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7)화 (7/120)

7화. 흰 장갑의 의미

“왜 그러십니까?”

남자의 경계하는 목소리에 리하스트 대공은 대답 없이 서 있었다. 그게 마치 뭔가를 발견한 것만 같아 에일린은 침도 삼키지 못하고 숨을 참았다.

“이건 무슨 냄새지?”

에일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리하스트 대공이 말한 냄새라는 게 설마.

‘하지만 난 아직 향이 없는데.’

알파, 오메가가 가지고 있는 페로몬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냄새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 어떤 냄새보다 페로몬에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으니 냄새라고 표현하곤 했다.

에일린은 아직 베타이기에 특정 페로몬의 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베타라도 오메가로 발현할 몸이었다. 누구보다 페로몬에 예민할 우성 알파이니 혹시나 몸속에 잠들어 있을 페로몬을 맡은 건 아닌지 온갖 불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프리지어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세탁실이니 향이 강하네요.”

이윽고 들려온 남자의 대답에 페로몬이 아니라 단순한 냄새를 말하는 거였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소리도 없고 손으로 입을 막아 밖으로 새어 나오진 않았지만.

“이곳엔 없으니 다른 곳을 살펴보시죠.”

“후원엔 가 봤나?”

“아직입니다. 제가 직접 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점점 멀어지다가 사라질 때쯤 에일린은 떨리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눈꺼풀이 떨리던 게 멈추고 심장은 조금씩 본래의 속도를 되찾아갔다.

꼼짝없이 들키는 줄만 알았다. 그래도 위기를 벗어나니 막혔던 숨통이 트여왔다. 다른 이의 기척이 느끼지 않을 때가 돼서야 에일린이 몸을 가렸던 침구를 걷어내고 일어났다.

“숨어서 엿듣는 건 이게 안 할래.”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던 경험은 뼈저린 교훈을 주었다. 실은 이게 가장 효율적인 건 알지만 다음에 절대 못 할 거 같았다.

밖으로 나온 에일린은 복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돌아가서…….”

그를 기다려야겠단 말을 하려던 찰나, 마주친 한 쌍의 눈동자에 에일린이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풀을 뜯으러 밖으로 나온 토끼가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은 상황이랄까?

벽에 기대고 있는 리하스트 대공을 보고 에일린은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왜 여기 있는 건데.’

너무 놀라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에일린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리하스트 대공이 천천히 벽에서 몸을 떼었다. 그는 에일린과 마주한 게 놀랍지 않은 듯 무감한 표정이었다.

“당신에게서 프리지어 향이 나.”

아까 세탁실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에일린이 다 들켜버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부산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머릿속이 돌처럼 굳어서 아무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방으로 돌아가도록.”

매몰찬 그의 태도에 에일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 끝났다. 그의 허락 없이 대공가를 돌아다니고 숨어서 남의 말을 엿듣고. 여기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안 오고 뭐 하지?”

앞장서서 가던 리하스트 대공의 목소리에 에일린이 고개를 들었다. 못마땅한 듯 눈썹을 들어 올린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기다리는 거 안 좋아하는데. 지금 안 올 거면 먼저 가서 기다리지.”

“가, 갈게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같이 방에 가려는 걸 알고 에일린이 서둘러 대답했다.

방에서 나올 땐 주변을 살피느라 멀게 느꼈는데 막상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짧았다. 방에 들어선 리하스트 대공은 에일린이 따라오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 에일린은 그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보기만 할 뿐 앉지 않았다. 그보다 높은 눈높이로 어떻게든 한쪽으로 기운 기세의 추를 제 쪽으로 당기고 싶었다.

리하스트 대공은 에일린이 서 있는 게 아무렇지 않은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간 이유가 뭐지?”

“대공님을 찾으러 갔었어요.”

“허락도 없이 나간 걸 보면 급한 일이었나 보지?”

리하스트 대공의 말투에 숨기지 못할 빈정거림이 흘러나왔다. 그의 집이니 허락 없이 돌아다닌 건 에일린의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에일린도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걸 알아서 가만히 기다리기 힘들었어요.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니고요.”

어쨌든 남의 공간을 말없이 돌아다니는 건 그 주인에게 실례되는 행동이기에 에일린은 곧바로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

“죄송해요.”

“아니.”

리하스트 대공이 받아쳤다.

“사과할 거 없어. 잘했어.”

“……다신 안 그럴게요.”

“다시 그래도 상관없어. 어디든 마음껏 다녀봐.”

재밌겠네, 라는 리하스트 대공의 뒷말에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다음에도 그런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만의 협박에 절대 그러지 않겠단 결심이 섰다.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을 때 리하스트 대공이 일어났다. 지금껏 나눈 대화에 에일린이 조급함을 느꼈다. 자신과의 결혼을 최종적으로 확정 짓겠다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더 말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대화가 끝나면 안 될 것 같아 에일린이 대뜸 말을 꺼냈다.

“결혼.”

리하스트 대공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에일린이 방금 자신이 너무 불친절하게 내뱉은 걸 깨달았다. 에일린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말을 길게 늘였다.

