘들면 내 집무실로 와.”

“열심히 할게요.”

에일린은 그에게 갈 마음이 없었다. 힘들다고 가서 징징거리지도 않을 거고 어떻게든 수업에 따라가려 노력하겠지. 하루라도 빨리 대공비에 적응해야 하니 그랬다. 그래도 로이드의 말이 고마워서 에일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에일린의 대답으로 그녀의 생각을 읽은 로이드가 잠시 생각하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아니면 내가 갈까?”

어디 놀러 갈 계획이라도 세우는 듯 그의 목소리가 산뜻하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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