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화 (1/120)

1화. 불행했던 삶

달빛조차 비치지 않아 어두운 가운데 누군가 겁도 없이 산으로 뛰어 들어왔다. 산을 타기에 부적절한 치마를 쥔 그녀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쫓기는 탓에 그녀의 얼굴에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후읏.”

미처 피하지 못한 가지가 볼을 스치자 생채기가 생겨났다. 에일린이 대충 손등으로 피를 훔쳐내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손등에 생긴 상처가 벌어져 피가 더 묻어났다.

“으읏.”

에일린이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몸을 움츠렸다. 언제 구두가 벗겨졌는지 뾰족한 것에 찔린 모양이었다. 고통을 무시하고 올라가고 싶지만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발에 무리가 가지 않게 더듬어 나무에 몸을 기댄 에일린이 거친 숨을 쉬었다. 조금 호흡이 안정될 때 욱신거리는 발바닥을 보려고 상체를 숙이자 옷 안에 있던 목걸이가 흘러나왔다.

가느다란 줄에 매달린 펜던트 목걸이가 에일린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에일린은 오빠 에단의 유품인 목걸이를 쥐며 제게 벌어진 불행을 더듬어 올라갔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에단이 대공과 결혼을 하고부터였다.

에단은 우성 오메가로 발현하며 우성 알파인 대공과 정략결혼을 맺었다. 그리고 일 년이 채 지나가기 전 오빠는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니 처음엔 믿지 못했다. 그러나 오빠에게 벌어진 일을 알게 되었을 땐 더는 그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빠는 대공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온몸이 타오르는 발정열에 괴로워하던 오빠는 결국 대공이 아닌 자들을 받아 열을 식혀내다가 제 처지를 비관하며 생을 마감했다.

에일린은 오빠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직접 발현하고 나서야 알았다.

알파의 페로몬에 발정열이 오른 몸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온몸이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괴로움 속에서 알파의 외면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짐승이 된 기분으로 누구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처참한 기분을 결혼 후 고스란히 경험했다.

원치 않는 관계, 폭력과도 같았던 페로몬 샤워, 불행한 결혼생활로 에일린은 점점 무너져갔다.

“에일린!”

산이 울릴 정도로 큰 외침에 에일린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에일린이 억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발을 움직였다. 한계에 부딪힌 육신이 점점 둔감해지고 있었다.

당장 쉬고 싶지만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에일린은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끼자 에일린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남편, 패트릭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그가 어떻게 지척까지 왔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멀어지려 도망치던 에일린이 튕겨 나가려는 몸을 가까스로 뒤로 뺐다.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가 발밑을 보았다. 휑한 바람 소리와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었다. 그 절벽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던 에일린의 뒤편으로 한 남자가 올라왔다.

“에일린.”

에일린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패트릭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다 도망친 거야?”

“다가오지 말아요”

“알았어.”

패트릭이 절벽을 바라보며 즐겁게 웃었다. 쥐를 구석에 몰아놓고 괴롭히는 고양이처럼 그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이제 도망갈 데도 없네.”

에일린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에일린이 참담한 심정에 습관처럼 제 목걸이를 감싸 쥐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꽤 힘들었어. 에일린. 그러니 얌전히 와서 안기는 게 좋을 거야.”

도망친 아내를 잡으러 온 것과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의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본 에일린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에일린의 몸이 크게 휘청인 걸 본 패트릭이 멈췄다.

“에일린. 잘못하면 떨어져. 어서 와.”

“당신이야말로 오지 말아요. 제발 날 놔줘요.”

에일린이 패트릭에게 간절히 청했다.

더는 그와 살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절규 가득한 하루를 보내며 에일린은 이제 완전히 생기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패트릭은 그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음험한 눈동자로, 에일린의 하얀 피부를 훑었다.

“에일린, 잘 생각해. 당장 기댈 데도 없으면서 뭘 놔달라는 거야. 당신의 부모고 오빠고 다 죽고 남은 건 나뿐이잖아. 그러니 내게 와서 순종해야지.”

패트릭의 말이 가시가 되어 에일린의 마음을 헤집었다.

“혹시 알아? 내가 기분이 좋으면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해 줄지 말이야.”

패트릭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당신 친정 말이야. 누가 무너뜨렸는지 알아?”

