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민감한 호칭
언제 와 있었는지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에일린이 황당한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으니 로이드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분명 웃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안을 훑은 로이드가 에일린에게 눈을 마주쳤을 때 스치듯 미소를 지었다.
“오빠가 창피하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무슨, 내가 언제 창피하다고 그랬어요.”
“다 들었어.”
로이드가 대놓고 들었다는 티를 냈다. 사람이 인기척을 내야 한다거나 최소 못 들은 척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외려 그가 뻔뻔하게 나오니 에일린이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저렇게 뻔뻔한 사람인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아니고.
에일린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있더라.]
[그 사람 제멋대로 굴지 않아?”]
[하긴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얼마나 겸손하겠어.]
“…….”
대공의 이야기를 했는데 설마…….
“어디서부터 들었어요?”
“둘이 나눈 대화?”
“네.”
“거의.”
거의 다 들었다는 건지 아니면 거의 못 들었다는 건지. 굳이 물어봐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 아닐까 싶어 에일린이 입술만 달싹일 때였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지켜보고 있던 에단이 다가와 물었다.
아, 그렇지. 에일린은 본론만 묻고 바로 보내면 될 거란 생각에 금세 입가가 풀어졌다. 리하스트 대공을 빨리 보내고 싶은 마음에 그를 열렬히 바라보았다. 남매의 시선을 직격타로 받는 로이드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클라우디아 백작이 돌아간다는군.”
“아…….”
에단도 가야 하지 않냐는 질문이 생략되었지만 모두가 알아들었다. 에일린은 바로 아쉬운 듯 에단을 바라보았다.
“오빠…….”
“다음엔 결혼식 때 보겠네.”
“응.”
“오빠 창피한 거 아니지?”
에단이 우울한 에일린을 위해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에일린이 단박에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오빠가 너무 예쁘니까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나는 오빠를 지켜 주질 못하는데.”
“네가 날 지켜 주려고?”
“당연하지. 나는 오빠를 잃고 싶지 않아.”
에일린은 침울한 얼굴로 진심을 전했다. 관속에 핏기가 가신 채 눈을 감고 있던 에단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더욱 오빠를 지키고 싶었고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게 제 평생의 한 번뿐인 결혼을 걸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에일린은 오빠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전쟁이라도 보내는 줄 알겠어.”
남매가 나누는 대화를 듣던 로이드가 에일린에게 바짝 붙으며 건넨 말이었다. 에일린은 제게 가까운 걸 넘어 그와 닿아있다는 것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점점 따뜻해져 가는 등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큰 행사니까 걱정돼서 한 말이었어요.”
“그래. 그렇다고 해 줄게.”
“해 줄게가 아니라 진짜예요.”
에일린은 제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로이드가 얄미워서 살짝 흘겨보고 에단을 보았다.
“에단 오빠?”
에단과 마저 인사를 나누려고 돌아본 에일린이 멈칫했다. 지금껏 조용히 있던 에단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그래?”
“어…… 아니야.”
에단이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에일린이 재차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오빠.”
“잘 지낼 거 같네. 괜히 걱정했어.”
또 보자, 에일린. 인사한 에단이 로이드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복도를 걸어갔다.
‘이제 결혼식 때 보겠네. 제발 오빠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오빠가 사라지자 에일린은 곧장 뒤에 있는 사람에게 신경이 쏠렸다. 에일린은 굳이 뒤돌아서 아는 척해야 하나 고민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못 본척하면 알아서 가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소용없었다.
에일린이 슬쩍 한쪽 눈을 떴다가 놀라서 두 눈을 다 떠버렸다. 제 얼굴을 뒤덮듯이 위압적으로 다가온 손 때문이었다. 로이드가 내뻗은 손은 에일린의 얼굴까지 다가오더니 곧장 머리에 닿아왔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에일린이 바라보고만 있으니 로이드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설마 머리 좀 쓰다듬었다고 화내는 건 아니지?”
로이드가 여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워낙 제멋대로라서 말이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이기적으로 컸어. 그래서 하고 싶은 건 바로 하는 편인데 불만 있어?”
“…….”
에일린은 입술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 들었다. 자기 욕하는 소리 다 듣고 지금 티 내고 있는 거다. 그 나름대로 심술을 부리면서.
