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들키기 바로 직전
에일린이 간 곳은 회의실이 아니라 고용인들이 머무는 별채였다. 지금은 다 저택으로 넘어와 일하느라 고요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고용인이 제법 있었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적당한 곳에 숨어 있어야 했다.
에일린은 그런 장소를 잘 알고 있었다.
‘세탁실.’
세탁해야 할 침구 사이에 몸을 숨기면 어지간한 사람은 잘 알아채지 못했다. 특히나 세탁실은 좋은 향이 맴돌아서 페로몬을 숨기기도 좋았다.
지금의 에일린은 굳이 페로몬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예전의 기억이 그녀를 이끌었다. 몸을 끼워 넣고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에일린은 두 가문 사이의 약속을 떠올렸다.
클라우디아 백작가와 리하스트 대공가의 정략결혼은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공개적으로 발표한 적도 없이 그저 서로 가문에서만 아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서로 왕래하질 않으니 에일린도 오빠가 발현하기 전까지 아예 모르고 살았다.
오빠가 발현하고 난 후, 뒤늦게 혼약을 떠올린 부모님은 에단을 밖에 내보내지 않았다. 우성 오메가가 되어 결혼하기 전에 어떤 알파에게 잡혀갈지 모르니 조심하려는 이유였다.
세상에 알파, 오메가, 베타로 나뉘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열성 알파라도 오메가의 향을 맡으면 흥분해 달려들 수 있었다. 에단이 귀족이라 당할 일이 적다 해도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 귀족 중에서도 알파는 많으니까.
에단은 꽤 일찍 오메가로 발현했기 때문에 집에서 잘 나가지 않았다. 에단이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렸던 에일린도 덩달아 집에 머물렀다. 그래서 둘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고 외출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오빠는 지금 무슨 기분일까?’
자신이 대공가의 마차를 타고 간 걸 알고 황당해할까?
에일린이 오빠의 생각을 유추하는 사이 세탁실의 문이 열렸다. 에일린이 제 입을 두 손으로 막은 채 몸을 웅크렸다.
“아직도 회의 중이래?”
“그렇지.”
“너무 길다.”
“다 그 외부인 때문이잖아.”
“외부인? 아아. 에단 공자의 동생?”
‘에단 공자의 동생.’
에일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고용인들인 게 분명한 소음 속에서 그들은 에단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올리고 있었다. 그만큼 대공가에 에단의 존재는 당연히 들어와야 하는 것으로 박혀 있었다. 더불어 자신은 그의 동생 정도로 존재감이 미비했고.
“왜 에단 공자의 동생을 데려왔는지 이해가 안 돼.”
“높으신 분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베타잖아. 애를 낳아도 베타일 게 뻔한데?”
“그건 그렇지.”
“그래서 다들 대공을 설득 중이라잖아.”
“그럼 다시 가서 에단 공자를 데려올까? 지금 집에 있을 텐데 기사들만 바로 가도 되지 않을까?”
“에단 공자를? 네가 어떻게 알아?”
“봤거든.”
에일린은 숨도 감춘 채 그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거 비밀이야.”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 봐.”
“그냥 그 앞을 지나가는 행인인 척하면서 안에 사람이 있나 확인하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있는 걸 확인하고 왔는데 동생을 데려왔으니 얼마나 황당해.”
그녀들의 대화를 통해 에일린은 잇새로 얕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역시 에단 오빠가 있는 걸 알고 왔구나.’
역시나 치밀한 사람이었다.
“에단 공자 말이야. 정말 예쁘더라.”
여자가 몽롱한 목소리로 감상을 내뱉었다.
“그렇게 예뻐? 하긴 우성 오메가니까.”
“그 정도가 아니야. 정말 예뻐. 천사야. 천사.”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야? 그런데 그러면 뭐 해. 정작 여기 온 건 동생이잖아. 예쁘긴 하지만 좀 평범하던데?”
“오빠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
에일린이 무릎 사이로 얼굴을 가렸다.
오빠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외모라는 평은 수도 없이 들었다. 자신도 오빠를 닮지 않아 아쉬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오메가로 발현했을 때 제게도 변화가 생겼다.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금빛 가루를 뿌린 듯 반짝였고 피부는 빛이 났다. 이목구비는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외모가 눈에 띄게 달라지자 수많은 청혼서를 받았고 그중 한 사람과 결혼했다.
예뻐져서 좋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에일린은 딱히 제 달라진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현하기 전의 제 모습이 더 좋았다. 오빠에 비해 부족한 외모라는 걸 알지만 적어도 그땐 행복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혹여나 대공이 자신의 외모에 실망해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오빠를 데려올까 봐 불안했다.
