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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5)화 (15/120)

15화. 거침없는 선택의 이유

에일린이 바로 제 심경을 대변하는 말을 꺼냈다.

“전하, 살려주세요.”

“……큭.”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로이드가 웃는 와중에도 에일린의 울상은 풀어질 줄 몰랐다. 그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한참을 웃던 로이드가 웃음기가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살려줄까?”

“3초마다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로이드가 앞에 놓인 책자를 보았다. 하리움 상단의 재탄 상인이 에일린 보라고 슬쩍 올려둔 샘플북이었다. 대충 보기에도 선택해야 할 게 많았다. 에일린이 왜 난감해하는지 파악한 로이드가 물었다.

“이런 적이 없었어?”

“이렇게 많은 선택을 해 본 적은 없어요.”

클라우디아가에서도 상인을 들이긴 하지만 가져온 한두 개에서 선택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클라우디아가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라 상인도 알아서 덜어왔다. 따로 와달라고 연락을 보내야 하는 상인도 있었다.

약을 사고파는 케이지 상인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에일린이 약을 팔겠다고 말하자 언제 온다고 날을 정해 주었었다. 그들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귀족가가 있으니 가능한 행동이었다.

에일린이 어색하게 보고 있으니 로이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지레 자기 탓인가 싶어 에일린이 보자 로이드는 앞에 있는 찻잔을 가리켰다. 우선 마시라는 의미에 에일린이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는 걸 확인한 로이드가 앞의 물건들을 훑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당연하게 일어날 거야.”

에일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비가 된다는 건 이전과 같은 삶을 사는 게 아닐 테니까.

“날 잘 봐둬. 그리고 다음엔 그대로 따라 해도 되고 다른 생각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행해도 돼.”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로이드에게 집중하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시선을 로이드가 여유롭게 받아들였다. 제인이 다시 상인을 들이자 로이드는 테이블에 올려둔 책자를 가리켰다.

“이걸 가져온 자가 누구지?”

“저입니다. 하리움 상단의 재탄입니다.”

“설명해봐.”

“어떤 커튼이 좋을지 여쭤보는 중이었습니다. 여길 보시면 레이스가 달린 커튼의 경우엔 가벼워서 바람도 잘 통하지만, 햇빛을 막아주진 못하지요. 그래도 방 안에 그림자가 지는 모양이 정말 예쁘…….”

“햇빛도 막아주는 레이스로 준비해오도록.”

“네? 하지만…….”

상인이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제 곧 해가 일찍 뜰 텐데 내가 억지로 잠이 깨야 하나? 잠이 부족하면 능률이 부족해질 텐데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지?”

“햇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레이스는 꼭 달아오도록.”

“……예.”

상인이 아까의 흥분했던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잔뜩 어깨를 좁히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렇게 레이스를 강조하더니 제게 책임을 묻겠다고 한 순간부터 예쁜 기능성 레이스를 만들어오게 생겼다.

“다음.”

로이드의 단호한 부름에 아까 신나서 떠들어대던 상인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쓸데없는 시간이 흐르는군.”

로이드의 나직한 말에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보고 있자니 에일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협박이구나.’

저런 방법이 있구나, 쉬우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런 협박을 가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나보고 유리로 된 찻잔을 쓰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 이 찻잔이야말로 이번에 나온 신상품입니다. 아주 정교한 작업을 거쳐 나온 것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하나뿐인 찻잔입니다.”

“깨졌을 때 실수로 손가락이라도 베인다면 책임질 건가.”

“튼튼한 것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정교한 작업을 거친 것으로 가져오도록 해. 더불어 흔한 건 별로야.”

저렇게 물건을 도로 돌려보내면서 부담까지 꽉꽉 눌러주다니 사람이 참 심술궂었다.

그다음은 장신구를 가져왔던 필리스였다. 그가 막 제 작품들이라며 하나씩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로이드가 손을 내밀어 그가 말할 것을 막았다. 옆에서 다시 처음부터 들어야 하는 줄 알았던 에일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나.”

“네?”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만 가져와. 그럼 모두 사지.”

“예.”

더 설명할 것도 말할 것도 없었다. 필리스 상인은 주섬주섬 보석상자를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서 뭐 하나 결론이 나지 않고 가는 게 조금 안타까웠다.

에일린은 상인들을 향해 미안한 눈빛을 띠었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고 있자니 제인이 말을 걸어왔다.

“마마, 다시 기분이 좋아지셨네요.”

“음? 내가?”

“네. 웃고 계셔서…….”

제인이 에일린의 입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말에 에일린 역시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설마…….

***

대공가에서 벌어지는 성대한 결혼식은 많은 이를 끌어당겼다. 에일린은 창문을 통해 끝없이 들어오는 마차 행렬을 보며 연신 고이는 침을 삼켜댔다. 저들의 앞에 서야 한다니 심장이 크게 뛰었다.

