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에단
에단은 이 자리를 어색해하는 부모님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의연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그 노력이 통했는지 에단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는데, 반대로 에일린의 심장은 바짝 조여들고 있었다. 에일린은 에단과 언제 눈이 마주칠까 초조해하면서도 그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당신이로군.”
에단의 인사에 로이드는 백작 내외에게 하던 것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서로 지나치듯 본 적이 있어 처음 보는 게 아닌데도 로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에단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려 갔다. 에단은 제게 무슨 말을 하려나 그를 보지만 로이드가 더 말하지 않은 관계로 둘의 인사가 어정쩡하게 끝났다.
에단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다 에일린을 발견했다. 에단과 눈이 마주치자 에일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평소에 잘만 보던 오빠의 눈인데 지금은 눈 맞춤이 길어질수록 부담감이 커지고 있었다. 결국 에일린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지 못하고 동요하고 말았다. 에일린은 제 손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엄한 곳을 바라봤다.
“에일린.”
에단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에일린이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겁이 난 에일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리 와.”
에단의 다소 힘이 실린 말에 에일린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중간에 뭐가 못마땅한지 대공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금방 관심을 돌렸다.
“오빠.”
에일린이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에단을 불렀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계속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에단은 에일린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면서도 굳은 입매가 풀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렇게 어린 애가 결혼한다고?”
녹아버릴 듯한 다정한 목소리에 에일린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걱정되네.”
혹시나 오빠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 다정한 말투에 에일린이 금방 울상을 지었다. 그간 마음졸이던 게 풀어지면서 차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오빠. 미안해.”
에일린은 에단의 옆구리의 옷을 쥐고 칭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이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따로 이야기하자.”
에일린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클라우디아 백작 내외가 왔습니다.”
원로원의 회의실에서 누군가 막 정보를 물어왔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알란은 로이드가 하듯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모로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는 듯 굴다 다시 똑바로 세웠다. 그의 눈치를 보던 누군가가 슬그머니 운을 뗐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는 지난 가신 회의에서 에일린이 그냥 나갔다고 했을 때 불쾌함을 드러내던 로버트 원로였다.
“우성 오메가가 아니면 볼 거 없는 클라우디아가의 베타와 결혼이라니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 상대를 골랐을까요?”
로버트 원로는 알란의 동의를 구하고 싶다는 듯 보였다. 알란이 계속 생각을 이어가는 듯 굴더니 말했다.
“언제 대공이 우리의 말을 들었습니까.”
“하긴 그렇지요. 어쩐지 결혼하라는 종용에도 순순히 답한다 했습니다.”
다른 이가 말을 덧붙였다.
“클라우디가가 아닌 다른 가문을 끌어들일 것도 막았지요.”
그들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여러 가문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클라우디아가와 공식적으로 약혼한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상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맹점을 로이드가 먼저 파고들 줄은 몰랐지만.
로이드는 영악하게 정략결혼을 이용했다. 적어도 클라우디아가와 이어지겠다고 하면 원로들과 친분 있는 가문과는 이어지지 않을 테니까. 대신 베타를 데려오는 것으로 그 안에서 최대한의 심술을 부렸다.
로이드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칼릭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원로원이 대공에게 억지로 결혼을 밀어붙일 때부터 이런 일을 예견했다. 로이드가 순순히 따를 성격이었다면 벌써 결혼하고도 남았다.
‘대체 이 싸움은 언제 끝날지.’
칼릭스가 끝이 나지 않을 회의에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의미 없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면서 대공을 떠올렸다.
지금쯤 클라우디아 백작 내외를 만났다면 식사를 하고 있으려나?
칼릭스의 생각대로 그들은 곧바로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자는 목적이었지만 실상 신경을 분산시키자는 에일린의 생각이었다.
틀림없이 제 부모님은 불편해할 것이다. 그래서 건넨 제안이었는데 괜한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클라우디아 백작 내외는 정신없는 표정으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가득 차려진 요리에 손을 뻗을 생각도 못 한 채 제 앞에 있는 것만 조금 맛보는 게 다였다.
각자 시중을 들어주는 하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에 반해 대공은 여유로운 식사를 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제가 원하는 요리를 선택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하녀 세 명이 움직이고 있으니 에일린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표정이었다.
‘백작……은 아무 소용없네.’