에일린이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덮은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왜 허락 없이 손을 댔냐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오빠와 나눈 대화를 알고 그걸 말하는 건데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에일린이 로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만약 토끼 귀라도 달려있었다면 추욱 늘어져 있을 것 같았다.
“대공님 흉 좀 봤어요.”
“조금이 아니던데.”
“대공님 같은 경우엔 워낙 소문이 안 좋아서 오빠가 걱정됐나 봐요. 실제로 만나니까 더 그런 면도 있고…….”
거짓말이라도 아니라고 하면 되련만 에일린은 그냥 솔직히 말했다. 로이드는 에일린이 보통 성격이 아닌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자 헛웃음을 지었다.
자기 이야기를 했다는 걸 일부러 밝혔더니 아주 뻔뻔하기가.
로이드가 다시금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로이드가 어떤 이유로 입을 가렸는지 모를 에일린은 그에게 상처를 준 듯 미안해서 서둘러 말을 붙였다.
“그래도 막 부정적으로 세상을 보거나 질투에 사로잡혀 살진 않아요. 그냥 아주 조금…… 특정 인물을 흉보는 정도예요.”
“변명은 됐고.”
정말 변명이었는지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결혼식.”
“설마 취소하시려고요? 그래도 오빠랑은 안 돼요.”
에일린이 화들짝 놀라 미리 경고했다. 로이드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결혼식 때 당신의 오빠를 지켜 줄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에일린이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요?”
“그래. 엄밀히 누가 대공의 사돈을 건들겠어. 그런데 그걸로는 부족하잖아. 어떤 알파도 다가오지 못하게 기사를 배치해 줄게.”
에일린이 반색하며 좋아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다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우리 오빠, 아니 에단 오빠를 지켜 주던 호위가 반하면 어떡해요?”
너무 당연하게 떠오른 생각인데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지간히 제 오빠를 챙기는구나 싶은 눈빛을 대충 흘리며 에일린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베타로만 구성하지. 혹시나 히트가 올 시기라면 미리 말해둬. 사이클 안정제도 마련되어있으니까.”
“사이클 안정제를 주신다고요? 안정제를요?”
“그래, 억제제가 아니라 안정제.”
믿을 수 없어 되물었던 에일린이 자꾸 풀어지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안정제를 준다니 믿을 수 없어.’
보통의 억제제는 페로몬을 조절하는 용도였다. 꾸준히 먹으면 히트 사이클을 조절할 수 있다지만 정작 히트가 터졌을 땐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사이클 안정제만은 달랐다. 그건 히트가 와도 바로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약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는 거였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일 년에 몇 개 나오지 않았다. 어디에서 만드는지 또한 비밀리에 감춰져 있기에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자도 한정적이었다. 그 귀한 걸 내어준다니 에일린은 기뻐했다가 다시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귀중한 걸 정말 오빠에게 내어준다고요?”
“그렇게 귀중한지 몰라서 내주겠다고.”
로이드가 어떡할 거냔 눈빛을 보냈다. 실상 이건 고민할 게 없는 선택이었다.
에일린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멈칫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에일린은 이미 다 넘어갔으면서 뒤늦게 경계심을 드러냈다. 얼마 전 로이드도 에일린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그녀가 청혼과 동시에 온갖 것을 다 내어준다고 하니 의심이 들어서 그랬다.
그 반대의 경우가 되니 제법 기분이 괜찮았다. 에단을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에일린이 좋아하는 걸 보고 있으니 선뜻 내어주길 잘했단 생각도 들었다.
“혹시 바라는 게 있으신가요?”
“바라는 거라니. 애초에 당신과 오빠를 지켜 주는 게 약속이었어.”
“아…….”
에일린이 뒤늦게 거래를 떠올렸다. 그때 로이드가 원하는 걸 물었고 에일린은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그건 이혼한 후의 이야긴데요?”
“이번에 애피타이저라고 생각해. 아니면 그 오빠 소리나 그만하든가. 오늘 셀 수 없이 들은 거 같아.”
로이드가 정말 싫다는 듯 질색했다.
“그 오빠 소리만 안 해도 좋겠는데 그걸 대가로 삼으면 어때?”
“오빠.”
“그만하라고 했…….”
“로이드 오빠!”
에일린의 호칭에 로이드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