에일린이 크게 뛰는 심장을 눌렀다. 듣고 싶지 않은데 이미 그의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리하스트 대공가. 거기서 탐내던 물건이 있었나 봐.”

패트릭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당신의 오빠는 물론 부모까지 다 대공이 죽인 거야.”

에일린이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

“나한테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죽을 때까지 말 안 했을 거 아냐. 그러게 왜 날 건드려. 그러니 얌전히 내 품에 숨…… 조심해!”

“으읏.”

지친 몸이 비틀거리다 뒤로 넘어가는 걸 느끼며 에일린은 제게 손을 뻗은 패트릭과 눈을 마주쳤다. 놀란 듯 한껏 눈을 뜬 패트릭의 당황한 얼굴에 에일린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결국 죽음으로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짧은 생이 이렇게 마무리될 걸 몰랐다. 이제 더는 불행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다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이 생이 후련하진 않았다.

씁쓸한 미련이 남았다.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이 전부 살아 있던 그 시간으로…….

***

에일린이 눈을 깜박였다.

“여긴…….”

살아 있다. 숨도 쉬고 살랑거리는 바람도 느껴지며 생각도 이어갈 수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싶지만 죽은 사람이 꿈을 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더불어 제게 벌어졌던 모든 일을 상상이나 꿈이라 치기엔 지나치게 현실감이 짙었다.

에일린이 버릇처럼 목에 손을 가져갔다. 언제나 만져지는 펜던트 목걸이를 쥐자 조금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일단 하나씩 짚어보자.”

지금 눈을 뜬 방은, 결혼하기 전 그녀의 방이었다. 그리고 거울 속 모습은…….

“……뭐야.”

죽었다 살아난 것도 이상하지만 제 모습이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이라는 게 더 믿을 수 없었다.

“설마 되돌아온 거 아니지?”

“에일린. 언제까지 잘 거야.”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울렸다. 에일린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문을 돌아보았다.

“……오빠?”

에일린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문이 열리며 금발의 남자가 고개를 반쯤 내밀었다. 에일린은 에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금색의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에일린이 매일같이 그리워하던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시간이 되돌아왔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는데 가슴 한구석에서 슬그머니 기대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빠…….”

“언제까지 게으름피울 거야.”

에단이 성큼 안으로 들어와 에일린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살짝 당기니 에일린이 처음으로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뾰족한 것에 찔렸던 발바닥은 아릿한 고통 대신 부드러운 털의 감촉만 느껴졌다.

“오늘 할 거 많다면서 지금까지 늘어져 있으면 어떡해.”

“오늘?”

“그래.”

에단이 에일린의 뻗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그 손길에 에일린이 눈을 감았다. 오빠가 닿아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마지막 확인만 남았다면서, 시간 부족하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말고 어서 일어나지? 케이지 아저씨가 이따 온다고 하셨어.”

케이지 아저씨라는 이름에 에일린이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약을 유통하는 상인인 그와 만나는 날이라니 오늘이 언젠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자 동시에 에일린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쩡하니 굳어버렸다.

에일린이 제 손목을 놓으려던 에단의 손을 도로 잡았다.

“오빠.”

“음? 왜?”

에일린은 에단의 손을 잡은 채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한껏 조바심이 올라 에단의 손을 강하게 잡고 다급하게 방을 나섰다.

“이리 와.”

“어디를 가려고?”

에일린의 장난인 줄 아는 에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에일린은 장난이 아니었기에 더욱더 우악스럽게 오빠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계단을 오르던 에일린이 발이 걸려서 넘어질 뻔하자 에단이 어깨를 잡아주며 조심하라고 말해 줬다. 에일린은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단을 끌고 올라갔다.

“여긴 다락방이잖아.”

에단이 제 머리보다 낮은 천장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의 하얀 얼굴 위로 찬란한 금발이 부드럽게 흘러내려왔다. 이런 와중에도 쓸데없이 예쁜 에단의 얼굴에 에일린이 멍했던 정신을 차리고 다락방의 문을 열었다.

“오빠, 어서 들어가. 그리고 절대 나오지 마.”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거야?”

스무 살인 오빠는 열여덟 살 동생이 하는 말을 단순히 놀이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미성이 에일린의 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거야…….”

지금 오빠를 데려갈 남자가 오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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