이 자리에 백작의 신분은 아무 소용없었다. 이미 부모님은 대공에게 주눅 들어 있었다. 그게 안타깝지만 에일린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신 에일린은 옆자리에 앉은 오빠를 돌아보았다.
“살이 빠진 거 같아.”
연신 에단을 살피던 에일린이 걱정 섞인 말을 건네왔다.
“또 책 읽는다고 끼니 거른 거 아니지?”
“에일린. 오빠를 뭐로 보고.”
“책벌레.”
“하하, 그 별명 진짜 오랜만이다.”
에단이 소리 내어 웃으며 에일린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눴다.
“잘 먹고 있었어. 오늘 널 보러 온다고 하니까 사라 부인이 애플파이를 만들어 줄까 물어봤었어.”
“사라 부인의 애플파이는 맛있지.”
에일린이 인정하는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로이드는 에일린의 앞에 놓인 애플파이를 보았다. 저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사라 부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과연 대공가의 요리사가 만든 것보다 나을까.
“많이 먹어.”
에일린이 에단의 접시에 작게 자른 고기를 올렸다. 에단은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입에 넣었다.
“에일린. 네 오빠는 어련히 엄마가 챙길까.”
“그렇긴 한데 오빠랑 같이 있다가 떨어지니까 어색해서 그래요.”
백작 부인의 말에 에일린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어릴 적 오빠와 둘이 밥 먹을 때가 많다 보니 서로 챙겨주던 버릇이 지금까지도 남았다.
“어머니도 어서 드세요.”
에일린이 백작 부인의 접시에도 고기를 올리고 백작의 접시도 바라보는 걸 로이드가 빤히 지켜보았다.
“보기 좋네.”
에일린은 로이드가 빈정거리려고 한 말인지 아니면 그냥 감상을 말한 건지 헷갈렸다. 그러나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자리라 로이드의 말뜻을 곡해하고 싶지 않았다. 실은 이렇게 가족을 만난 게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감사해요.”
에일린의 인사에 로이드가 살짝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에일린이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 몰랐다. 그동안 하도 통통 튕겨와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던 터라 의외인 모습을 맞닥뜨렸다.
“대공님께서도 어서 식사하세요. 아까부터 잘 드시지 않으셨어요.”
줄곧 에일린이 제 가족만 돌아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보란 듯이 로이드의 식사량을 따져오니 그가 당황했다. 로이드는 살짝 무너진 표정으로 제 앞을 바라보았다. 음식에 손을 댄 흔적이 아주 미세했다. 로이드의 침묵에 아랑곳하지 않고 에일린이 제 앞에 있는 음식들을 가리켰다.
“이거 정말 부드럽고 맛있어요. 그리고 이 스튜는 향이 독특하네요.”
“특별한 허브를 넣어서 그래. 내 요리사가 허브를 다양하게 잘 쓰지. 어디 가도 이런 맛은 못 볼 거야.”
“처음 먹어봐요.”
“당연하지. 이것도 먹어봐.”
로이드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요리를 가리키자 하녀가 눈치껏 에일린의 앞에 내려놨다. 에일린이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조금 가져가 먹었다. 그리고는 커다랗게 떠지는 눈으로 제 감상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로이드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가 권하는 건 다 맛이 보장되지.”
“그러네요. 오빠도 먹어봐. 진짜 맛있어.”
에일린이 그것을 에단에게도 권했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어색하던 분위기가 에일린 덕분에 한결 부드러워졌다. 로이드가 클라우디아 백작에게도 선뜻 요리를 추천했다.
“클라우디아 백작도 드셔 보시지요.”
“감사합니다. 여기 이것은 무엇입니까?”
클라우디아 백작이 정중히 인사를 건네더니 테이블의 한가운데 있는 새 모양 구이를 가리켰다.
“그건 헤링본을 구운 것인데 고소한 맛이 일품이지요.”
“그렇습니까?”
아까보다 식사 자리가 화기애애해졌다. 이 분위기를 몰아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결혼식은 돌아오는 헤냐스의 날에 하지요.”
“예.”
로이드의 제안에 클라우디아 백작이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그러겠다고 했다. 더불어 백작 부인 역시 헤냐스의 날이 언젠지 손에 꼽아볼 뿐 반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반응은 의외의 사람에게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