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접근 금지
들어온 사람은 가족이 아니었다. 에일린은 살짝 실망했다가 바로 표정을 다잡고 남자를 보았다. 40대 정도로 보이는데 원로원에 들어간 자만이 할 수 있다는 녹색 줄을 차고 있었다.
원로원 일원 중 유난히 젊은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칼릭스입니다. 칼릭스 리하스트.”
“아!”
이름을 듣자마자 상대방이 누군지 떠올랐다. 대공의 숙부였다. 대공가 사람들의 이름을 외워뒀던 에일린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앉아계시죠. 오늘만큼은 당신이 주인공 아닙니까.”
대공가의 가신으로는 처음 찾아온 사람이었다. 자신을 반기지 않을 걸 알기에 이렇게 온 게 너무 놀라서 에일린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제가 찾아온 것이 놀란 모양이었나 보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처음이세요. 대공가의 누군가가 절 만나러 온 거요.”
“하하.”
칼릭스가 재밌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마마. 어디까지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칼릭스가 잠시 말을 끊었다. 하필 가장 궁금한 부분에서 끊으니 에일린이 저도 모르게 그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그런 에일린의 반응이 재밌는지 칼릭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찾아오고 싶어도 못 오게 누가 으름장을 놔서 말입니다.”
“설마 대공님께서요?”
“그렇습니다.”
에일린은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이 찾아가서 괴롭히지 말라던가?”
에일린이 흠칫 놀라다가 이내 이유가 짐작이 된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동안 몇 번 대공과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었다. 아마 자신의 발목이 잡힐 수 있는 어떠한 일이 생길까 봐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겠지.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날까 봐 그러셨나 봐요.”
에일린이 가볍게 운을 띄우듯 말하지만, 표정마저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것을 본 칼릭스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복잡한 심정이었다. 대공은 순전히 에일린을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그물에 걸리지 않은 위험이 에일린을 노릴까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어떻게 할까. 더욱이 그 칼을 들이민 게 원로원이라고 말할 수 없지.
“마마가 못 미더운 게 아닙니다. 그저 이해관계가 얽힌 자들 사이의 문제이지요.”
그 안에는 대공을 위해 원로원에 들어가 칼릭스도 있었다.
“제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네요. 죄송해요.”
칼릭스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다행히 에일린이 눈치껏 분위기를 바꿨다.
“앞으로 자주 보면 좋겠습니다.”
“이제 한집에서 사는걸요. 오늘처럼 찾아와 주세요.”
에일린의 살가운 인사에 칼릭스는 복잡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건 원로원으로서일지 아니면 대공의 숙부라서 그런지 그만이 알 것이다.
칼릭스가 묻는 말에 성의껏 대답하던 에일린은 제인이 나가고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알았다.
가족은 아직인가?
***
“누가 이렇게 급하게 결혼식을 해.”
공부하고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클로에 리하스트가 불만을 내뱉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자란 그녀는 로이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가진 여성이었다. 지금도 삐진 듯 입술을 내밀고 있으니 특유의 귀여운 이미지가 돋보였다.
“내가 오빠 결혼식을 라비아에게 들었어. 그게 말이 돼?”
클로에는 보통 연구실에 박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집안 행사를 다른 이에게 들은 것이다.
아침에 찾아온 러츠 경이 클로에를 데리고 곧바로 의상실로 향했으나 클로에는 새언니 얼굴도 못 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치장한 클로에는 계속 자리에 앉아 있느라 고생한 탓인지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리고 러츠 경에게 제 황당한 기분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대공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돼?”
클로에의 물음에 러츠 경이 대답했다.
“대공 이전에 로이드 리하스트입니다.”
“맞다. 그랬지.”
어릴 때부터 제 잘난 맛에 살고 제멋대로 굴었던 인간. 자신의 오빠만 아니었으면 평생 안 보고 살았으면 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클로에는 죽을 때까지 로이드의 동생이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인간하고 결혼할 새언니가 불쌍하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내가 와서 말렸을 텐데.”
얼굴도 보기 전인데 클로에는 바로 에일린이 불쌍하다고 말해왔다. 어쨌든 이미 결혼식까지 치르게 되었으니 물릴 수도 없다.
“잠깐만.”
에일린 클라우디아라니 언제 만난 적이 있나 없나…… 라며 고민하던 클로에가 우뚝 멈췄다. 러츠가 갑자기 멈춘 클로에를 이상하다는 듯 내려보았다.
“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클로에는 러츠 경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대신 러츠 경을 올려다보았다.
“오빠랑 결혼할 상대가 따로 있었잖아. 이름이 에단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분의 동생이라고 하더군요.”
“오메가래?”
“베타랍니다.”
“베타?”