“결혼해요 우리.”

……그게 그건가?

***

이전 삶에서 에단 오빠의 결혼식이 잡힌 날 에일린은 처음 대공가에 발을 들였다. 결혼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으니 그저 커다란 행사가 신기하고 하얀 예복을 입은 오빠의 모습에 반쯤 넋이 나갔었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에단 오빠를 만나고 싶었던 에일린은 무작정 방을 나왔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누군가 만나야 길이라도 물을 텐데 아무도 없으니 복도 한가운데 선 채 난감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어?’

누군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에일린이 반가운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에단이란 이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무의식적으로 숨고 보니 왜 그랬지? 싶지만 남의 입에서 제 오빠의 이름이 들려온 게 신기하고 또 은근한 기대에 차 있었나 보다. 예를 들면 어제의 에단 오빠는 정말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는 그런?

‘어제 히트가 터진 게 에단 님이라고?’

‘그렇다니까?’

‘하긴 저택에 그렇게 퍼질 수 있었던 건 우성이 아니면 불가능하겠지. 난 또 페로몬이 정말 좋아서 누군가 했다니까? 어머! 그럼 어제 대공님과 대단한 밤을 보냈겠네?’

여자들의 소란스러운 대화에 에일린이 슬쩍 달아오른 볼을 감쌌다. 자신은 아직 결혼하질 않아 모르지만, 책에서 읽어서 모르진 않았다.

잠만 잔다고 애가 생기진 않는다. 입도 맞추고 다리도 맞추고 배도 맞춰야 한다고 그랬지.

‘그렇지도 않아.’

‘음? 하지만 에단 님이라며. 어제 결혼했고 또 히트까지 온 거면 뻔한 거 아니야?’

‘에휴.’

‘왜 그래. 말을 해 봐.’

다른 여자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니 에일린 역시 조급해져서 더욱 귀를 기울였다.

‘대단한 밤을 어떻게 보내. 대공님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두 분이 함께 밤을 보내신 거 아니야?’

‘결혼식 치르고 밤에 기사들을 이끌고 나가셨어. 시간이 없어서 바로 출발해야 한다고 그러셨대.’

‘그럼 에단 님은? 지금은 에단 님의 페로몬이 가라앉은 거 같은데? 자욱하게 퍼지는 페로몬이 없잖아.’

‘그게…….’

‘빨리 좀 말해 봐.’

‘다른 사람과 보낸 모양이야.’

‘뭐어?’

에일린은 순간 시야가 어지럽고 머리가 빙 도는 현기증에 기둥을 붙들었다.

‘대공님은 없지 이미 히트가 터져서 억제제도 안 들지. 몸은 온통 불씨가 피어오르듯 뜨거웠을 거 아냐. 그럴 때 이성이 흐려지는 거 알잖아. 마침 그 앞을 지나던 기사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더라고.’

‘진짜야?’

‘가신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야.’

‘그럼 에단 님이 히트가 터진 걸 대공…… 어머!’

여자가 계속 말을 이어가다 깜짝 놀랐다.

‘당신 누구죠?’

‘에단 오빠가…… 어떻게 됐다고요?’

에일린이 충격에 빠진 채로 겨우 말을 꺼냈다.

그날 에일린은 에단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후로 오빠와 두 번 만나긴 했지만 차마 결혼식 날의 이야기를 묻지 못했다. 하지만 오빠의 어두워진 표정과 전쟁터에서 오지 않던 대공으로 보아 둘의 사이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일린이 감정이 올라오려는 걸 누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사람이 결혼식을 치른 날 전쟁터로 떠날 수 있죠?’

적어도 하룻밤만 머물고 다음 날 떠나갔다면 에단 오빠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고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그를 몰아붙일 수 없었다.

‘참자. 그래서 내가 온 거잖아.’

오빠의 비극적인 죽음을 막기 위해 왔는데 괜히 흥분한 모습을 보여봐야 손해였다.

에일린이 한껏 속을 누른 채 원하지 않지만 해야 할, 말하고 싶지 않은 고백을 끄집어냈다.

“나랑 결혼하자고요.”

에일린의 청혼에 리하스트 대공이 잠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청혼하는 사람의 얼굴인가?”

에일린이 힐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정말 먹기 싫은 음식을 두고 억지로 먹어야 하는 아이와도 같아 보였다.

어쨌든 청혼할 때의 설레는 뭐 그런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공 전하께서도 그러셨어요.”

“내가?”

“되게 흉흉한 얼굴로 하셨잖아요.”

거기다 납치하듯 데려왔으면서 누가 누구보고 뭐라는지.

에일린의 반박에 리하스트 대공이 잠시 제 입가를 쓸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입가가 비죽거리더니 이윽고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청혼이란 게 이렇게 투심을 끌어올릴 줄 몰랐네?”

그의 상기된 목소리에 에일린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서 투심이 왜 나와.

내가 결투하자고 흰 장갑을 던졌어? 그냥 흰 장갑 끼고 결혼하자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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