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0)화 (10/120)

10화. 에단의 생각

로이드의 얼굴에 여전히 걸려있는 미소가 얄미워 에일린은 의자에 앉는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잠은 잘 잤나? 부족한 건?”

“없었어요.”

오히려 넘쳐서 문제였다. 온갖 군데에 신경이 쏠리느라 제대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집에 갈 수 있겠다.’

결혼하기로 결정되었으니 더는 대공저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어제 에일린이 머물렀던 손님방을 핑계로 잠시 집에 가 있겠다는 변명도 방금 생각났다. 어쨌든 불편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가겠다고?”

“네.”

에일린의 순진한 대답에 로이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잘라냈다.

“여기 있어.”

“하지만 결혼 준비는 집에서 해도 되는걸요. 그리고 이번에 경황이 없었지만 부모님께도 말씀드려야 하고요. 그러니까 집에 갔다가…….”

“클라우디아 백작이 올 거야.”

동시에 말이 나오면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엉켜버렸다. 에일린은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고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잠깐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가 뒤늦게 깜짝 놀라 물었다.

“누구요? 클라우디아 백작? 아버지요?”

“그래. 내일 오전에 오기로 했어.”

“왜요?”

“당신과 결혼하는데 그 전에 봐야 하잖아.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결혼하려고 했어?”

되묻는 말에 에일린이 억울하지만 맞는 말이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았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던 에일린이 억울하다는 듯 그를 돌아봤다.

“그럼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말하고 나서 정식으로 올 수도 있었잖아요. 왜 그렇게 들이닥치듯 오셨어요?”

“들이닥친 적 없는데.”

로이드는 뻔뻔한 얼굴로 그날의 일을 하나씩 짚어줬다.

“클라우디아 백작에겐 따로 연락했고 미리 얼굴을 볼 겸 찾아갔던 거야. 마중 나온 건 당신이었고 내 청혼을 받아들였지. 여기서 문제가 뭐지?”

“절 여기 데려왔잖아요.”

로이드의 표정에 금이 가더니 그는 눈썹을 내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힘이 없어서 가신들의 눈치를 많이 봐. 그래서 결혼할 상대를 데려와 보여줘야 했어.”

나름 처연하게 보이려는 듯하지만, 에일린의 앞에선 어림없었다.

“시간이 없다고 했지 누구에게 소개해 준다는 말은 안 했어요.”

“그랬군.”

깔끔하게 인정하는 로이드에게서 아까의 그 처연함을 흉내 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출정일을 맞추려고 번거로운 시간을 빼려 에일린을 데려왔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지 않는다고 에일린이 모르는 것도 아니건만.

“그럼 오늘부터 한 사람씩 소개하면 되겠네. 따로 자리를 마련할 테니 식사 후에 그들을 만나봐.”

이 식사가 끝나면 집으로 가겠다고 했는데?

에일린이 수저를 들어 수프에 담갔다. 아직 입맛이 없어 수프를 휘휘 젓기만 했다. 로이드의 말을 정리하자면 집에 가지 말고 얌전히 여기 있으라는 뜻이었다. 불편해서 나갔다 다시 오고 싶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소개는 나중으로 미뤄 주세요. 아직 적응이 안 됐어요.”

“마음대로.”

역시나 소개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당한 기분에 에일린이 입을 다물고 억지로 식사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 먼저 운을 띄운 건 로이드였다.

에일린이 그를 바로 보았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눈 끝이 가늘어진 채로 에일린을 향했다. 정확히는 제 얼굴에서 보일 누군가를.

“빨리 만나야 할 사람이 따로 있지 않나?”

“누구요?”

“에단 클라우디아.”

“왜…….”

왜냐고 물어보려던 에일린이 말끝을 흐렸다. 로이드가 말하기 전에 이유가 짐작되었다.

“에단도 분명 예상하였을 텐데? 가문 간의 약속이고 나와 결혼한다면 자신이라고 여겼을 거야. 그런데 달라졌잖아. 그가 아니라 에일린 당신으로.”

로이드의 말을 들으며 제 동요한 모습을 감추려 에일린이 억지로 수프를 떴다. 그러나 정작 수프를 떠서 먹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춰버렸다. 반동으로 수프가 흘러내렸지만, 에일린은 그것보다 로이드가 한 말이 더 신경 쓰였다.

“나야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지만…….”

로이드는 에일린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 사이를 은근하게 파고들었다.

“에단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로이드의 말끝이 은근히 흐려지고 있었다.

***

방으로 돌아온 에일린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푹신하게 깔린 러그 위를 빙빙 돌았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생각했다고 해서 뭔가 할만한 시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오빠와 헤어지기 전에 한마디 할 순 있었다.

