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결혼 준비
‘로이드 오빠’라고 부른 이후 더는 오빠 어쩌구 하는 소리는 쏙 들어갔다. 에단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도 별로였지만 자기에게 오빠라고 하니 더 싫었나 보다. 그래서 에일린은 편하게 에단 오빠의 호위와 마음껏 오빠를 부를 수 있는 권리 두 가지를 챙겼다.
그날 밤 에일린은 기분 좋게 누웠다. 에단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되었다. 오늘 부모님도 다녀갔으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결혼식 준비를 한다는데 그거야 뭐,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일 년만 잘 지내다 집으로 돌아가면 돼.’
에일린이 베개에 볼을 비볐다. 부드러운 감촉이 볼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오늘 부모님이 살아 있는 것도 보고 오빠도 만났다. 대공가에 온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가족이 살아 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에일린은 꿈을 꾸듯 행복했다.
제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모든 불행이 걷어진 것만 같은 기분. 당장은 결혼한다고 가족을 더 자주 볼 순 없지만 이혼하면 마음껏 볼 수 있다.
이혼 후엔 마음 편히 일을 해도 좋겠다. 가족들에게 일하겠다고 하면 어머니처럼 시녀로 황궁에 들어가는 걸 추천하겠지만 에일린은 다른 게 하고 싶었다.
“아 맞다!”
에일린이 베개를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대공가로 오게 된 날, 직접 만든 약을 거래할 상인과 만나기로 했었다. 그 약속이 어떻게 됐는지 에단에게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다.
“겨우 잡은 기회였는데…….”
자신이 만든 것의 효능은 확실했지만 아무래도 처음 거래를 트는 거라 쉽지 않았다.
“아쉽지만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전과 다르게 이혼했어도 대공비라는 스쳐 지나갈 신분에 몇몇 상단의 문을 두드려볼 수도 있겠다.
‘그럼 그걸 계약해서 팔고…….’
그 자금으로 다시 연구를 시작하면 되겠다. 종일 하면 오빠가 싫어할 테니까 아예 밖에 새로 작업실을 만들 수 없나? 그러려면 역시 돈이 많이 필요하겠네.
잠깐 인상을 찡그리며 자금적 문제를 고민하다가 곧 깊은숨을 내쉬었다.
‘돈이야 벌면 되니까.’
가족이 살아 있는데 돈이 대술까. 그리고 막 잠으로 빠지는 경계선에서 에일린의 입가에 희미가 미소가 떴다. 미래를 향한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
아침에 일어난 에일린이 하녀의 도움을 받아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때였다.
“드시고 싶은 요리가 있으신가요?”
에일린은 최근 제게 가장 말을 많이 거는 여자를 보았다. 제인은 가장 경력이 오래된 하녀로, 에일린의 시중들 사람을 고를 때 가장 먼저 지원했다.
에일린은 제인이 제 말에 인형처럼 대답만 하는 게 아니라 언니처럼 챙겨줘서 사라 부인이 종종 생각났다. 사라 부인은 이웃집에 사는 사람으로 남작가의 주방에 일하러 다니는 여자였다. 그녀는 혼자 살았는데 음식을 많이 만들 때면 맛보라며 주곤 했었다. 그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다시 돌아가면 애플파이를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이혼하고도 돌아갈 집이 있기에 에일린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침은 간단한 수프가 좋겠는데.”
“수프만 드시면 금방 배고프실 텐데 스튜와 샐러드는 어떠신가요?”
“그것도 좋아.”
제인이 다른 하녀에게 눈빛을 보내고 마저 에일린의 시중을 들었다. 오늘따라 유독 식사를 챙기는 기분에 에일린이 제인을 돌아봤다.
“결혼 준비하셔야죠. 종일 바쁘실 거예요. 중간중간 간식을 가져올 테니 꼭 챙겨 드세요.”
에일린이 준비되었다는 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하녀가 머리카락을 한데 모았다가 일부가 빠져나왔다.
에일린이 제 갈색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직 금빛이 돌지 않은 평범한 머리카락인데도 향유를 잔뜩 발라서인지 제법 괜찮아 보였다.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제인이 에일린의 얼굴에 살살 붓을 놀리며 물었다.
“결혼하는 게 실감 나고 또 웨딩드레스도 입을 거니까.”
오빠가 살아 있고 잠들기 전까지 온통 무슨 일을 하며 살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했기에 그 기분이 계속 이어져 온 거지만 제인에게는 적당히 둘러댔다.
“후후, 계속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거울을 들어 제 머리를 살피느라 제인의 말을 놓친 에일린이 뒤늦게 물었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으니 다시 말해 봐.”
무슨 말을 한 건지 궁금해서 에일린이 되물었는데 제인이 재차 거절할 일은 없었다. 똑똑 두드리는 왠지 비장한 노크 소리에 이어 줄지어 들어오는 수십 명의 사람 때문에.
