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진짜 시작
“에일린!”
“에단 오빠.”
귀에 익은 목소리에 에일린이 바로 반응했다. 지금껏 얌전히 앉아 있던 에일린이 벌떡 일어나자 제인이 부산스레 움직였다.
“내가 중간에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조금 늦었어.”
“괜찮아. 부모님은?”
에일린이 에단의 팔을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단만큼이나 부모님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에일린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듯 클라우디아 백작 내외가 들어왔다. 부모님들의 얼굴을 본 에일린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눈물이 맺혔다.
에일린이 먼저 부모님에게 다가갔다. 백작 부인의 품에 안긴 에일린은 익숙한 냄새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백작 부인이 에일린의 면사포를 살살 쓸어내렸다.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제가 결혼한다고 나간 건데 뭐가 미안해요.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냐고 혼내셔야죠.”
에일린이 살짝 투정을 섞어 말했다. 아무리 바빠서 자신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어도 부모님은 부모님이었다. 늘 애정을 주고 사랑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부모님. 에단과 에일린이 무탈히 자란 것도 다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니.”
클라우디아 백작이 에일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대공님에게 이야기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결혼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하더구나.”
“……대공님께서요?”
대공이라는 말에 추스르기 힘들었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나마 눈물로 화장이 지워질 걱정은 없어 다행이었다.
“그래. 그날 따로 만나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에일린은 부모님이 대공가에 와서 식사하던 날을 떠올렸다. 식사가 끝나고 대공이 따로 자리를 마련했는데 이런 대화를 나눴을 줄 몰랐다.
그냥 세상이 다 제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신이 해야 하면 남들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대신 네가 부족하지 않게 신경 쓴다고 했으니 난 그분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버지.”
에일린이 제 어깨를 짚은 백작의 손을 잡았다.
‘그 대공님 전쟁터 가서 저 신경 못 써요.’
하고 싶은 말은 삼키며 에일린은 손의 온기에 눈을 감았다.
“이제 나가셔야 해요.”
바깥의 동태를 살피던 제인이 다가와 속삭였다. 에일린이 떨어지기 싫은 듯 백작 부인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뒤로 걸음을 물렸다.
“다녀오렴.”
백작 부인이 에일린의 얼굴 위로 면사포를 내리며 말했다. 에일린은 불투명한 면사 너머로 보이는 인자한 미소에 입술을 꼭 다물었다. 오늘이 지나면 대공비가 되는데도 백작 부인은 언제든 집에 오라는 듯 말했다. 그 인사에 에일린은 목이 메어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장을 향해 걸어가던 에일린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있던 자리에 부모님과 에단이 있었다. 어서 식장에 들어가면 좋으련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가족을 보며 에일린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가족이 있는데, 그 가족을 지키겠다고 결혼하는데 마음이 아팠다. 조금만 더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좋을 텐데. 조금만 더 이전으로 회귀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다 식 다 끝나겠어.”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에일린의 고개가 돌아갔다. 언제 와 있었는지 로이드가 에일린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었다.
“빨리 갈게요.”
에일린이 속도를 올려보지만 치마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 불안한 걸음을 봤는지 로이드가 혀를 찼다.
“넘어지면 볼만하겠네.”
“잘 걸어가면 돼요.”
에일린은 어쩜 이렇게 끝까지 남의 기분을 헤아려주지 못할까 싶었다. 그런데 로이드가 몸을 살짝 틀더니 에일린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잡아.”
로이드의 짧은 지시에 에일린이 그의 손을 보았다. 면사포 때문에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보였다.
“넘어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에일린이 주변을 돌아봤다. 언제부턴지 수많은 사람이 신랑, 신부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에일린은 왜 로이드가 손을 내밀었는지 이유를 짐작했다.
내가 넘어지면 이 사람도 창피하겠구나.
에일린이 순순히 손을 내밀자 로이드의 손이 닿는 듯하더니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 들어왔다. 포개듯이 잡는 게 아니라 깍지를 낄 줄 몰랐기에 당황스러웠다.
“여길 들어가면 되돌아갈 수 없을 거야.”