클로에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우성 알파의 상대로 베타라니 그게 가능해?”
클로에는 진심으로 말도 안 된다는 듯 굴었다. 그래서 러츠 경이 받아쳤다.
“영애께선 베타이면서 베타를 무시하십니까?”
“내가 언제 무시한대? 원로원에서 난리가 났을 텐데? 그냥 오메가여도 싫다고 할 마당에 무슨 베타야.”
그게 어디 베타 따위가 내 새언니가 될 수 있어!의 반응이냐면 그렇지 않았다.
“장난아니게 물어뜯길 텐데…….”
클로에가 얼굴도 모르는 새언니를 동정했다. 당장 대공가에서 귀하게 자라왔다 해도 2차 성으로 은근한 차별을 당해왔던 클로에였다. 그런데 새언니가 자기와 같은 걸 겪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동정심이 일었다.
“만나면 잘해 줘야겠네.”
“그러면 좋죠.”
고위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아가씨답지 않은 심성에 러츠 경이 클로에를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이제 가야 한다고 말하려던 러츠 경이 뒤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클로에가 석상이 된 듯 움직이던 걸 멈추더니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로이드가 팔짱을 낀 채 무감한 눈으로 클로에를 보고 있었다. 지금도 오랜만에 보는 동생을 보고도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알고 있었지만 참 정 없는 오빠였다.
“결혼한다고 왜 말 안 했어.”
클로에는 인사 대신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서운한 것부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로이드가 툭 내뱉었다.
“나 결혼해.”
“……빨리도 말해 주네.”
클로에가 황당하다는 굴면서도 더 뭐라 하진 않았다. 툴툴거리긴 해도 제 오빠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그랬다. 대신 클로에는 방금 러츠 경에게 들은 정보를 말했다.
“새언니 베타라며.”
“그래.”
로이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대공가가 뒤집어졌으니 감출 것도 없었다.
“어떻게 베타를 신부로 맞을 생각을 했는지. 어쨌든 나 곧 학기 끝나서 집에 올 거야. 새언니는 뭐, 시간 나면 가끔 가서 봐줄게.”
클로에가 슬쩍 흘리듯 말했다. 새언니가 대공가에 적응하기 힘들 게 분명하니 도와주겠다는 거지만 대놓고 말하기 쑥스러워했다. 그러나 클로에는 나름 생각해서 말한 걸 로이드가 매정하게 잘라냈다.
“집에 와서도 어디 돌아다닐 생각 말고 연구에나 집중해. 간다.”
그사이 로이드는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뒤도 안 돌아보는 로이드는 평범한 오빠와 다를 바 없었다.
“진짜 뭐야.”
클로에가 황당하다는 듯 제 오빠가 사라진 복도를 보았다. 원래도 무슨 말만 하면 고깝다는 듯 굴었는데 오늘은 뭐 반쯤 무시다.
“저런 오빠 정말 싫다. 모든 오빠가 저래?”
클로에가 늘 겪었지만, 오늘따라 유난스럽지 않냐고 러츠 경에게 물으려고 할 때였다.
“저…….”
남자 치고 가는 미성에 클로에가 뒤를 돌아봤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했다. 반짝이는 금발에 호수같이 깊고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다 벌어지는 그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천사?”
클로에의 혼잣말을 들은 남자가 귀여운 듯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가 곧 난처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클로에에게 물었다.
“중간에 길을 잃은 거 같은데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뭐든 들어드릴게요.”
클로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남자가 이대로 밖으로 나가자고 하면 오빠의 결혼식이고 뭐고 나갈 수도 있었다.
“다행입니다.”
남자가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는 것까지 눈을 뗄 수 없던 클로에가 옆에 있는 러츠 경을 건드렸다.
“어서 도와드려.”
제 오빠와 대등할 미인의 등장이니 러츠 경이 선뜻 나설 거라 여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러츠 경이 남자의 얼굴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러츠 경?”
설마 반하기라도 했나 싶어 클로에가 그의 팔을 톡 건드렸다. 에단 역시 그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반응이 없으니 에단이 한 걸음 물러났다.
“제가 불편하게 해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에단이 겸연쩍은 듯 굴고 있으니 클로에가 아니라고 손을 저으려고 할 참이었다.
“에단 공자.”
갑자기 대공가의 기사들이 나타나더니 에단을 둘러쌌다. 그중 로이드의 지시만 받는 기사가 에단에게 말했다.
“이쪽입니다. 클라우디아 백작님께서 에단 공자를 찾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단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클로에와 러츠 경에게도 실례했다는 듯 눈인사를 건넸다. 막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클로에가 에단이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에단 클라우디아?”
그리고 클로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저 사람이 에단이란 말이야?”
제 오빠와 결혼할 뻔했던 그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