품에 가득 무언가를 안고 들어오는 그들을 보며 에일린은 미안하지만 개미를 떠올렸다. 자기 몸보다 3배 이상 되는 짐을 이고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게 딱 그랬다. 제인은 알고 있었던 듯 옆으로 비켜섰고 다른 하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졸지에 소파에 혼자 남아 있게 되어버린 에일린이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유독 드레스가 화려한 사람이었다.
“대공비 마마.”
“……누구신지?”
에일린의 순수한 물음에 그녀가 치맛자락을 들며 자기소개를 했다.
“디자이너 벨라입니다.”
“보석상인 필리스입니다.”
“하리움 상단에서 나왔습니다. 재탄입니다.”
“정원지기 폴입니다.”
하나씩 이어지는 이름을 다 외우기도 전에 그들은 에일린을 둘러쌌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꺼내 드는데 그제야 그들의 직업이 확실히 머리에 들어왔다.
제인이 에일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전부 대공비 마마보다 신분이 낮으니 말을 높이지 않아도 됩니다.”
상대방의 신분보다 그들의 불타오르는 눈동자에 저절로 예의를 차렸다. 하지만 제인의 말이 맞으니 에일린은 빠르게 행동을 바꿨다.
“어떤 걸 보여줄 거지?”
“장신구가 준비되었습니다.”
“잠옷을 준비했습니다. 골라보세요.”
“새롭게 꾸밀 방에 달 커튼입니다. 어떤 게 마음에 드시나요?”
“방을 꾸밀 꽃으로 어떤 걸…….”
에일린의 얼굴은 쉬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점점 희게 질려갔다.
새롭게 꾸밀 방이라는 게 신혼방이겠지. 결혼한다는 게 막연히 결혼식 준비만 할 줄 알았더니 신혼방을 꾸미는 것까지 포함된 건 줄 몰랐다.
“잠깐만. 커튼이야 어느 방이나 달려있던데 뭐하러 바꾸지? 그대로 하면 안 돼? 꽃은 적당히 싱싱하면 되겠고 잠옷도 골라야 해? 장신구…… 아, 그냥 마음에 드는 걸 말하면 된다고?”
에일린은 우선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나 보다. 그들이 망설이고 있으니 에일린이 손을 들어 제게 관심을 모았다.
“아무래도 한 명씩 나와서 말하는 게 좋겠어.”
에일린의 중재에 그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가장 먼저 나선 건 장신구가 담긴 상자를 늘여놓은 남자였다.
“보석상인 필리스입니다. 이것이 가장 최근에 제작한 작품들입니다. 하나하나 대공비 마마와 어울리는 것들입니다. 우아하고 기품있지요.”
“그럼 이 중에 하나를 고르면 되나?”
“꼭 하나만 고르시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 분홍색의 보석은 저 멀리 테라리스 왕국에서만 나는 희귀한 것으로 한겨울처럼 차가운 동굴에서만 자라는 미트리라는 원석입니다.”
그때부터 필리스 상인의 기나긴 설명이 이어졌다.
세상에. 원석을 다듬어서 보석이 되는 과정까지 눈에 그려질 정도로 상세한 설명에 에일린의 초점이 흐려져 갔다.
“생각해 보지.”
에일린이 당장 선택할 수 없어서 다음 순서로 미뤄버렸다. 필리스 상인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듯 물러나자 다음으로는 커튼 샘플북이 에일린의 앞에 내밀어졌다.
“커튼의 색을 무엇으로 할까요? 보시면 이렇게 레이스가 달려 있는 종류는 가벼워서 바람을 날리면 예쁘답니다.”
“그럼 그 레이스가 달린 것 중에 아무 색이나…….”
“그런데 햇살마저 막아주진 못해서 점점 해가 길어지는 날엔 아침부터 방이 밝아질 것입니다.”
“그럼 적당한 두께로…….”
“그래도 이 레이스가 햇빛을 받아 방에 그림자를 만들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상인의 말로는 레이스가 제일 예쁘다. 그러나 단점이 있긴 하다.
에일린은 알고도 커튼을 사도 되나, 자기 혼자서 결정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 커튼을 해도 될지 결정할 수 없게 되면서 조금씩 심란한 기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몇 명 만나지도 않았는데 제인이 간식을 가져왔을 때가 되었다. 상인들이 전부 객실로 가자 에일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오늘 안에 해야 해?”
“조금 촉박하시겠지만 이번 주 안으로만 해 주시면 된답니다.”
“하지만 너무 많던데?”
“대공 전하라면 이 모든 걸 반나절도 안 돼서 처리하실 수 있겠지만…… 워낙 바쁘신 분이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대?”
“소문으로는 질문에 바로 답을 주신다고 해요.”
“그럴 수 있나?”
‘나도 빠르게 결정한다고는 하는데, 자꾸 버벅대고 막히는데.’
“어떡하지?”
에일린은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이 간식을 다 먹길 기다리고 있는 자들의 시선에 얼굴이 뚫릴 지경이었다.
“뭘 어떡해?”
제인이 아닌 남자의 목소리에 에일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부담스러웠던 사람이 오늘은 왜 이리 반가운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다가 곧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