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거래 성사
“크흠.”
다시금 시작된 회의였지만 침묵이 길어지자 원로원 중 한 사람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로이드가 팔걸이에 살짝 기대고 있던 상체를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표 원로인 알란과 친한 자였다. 에일린이 나갔다고 했을 때 혀를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던 자였고.
로이드가 방금까지 지었던 미소를 지우고 다른 표정을 만들었다. 반쯤은 느긋하고 또 반쯤은 귀찮은 듯.
“말도 없이 나가다니 제대로 교육을 받았는지 걱정입니다.”
“우리에 가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방을 나선 게 문제가 됩니까?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도 교육받은 티가 나더군요.”
로이드가 태연히 받아쳤다. 당신도 어디 가둬줄까? 싶은 눈빛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가신이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저택을…….”
“내 저택이지요. 그리고 내가 상관없다는데 누가 문제라고 걸고넘어질 겁니까? ”
너야말로 내 저택에서 쫓겨나고 싶어?
가신이 찍소리 못하고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이끌리듯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바로 로이드의 숙부, 칼릭스였다. 지켜만 보던 칼릭스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다 나섰다.
제 조카가 데려온 베타 여성을 감싸주는 이유는 하나다.
“그래서 결혼하겠다고요?”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데려왔습니다만?”
로이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결혼은 확정되었다. 클라우디아가의 에단이 아닌 에일린과.
“결혼을 서두르죠.”
로이드가 에일린에게 했던 대로 모두에게 전했다. 언젠가부터 제 마음대로 원로원을 휘두르는 로이드가 이번에도 그 성격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대공.”
이제껏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대표 원로, 알란이었다.
“대공가의 큰 행사를 그리 가볍게 다룰 수 없습니다. 대공의 결혼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알란이 말리자 그 무게가 남달랐다. 로이드는 가만히 제 턱을 쓰다듬으며 알란과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사사건건 제 일을 방해하는 자. 대공이 된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자. 그런 알란에게 조금도 밀리고 싶지 않은 로이드는 아까보다 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숫제 지금껏 나눈 대화를 전부 쓸어버리고 싶었다.
“결혼만큼 중요한 게 또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이라면…….”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군요.”
그의 강조하듯 나온 뒷말에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여자가 마음이 급했구나. 저 남자가 오죽 탐이 나면 아이부터 갖는다 했을까.
“어떻습니까?”
로이드가 알란을 뚫어져라 보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알란은 그런 로이드의 함정과도 같은 말에 작은 침음을 흘렸다.
“애초 이 결혼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후계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겠지요?”
로이드가 알란으로 인해 이 상황이 일어난 것을 대놓고 표현했다. 알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로이드를 보았다. 결론은 모 아니면 도다. 전부 어그러져 아예 결혼마저 무산되느냐 아니면 그가 정한 상대를 받아들이느냐.
알란이 주름진 눈을 들었다.
“후계자를 꼭 낳아 주셔야 합니다.”
“결혼만 한다면야 뭐가 문젤까요.”
로이드가 송곳니가 드러날 정도로 진한 웃음을 지었다.
***
에일린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오빠를 보여 주지 않았고 대공에게 거래도 제안했다. 주머니를 털어 온갖 것을 다 내어주고 완전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생기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이를 내어준다고 한 건 에일린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누가 아이를 걸겠는가. 정말 아이가 생길 거였다면 절대 그런 말 안 했을 것이다.
“분명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불안해.”
에일린이 제 머리카락을 헝클며 주저앉듯 의자에 앉았다. 거래를 내밀었고 그는 결혼을 서두른다고 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유는 대공의 표정 때문이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는 나갈 때까지도 세상 가벼운 얼굴이었는데 회의에서 얼마나 강하게 제 의견을 말할까. 에일린이 의심쩍어하던 그 표정 그대로 가신을 찍어누르고 제 의견을 밀어붙일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하고 그녀는 연신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오빠,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오빠라면 잘하고 있다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안아줄 텐데. 에일린은 떨어진 지 몇 시간 안 됐지만 에단 오빠가 보고 싶고 걱정돼 눈물을 글썽거렸다. 유난스럽다고 볼 수 있지만, 그녀는 에단이 죽고 몇 년을 보지 못하다가 막 회귀해서 잠깐 본 게 다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안아 주고 나올걸.”
