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남편이 안 간다?
식이 끝나고 에일린은 로이드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몇 시간을 서 있었는지 기억나질 않았지만 정말 기운이란 기운은 다 끌어쓰고 난 후에야 모든 행사가 끝났다. 피로연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 방에 돌아온 에일린은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두 번째인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그때와 규모가 달라서인지 아니면 피로연에서도 인사하던 사람들의 수가 몇 배로 불어나서 그런 건지 새벽이 되어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쨌든 결혼식이 끝났으니 큰 산은 넘긴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대공이 전쟁터로 가면 에일린은 대공비로 일 년을 버텨내야 했다. 잘하지 못해도 이제 막 결혼한 대공비를 내쫓진 않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적어도 오늘 하루 무사히 넘어간 것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에일린이 힐끗 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제 옆에 있어 줬던 건 물론이고 다리에 힘이 풀렸을 땐 자신에게 기대라며 팔을 내주었다. 덕분에 잘 버텼다.
이제 그가 전쟁터로 가고 나면 나 혼자 버텨야겠지.
‘대공비 수업을 받고 중간중간 연구일지를 써놓으려면 진짜 바쁘게 살겠네.’
대공비로 사는 삶도 바쁘겠지만 에일린은 제 미래를 위한 준비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가문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이제 괜찮아졌어?”
“네?”
에일린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막 잔을 꺼내든 로이드가 돌아봤다.
“몸 괜찮냐고. 아까 몇 번이나 휘청거렸잖아?”
“아, 괜찮아요.”
에일린이 머쓱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로이드가 와인과 와인 잔을 들고 왔다. 맞은편에 앉는 그의 차림도 에일린과 다를 바 없는 장착 상태였다.
피로연을 위해 입은 남색의 연회복이 그의 몸을 딱 맞게 감싸고 있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가 답답한지 단추를 풀어내더니 소파에 한쪽 팔을 걸쳤다. 그다음부터 두 손은 필요 없다는 듯 한 손으로 와인의 마개를 뽑더니 병을 기울였다.
한 방울도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 걸 보고 있던 에일린은 신기하단 생각뿐이었다. 그가 제 앞으로 와인 잔을 밀어줄 때까지도 가만히 보고 있던 에일린은 뒤늦게 하나의 사실을 떠올렸다.
“왜 그렇게 보지?”
에일린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 로이드가 물었다.
“뭐 잊은 거 없어요?”
에일린이 정말 이상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내가 잊은 거라…….”
로이드가 테이블 위를 훑었다. 평소에 잔도 없이 병으로 마시다가 그래도 에일린이 있어 잔을 가져왔는데 뭐가 부족했나?
“과일이라도 가져오라고 할까?”
“그게 아니고요.”
에일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왜 전쟁터에 안 가냐고.’
분명 결혼식이 끝나고 늦은 시간 그가 나갈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일린은 그와 한방에 들어올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스치듯 보았던 침대를 본 감상도 혼자서 자기엔 크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로이드가 와인을 가져올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왜 안 가는 거지?
에일린이 막 문과 로이드를 번갈아 봤다. 그가 정확히 어느 시간에 떠난 건지 모르지만 지금 저렇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면 안 되었다.
에일린은 잠시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로이드 역시 에일린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 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감돌았다. 오랜 눈 맞춤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빨리 들어가서 자자고? 그럼 그렇다고 말하지 그랬어.”
로이드가 당장 자자는 의미로 잔을 내려놓고 있으니 에일린이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어떻게 둘러댈 말이 없을까 싶었지만 막상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에일린은 제 몸 위를 덮는 그의 그림자만으로도 부담스러운 듯 몸을 옹송그렸다. 결국 원하는 대답을 얻으려면 직설적으로 묻는 게 가장 좋았다.
“국경으로 가셔야 하지 않아요?”
“국경?”
“시하르 왕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영지요.”
로이드가 와인 잔을 매만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뭔가 오묘한 듯 그의 시선이 에일린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내려 갔다. 앞의 여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다가 어떤 말을 할지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에일린의 인내심이 짧아져 갔다.
‘무슨 말을 하려고.’
마침내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원래도 무거운 시선에 날카로움이 섞여들자 에일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한테 관심이 많을 줄 몰랐네.”
“어디서 들었어요. 따로 알아본 게 아니었다고요.”
실제로 에일린은 우연한 기회로 들었다. 모두가 대공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더욱이 결혼한 날 떠났다는데 다들 한 번씩 언급할만하지.
“그럼 다 듣진 못했나 봐. 정식 출정은 한 달 뒤야.”
“그런…… 거 지키는 분이셨어요?”
원래 안 지키는 사람인 거 아는데. 에일린은 설마 대공이 며칠 더 머무르진 않겠지? 불안에 차서 생각했다.