“오빠가 대공과 결혼하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무슨 말이든 했을 텐데.”

에일린이 제 머리를 헝클었다. 복잡한 마음에 엉킨 머릿속을 시원하게 긁고 싶었지만 헛된 짓이었다. 머리만 부스스하게 떠올랐을 뿐 에일린의 속을 정리해 주진 않았다.

에일린이 자리에 앉으며 제 이마를 짚었다. 오빠를 구하려고 대공에게 청혼했는데 정작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에일린이 테이블에 엎드렸다.

남들이 보면 대공을 좋아해서 오빠의 남자를 뺏은 거로 보이겠지. 어차피 그런 건 상관없지만 오빠마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당장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건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어떻게 말하지? 오빠를 위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면 믿어줄까?”

에일린이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평소처럼 하녀들이 들러붙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 채.

“전하. 여기서 뭐 하시는…….”

“쉿.”

로이드가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자 제라미 경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테이블에 엎드린 에일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입을 다문 제라미 경이 로이드를 따라갔다.

방에서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로이드가 멈추자 제라미 경이 따라 멈췄다.

“전하.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뭐가.”

“저는… 걱정됩니다.”

제라미의 말에 팔짱을 낀 로이드가 계속해 보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간 전하와 교류해 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아이를 말한다니 이상합니다. 혹시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닐까요?”

회의 때 로이드가 그랬다. 에일린 클라우디아가 아이를 원한다고.

제라미 경이 찝찝한 얼굴로 말했다.

“대공 전하와 결혼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그 우성 오메가를 숨긴 건 아닌지 의심됩니다.”

일전에 제 오빠를 숨겨놓고 모른 척하더라는 뻔뻔함에 에일린을 데리고 왔다는 로이드의 말을 떠올렸다. 즉, 대공비 자리가 탐이 나 의도적으로 제 오빠를 숨겼고, 빨리 아이를 가지려고 한다는 뜻이다.

“제라미 경.”

“네, 주군.”

로이드의 호칭에 제라미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무거운 시선으로 로이드를 응시했다. 대공을 지키는 기사다운 강한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제라미 경의 절제된 분위기가 만족스러운지 로이드가 좁혔던 미간을 조금은 폈다. 그래 봐야 인상 쓴 건 똑같지만.

“추측을 함부로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 텐데?”

로이드의 의미심장한 말에 제라미가 흠칫 얼굴을 굳혔다.

“사람들은 가십으로 내 이야기를 해. 내가 우성 알파라 매일 밤 오메가의 페로몬을 취한다거나 대공의 업무를 나 몰라라 한다고 말이야. 성격이 더럽다는 건 사실이지만 다른 건 글쎄?”

대공의 장난스러운 뒷말에도 제라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주군을 둘러싼 소문 중에 사실은 극히 일부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문이 전부 사실인 양 떠들어댔다. 그것을 로이드가 짚은 것이다.

그걸 알고서도 자신 역시 심증만으로 에일린이란 여성을 나쁜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진심 어린 반성에 로이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에일린이나 잘 지켜봐. 누군가 그녀를 노릴 수도 있으니 집에 보내도 안 돼.”

로이드가 에일린을 보내지 않은 이유였다. 자신과 결혼하기로 했으니 이제 에일린은 안팎으로 관심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집에 보내는 과정 중 어떤 승냥이가 에일린을 노릴지 몰랐다.

“알겠습니다.”

“정 집에 가겠다고 그러면 알아서 사람 하나씩 집어넣어.”

진중히 명을 받들던 제라미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

다음 날, 에일린은 로이드의 옆에 서서 자신의 부모님이 걸어오는 걸 눈에 담았다. 그들은 위용을 자랑하는 대공저에 놀라면서도 착실히 걸어왔다.

“리하스트 대공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금발의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긴 클라우디아 백작과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올린 백작 부인이었다. 클라우디아 백작 내외가 로이드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귀족 간에도 서열이 정해져 있는 법. 특히나 백작이지만 일반 자작만큼이나 보잘것없는 클라우디아 백작 내외는 대공을 어려워했다.

“오랜만입니다.”

로이드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만 해도 워낙 권력의 차이가 크다 보니 클라우디아 백작 내외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버지, 어머니.’

로이드의 옆에 서 있던 에일린이 울컥하는 마음을 꼭 눌렀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줘보지만 제 부모를 보고 흔들린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황성에서 행정관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시녀인 어머니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손에 꼽았다. 에단 오빠가 죽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났다. 부모님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에일린은 목이 멜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에단 오빠.’

에일린의 시선이 부모님의 뒤쪽을 향했다. 부모님의 뒤편에 있던 에단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