로이드가 에일린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일린이 슬쩍 로이드의 옆얼굴을 보았다. 제왕의 분위기가 흐르는 그의 얼굴엔 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실행했고 지켜나갔다. 세상에 못 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굴었고 모든 게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그래서일까? 되돌아갈 수 없다는 그 말이 지금이라도 원하지 않으면 도망가라는 게 아니라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란 말처럼 들려왔다.
그가 결정했으니 자신에겐 아무 기회가 없다는 듯이.
“꼼짝없이 내게 잡힌 거라고.”
그의 나른한 음성엔 에일린을 향한 은근한 경고가 스며들어있었다. 굳이 저 말을 여기서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안 그래도 심란했던 에일린은 괜한 오기가 솟았다. 그가 자신을 선택한 것처럼 여기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의 결혼 상대를 바꾼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에단 오빠와의 결혼을 막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도 제 의지였고 일 년 후의 자유까지 얻어낸 것도 에일린의 능력이었다. 로이드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에일린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을 보고 흔들렸던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 정도는 각오했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 책임도 자신이 질 것이다.
에일린의 다부진 대답에 로이드가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믿음직하네.”
“감사해요.”
“앞을 봐.”
에일린의 마음을 확인한 로이드가 앞을 가리켰다.
둘 앞으로 식장의 문이 열렸다.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 사이로 웨딩로드가 존재했다. 에일린은 로이드의 팔짱을 낀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에일린의 눈동자가 비장한 감정을 띠었다.
***
“서로의 곁에 영원히 남을 것을 이 자리에서 서약합니다.”
성혼선언문을 읽는 주례자 앞에서 에일린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면사포로 앞을 가리고 있다지만 하객의 웅성거림까지 막아주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에일린은 로이드와 맞잡은 손에 온 신경이 쏠려서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웨딩로드를 걷기 전부터 잡은 손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놔주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맞잡은 손인데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오래 붙잡고 있었다. 지금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성혼선언문을 읽는 내내 에일린은 손만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서 주십시오. 예물 교환이 있겠습니다.”
주례의 말에 에일린은 로이드의 손을 놓았다. 이제야 떨어지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로이드가 먼저 반지를 끼워주어야 하므로 에일린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보더니 천천히 그의 손을 뻗어왔다.
답답하리만치 느린 속도에 에일린이 왜 그런가 그를 올려다보는 사이 로이드의 손이 중간에 방향을 틀었다. 그는 이제껏 에일린의 얼굴을 가리던 면사포를 걷었다.
“이제야 잘 보이네.”
놀란 에일린의 표정을 보는 로이드가 속 시원하다는 듯 굴었다.
“내내 당신의 표정이 궁금했어.”
죽도록 후회하는지 아니면 기대하고 있는지 말이야. 뒷말은 주례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엄청 설레하진 않는데…… 나쁘진 않네.”
로이드가 갑자기 면사포를 걷어버리는 바람에 에일린은 놀란 감정 그대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재밌었는지 로이드가 작게 웃었다.
“…….”
에일린도 로이드의 표정이 아주 잘 보였다. 생각해 보니 오늘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주인공이니 가장 바쁜 건 알고 있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을 거고.
그렇다 해도 이제야 처음 본다니…….
그것 때문이었다. 에일린이 로이드를 보고 넋이 나간 이유는 정말 그것 때문이었다. 한껏 꾸민 그의 얼굴을 미리 보지 못해서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없었던 거다. 머리를 전부 넘겨 그의 얼굴을 가리는 게 없어지니 그만큼 볼 것도 많았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니 짙게 뻗은 눈썹 하나 틀어지지 않은 균형적인 배치가 자연스러웠다. 유려하게 뻗은 눈매 아래 이젠 익숙해진 줄 알았던 흑요석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였다.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높고 수려하게 뻗은 코와 굳게 다물린 입술까지 이목구비의 조화가 뛰어났다.
에일린이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반지의 감촉에 고개를 숙였다. 반지가 아니었다면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지 몰랐다.
에일린이 숨을 고르며 이어서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로이드 리하스트 대공의 아름다운 외모는 언제나 인정하는 바였다. 외모를 인정하면서 오늘 하나 더 추가했다. 그의 손이 제법 따뜻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