에일린은 그를 잡아둘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안 그랬다간 계속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며 버틸 수 없었다.
***
“방에 없다고?”
“그렇습니다.”
회의 중간에 들어온 집사의 보고에 로이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지루한 회의를 어떻게 뒤집어엎을까 따위의 생각하던 찰나에 들려온 달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의 반응은 아니었다.
“나갔다는 겁니까?”
“그녀의 모습을 본 자는 없나?”
“나가도 된다고 허락한 자가 없거늘, 쯧.”
믿지 못해 되묻는 멍청한 자와 꼬장꼬장한 이들의 혀를 차는 소리에 로이드가 턱을 괴던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가뜩이나 베타라서 성에 안 차는데 그 행동까지 마음에 안 든다는 반응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나한테도 개새끼라고 하던 여잔데 저들의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사고를 칠 수 있진 않을까 기대감이 서렸다.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찾아보도록 하지.”
“하지만 대공,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세요.”
로이드의 단호한 음성이 그들의 불만을 잘라냈다. 계속 회의를 하고 싶다면 자신을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로이드가 회의실을 나서자 호위이자 부관인 제라미 경이 붙었다.
“대공 전하.”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저택 안을 다 살펴보았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도망갔을 가능성은?”
“희미합니다.”
로이드가 걷던 걸 멈추고 팔짱을 꼈다.
“왜 나왔을 거 같나?”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제라미 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재능이 없는 그는 어설픈 가정을 하는 대신 솔직하게 모른다고 대답했다.
로이드가 앞서가고 제라미 경이 그에게 한 걸음 간격을 두고 따라갔다. 당장 없어졌다지만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거침없이 가는 주군의 속이 궁금했다. 실은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지만.
제라미 경이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를 데려오셨습니까?”
그건 왜 묻냐는 듯 로이드가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라미는 주제넘은 질문이었던 것에 더 나아가도 될지 망설였지만, 기어코 말을 꺼냈다. 혹시나 대공 전하의 깊은 뜻을 모르고 불경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 미리 잘라내고 싶었다.
“오늘 클라우디아가에 간다고 하셔서 저는 에단 공자를 데려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이라니 솔직히 놀라서 입이 안 다물어졌습니다.”
“그를 꼭꼭 숨겨뒀더군.”
“누가 말입니까? 대체 누가 에단 공자를 숨겨둔 겁니까?
제라미 경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가문 간의 약속이 되어있는데 누가 에단 공자를 숨겨두었을까? 마치 제 주군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동생이.”
“……네?”
“그래놓고 없다고 거짓말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웠어.”
“그래서요?”
“그래서 데려왔어.”
“……네?”
“그래서 데려왔다고. 재밌을 거 같아서. 지금도 봐. 알아서 기어 나오잖아.”
“대공 전하.”
미치셨습니까?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억지로 누른 제라미가 한껏 굳은 얼굴로 그를 따랐다. 대체 누가 저 대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지 보겠다는 일념으로.
***
‘언제 나가지?’
아까 들어온 여자들이 아예 자리를 잡고 일하는 통에 에일린은 나갈 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의 틈만 생기면 되는데. 어서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애꿎은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누가 날 찾진 않겠지?’
대공의 아내가 되겠다고 왔지만 중요하지 않은 베타라 지금 없어진 것도 모를 것이다. 집사도 점점 들어왔던 텀이 길었기도 했고.
‘그래도 얌전히 있어야 하는데.’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에일린이 알고 있는 대공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구는 사람이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놀란 음성이 들렸다.
“대, 대공 전하.”
갑자기 들어온 사람이 대공이라는 걸 알자, 에일린은 제 심장이 멈춘 듯 놀랐다.
‘왜 여기에…….’
생각조차도 이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에일린은 다리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해라.”
다른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나가보겠습니다.”라는 말 이후로 존재감이 사라졌다.
“전하. 이곳엔 없습니다. 다른 곳도 살펴보시겠습니까?”
없다는 말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에일린은 제 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핏기가 가신 얼굴일 거라 확신했다. 그만큼 갑자기 들이닥친 대공의 존재에 어쩔 줄 몰랐다.
남자의 질문에도 리하스트 대공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에일린은 이제 반대로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가라. 제발…… 빨리 가.’
“잠깐.”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가깝게 들리자 에일린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조금 늦게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숨소리가 들렸을까 시선을 돌렸다. 보이는 건 하얀 침구뿐인데 마치 리하스트 대공이 앞에 있는 듯 에일린은 희게 질린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