모두 리하스트 대공을 보러왔지만 자신에 대한 호기심도 클 것이다. 에일린이 눈을 내려 제 웨딩드레스를 보았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만들었지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이 모습을 보면 전부 놀라겠지. 얼굴은 평범한데 드레스가 정말 화려하다고 말이다. 오늘 이후로 자신에 대해 얼마나 떠들지 생각해 봐야 속만 쓰려왔다.

‘하나라도 화려하면 됐지.’

에일린이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오빠도 이런 생각 했을까?’

에일린은 자기가 궁금해하고도 금방 고개 저었다. 그날 오빠는 웨딩 정장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예뻤다.

‘아니야.’

에일린이 괜히 비교하지 않으려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 자리까지 잘 지켰으니 된 거다. 그들이 제 말을 얼마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게 제일이었다.

“마마, 어디 불편하신가요?”

신부대기실로 찾아온 제인이 곧장 에일린의 치마를 정리했다.

“괜찮아.”

“지금 많이 떨리시죠? 평생 한 번밖에 없는 특별한 날이잖아요.”

제인은 다 이해한다는 듯 에일린을 다독여줬다. 하지만 에일린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지만, 이미 결혼한 경험이 있었다.

“난 정말 괜찮은데?”

에일린이 작게 항의해 보지만 제인이 믿어주질 않았다. 제인이 부케가 눌렸는지 살피고 에일린의 면사포도 빠진 부분이 없는지 꼼꼼하게 봤다.

“그동안 결혼 준비하신다고 바쁘셨는데 이젠 다 끝났네요.”

제인의 다정한 음성에 에일린이 부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결혼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수십 번의 선택을 해야 했고 직접 결과물을 보고 괜찮은지 봐야 했다. 그리고 틈틈이 드레스를 가봉하고 어울리는 보석을 대보고…….

“그건 정말 실감 나네.”

신부라는 것보다 결혼 준비가 끝났다는 게 더 와닿기 시작했다. 이제 방을 꾸민다고 물건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방은 다 꾸며졌고 이제 드레스 가봉으로 인형처럼 서 있을 일도 없었다.

“수고했어.”

에일린이 줄곧 제 옆에서 도와줬던 제인을 보았다.

“별말씀을요.”

“정말이야. 나는…….”

에일린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제 모든 걸 말하진 못하더라도 제인에게 고마운 마음만큼은 전하고 싶었다.

“다들 날 반기지 않는 걸 아니까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잘해 주니까 정말 고마워.”

“어머, 대공비 마마.”

제인이 놀란 듯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에일린의 진심을 몰랐던 듯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다가 곧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감히 제가 마마께 잘해 주다니요.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 할 일에 상냥하게 말해 주고 응원해 주라는 건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제인. 부탁 하나만 할게. 내가 여길 떠나기 전까지만 외롭지 않게 대화 상대가 되어줘.”

“마마.”

제인이 놀라서 말끝을 올렸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가 빠르게 깜박이는 게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아마 에일린은 대공이 떠나자마자 더욱 고립될 것이다. 대공비로의 역할이야 하겠지만 베타에 아이를 갖지 못할 자신의 처지는 뻔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전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인 걸 알고도 대공에게 청혼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제인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종종 있었으면 했다.

에일린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부는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 알 것 같은지 제인이 잠시 머뭇거렸다. 연신 에일린을 힐끔대는 제인이 제 입술을 깨물며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투였다.

“마마, 마마께서 모르시는 게 있는데요. 저 말고도 마마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답니다.”

“그래?”

에일린은 되묻는 듯 대답했지만, 딱히 제인의 말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당장 지금도 신부대기실을 찾아오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에일린이 저도 모르게 넓은 대기실을 훑었다. 열 명이 들어와도 넉넉할 공간에 혼자 있으려니 다시금 외로움이 몰려왔다. 에일린이 제인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에단 오빠는, 우리 부모님은 아직 안 왔어? 왔는지 확인해 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제인이 공손히 인사하고 나갔다. 에일린의 부탁을 빨리 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다시 혼자 남은 에일린은 움직일 수 없으니 제 부케를 매만졌다. 살굿빛의 줄리엣 로즈 주위를 연보라색의 클레마티스가 감싸듯 자리했다. 그리고 간간이 흰색의 튤립이 섞인 부케는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지녔다.

“네가 제일 예쁘네.”

에일린이 부케를 눈높이까지 들어 말을 걸었다. 화려한 웨딩드레스에 파묻힌 자신보단 이 꽃의 매력을 한껏 살린 부케가 더 아름다웠다.

똑똑.

“들어오세요.”

가족이 왔구나, 싶은 에일린이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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