“굳이 출정식 전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에일린이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출정식과 상관없이 떠났던 걸 아는데 왜 이번엔 가지 않은 걸까.
“솔직하게 말할게요. 오늘 결혼식이 끝나면 갈 줄 알았어요.”
그녀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로이드가 다시 와인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만약 당신이 오메가였다면 오늘 갔겠지.”
로이드의 가정이 섞인 대답에 에일린이 막 와인 잔을 들었다가 떨어뜨릴 뻔했다.
“……왜요?”
오메가라면 간다고? 그래서 오빠랑 결혼했을 때 그렇게 빨리 갔던 거야? 대체 왜?
에일린은 점점 짧아지는 양초처럼 인내심이 줄어들어 갔다. 하지만 로이드는 답답하리만치 대답이 느렸다.
“그보다 우리 후계나 생각해.”
로이드가 쉽게 말을 돌렸다.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후계라고 하니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굴고 싶지만 그게 잘되지 않았다. 그러다 곧 의구심이 들었다.
베타에게 나올 후계의 형질은 베타일 확률이 99%인데?
“혹시나 제가 낳은 아이가 베타라면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나요?”
“어떤 문제를 말하는 거야?”
“저와 이혼하고 새로 맞는 아내에게서 알파가 나올 때요. 첫째 아이가 베타가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껏 로이드는 형질이 상관없는지 후계를 낳을 것만 생각했다.
에일린의 물음에 로이드가 처음으로 여유롭던 표정에 실금을 그었다. 이마가 살짝 찌푸려지던 그는 곧 태연히 내뱉었다.
“이제 그 형질에 그만 집착하고 싶어서?”
로이드가 와인 잔을 들어 에일린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유리의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에일린은 어떻다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
로이드는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베타가 나온대도 상관없다는 뜻은 알아들었다.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어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청혼할 때부터 에일린은 이렇게 흘러갈 건 생각지 못했다. 첫날밤을 치르는 날 그가 전쟁터에 간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일 년 동안 대공비로 있다가 이혼한다는 것만 짜두었는데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아이를 임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복잡한 심경이었다.
에일린이 와인 잔을 매만졌다. 이러나저러나 로이드가 오늘 여기서 잔다는 건 확실했다.
‘혼자 잘 줄 알았는데.’
첫날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에일린이 갑갑한 마음에 제 잔을 보았다. 오늘은 맨정신으로 잠들 수 없었다. 에일린이 와인 병을 가져와 제 잔을 가득 채웠다. 급히 병을 기울인 탓에 옆으로 흐르긴 했지만 얼마 흘리지도 않았다는 생각에 에일린이 더욱 병 입구가 아래로 향하게 기울였다.
로이드가 중간중간 마셔댄 탓에 와인을 다 따랐는데도 잔이 가득 차지 않았다. 병을 옆에 소리 나게 내려놓은 에일린이 잔을 들어 그대로 마셨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잔이 급격하게 꺾이며 와인이 쏟아져 들어왔다. 단숨에 마셔버린 탓에 속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그렇게 마시면 취해. 설마 벌써 취한 건 아니지?”
에일린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로이드를 노려보았다.
“저 안 취했어요. 그리고 전 오늘 국경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안 가면 안 간다고 말해 주시지. 저는 오늘 혼자 자는 줄 알았어요.”
“내가 지금, 혼나고 있는 건가?”
다소 억울한 듯 로이드가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오늘 안 가도 되냐고 허락받았어야 하나?”
“미리 말해 주면 좋죠.”
에일린이 냉큼 받아먹자 로이드가 정말 취한 게 아니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에일린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더니 대놓고 코웃음 쳤다.
“이러다 키스하는 것도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겠어.”
“해 주시면 감사하고요.”
“하. 어디까지 허락받으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 주시면 좋겠네요.”
에일린은 뜨거운 속을 식히려고 애먼 소파를 꼭 쥐었다. 이제 로이드가 전쟁터로 떠나든지 말든지 자고 싶었다. 정식 출정이 한 달 뒤라는 걸 알았는데 더 할 말도 없었다.
“좋아. 당신에게 맞춰주지.”
조금씩 술이 올라오는 듯 앞이 흐려지고 살짝 어지럼증이 돌았다. 그런 와중에 나온 로이드의 말을 해석하려 에일린이 눈을 들었다. 로이드와 눈이 마주칠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해 내려가 있으니 에일린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지금 키스하고 싶은데.”
“……생각해 보고요.”
에일린은 받아들일 마음이 없지만 대놓고 거절할 수 없으니 돌려서 표현했다. 하지만 로이드가 키스를 언급한 후로 에일린은 그 단어를 완전히 외면하지 못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자꾸 그의 입술이 보였다. 다른 곳을 보는데도 시야에 그의 입술이 걸렸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