부모님도 보고 싶었다. 새삼 가족들에 대한 생각에 초조함이 그리움으로 바뀌어 갈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며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들어왔고 뒤이어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들이 따라왔다.
에일린은 자신을 끌고나갈 듯 제 주변을 에워싸듯 선 그들을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나 안 된 거야? 그렇다고 이렇게 끌고 가려고?’
그냥 말로만 나가라고 하면 안 갈 걸 알고 그랬나? 아까 대공에게 뭐든 다 내어주겠다고 구질구질하게 군 게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거구나.
에일린의 머릿속이 이제 어떡하나 싶은 고민에 복잡하게 꼬여갈 즈음이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앞으로 대공비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남자를 시작으로 에일린을 둘러싼 모두가 그녀에게 예를 취했다. 기사들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오른손은 가슴에 댔고 하녀들은 허리를 숙였다. 그들이 주는 무겁고도 경건한 인사에 에일린은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반응도 취할 수 없었다.
“대공비……라고요?”
“대공 전하의 뜻을 받들어 제 모든 것을 바쳐 대공비를 지키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기사와 그 뒤에 서 있던 하녀의 말이 에일린의 신분을 재차 강조하듯 나왔다.
‘대공비라고 했어.’
에일린은 멍해졌던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조금씩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대공비라는 신분을 받았다. 그건 즉 대공이 제 거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가신 회의에서 결혼을 승인했다는 말이었다.
‘하아, 다행이야.’
에일린은 한시름 놨다는 듯 눈을 감았다. 자신이 대공비가 되었다는 것보다 에단 오빠가 죽지 않겠단 생각에 따라오는 안도였다.
***
다음 날, 에일린은 대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에일린이 뻑뻑한 눈가를 쓸어내리려는데 앞서가든 하녀가 바라보는 시선에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아직 대공가가 불편한 에일린은 제 행동 하나하나에 어떻게든 말이 나올 걸 알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굴어야 하는데 어제 잠을 못 잔 여파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실감이 안 나네.’
대공비로 모시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온 이후 그들의 극진한 시중을 받았다. 누군가 쓰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침구를 바꾸고 방에 있던 꽃병이 새로 바뀌었다. 에일린에게 불편한 게 있는지 물으면서 목욕부터 잠들 때까지 꼭 두세 명의 하녀가 달라붙어 있었다.
‘나도 백작 영애인데…….’
시중이 어색하다니 누가 들으면 우스울 말이지만 정말 그랬다. 에일린은 크지 않은 가문의 아가씨였고 시중을 드는 하녀도 한 명이었다. 기사는 돌아가면서 호위를 섰었는데 여기서는 모든 게 그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잠들려고 누웠을 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까.
“이쪽입니다.”
에일린은 공손하게 안내하는 하녀에게 자연스레 눈이 따라갔다.
같이 들어가지 않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로이드가 턱을 괸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보는 그의 시선에 에일린은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내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을 볼 여유라…….”
인사를 건넸다고 따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별게 다 시비였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럼 날 좀 보지? 남편 될 사람 얼굴을 봐야지.”
로이드가 허리를 세우면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내 얼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잘……생기셨네요.”
“맞아. 이렇게 생긴 얼굴이 흔하지 않지.”
리하스트 대공의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생겼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미의 기준이 이상하지 않다면 그의 시원하게 뻗은 눈썹과 그윽한 눈매, 균형을 잡아주는 높은 콧대까지 어디 하나 모자람 없다는 걸 알았다.
알지만 그 앞에서 찬사의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모자람 없이 잘 생겨나셨다고요. 그러니까 있어야 할 자리에 눈 있고 코 있고 입 있고…….”
“결혼에 대한 계약서는…….”
“너무 잘생겨서 어제 마주쳤을 땐 깜짝 놀랐잖아요. 얼굴에서 빛이 나는 줄 알았거든요.”
그가 계약서를 읊으며 협박을 가할 말투에 에일린이 바로 말을 바꿨다. 말을 듣기 전에 끊어버리긴 했지만 에일린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로이드의 표정이 흡족하게 바뀌었다.
“그런 태도 좋아.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오기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니 무엇이든 적당하게 조율할 수 있잖아.”
“칭찬 감사해요.”
“줏대 없다는 뜻이야.”
“…….”
한 방 제대로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