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갑자기 찾아온 손님 12017.09.17.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네?”
“적당히 좀 마시지.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셔요?”
“네?”
“됐습니다.”
준서는 화가 난 미간을 모으며 앞을 주시했다.
유정은 시트에 기댄 채 비식 비식 웃고 있었다.
방학 중이었으나 교사 전체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한 해 수고했다는 의미로 12월 30일 저녁에 다 같이 모여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유정은 올해의 교사상을 받았다. 서울시에서도 몇 명 주지 않는 상인데, 신입인 유정이 그 상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학교에 교사 동아리를 만들고 운영한 것, 자기만의 수업을 연구하고 개발한 것이 좋은 평가를 얻어낸 것이었다.
유정은 거의 전교사에게서 축하주를 받았다.
처음에 준서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유정이 다른 남교사들의 술을 다 받아 마시면서 웃는 것을 보자 어느 순간부터 심기가 상해 버리고 말았다.
“술도 잘 못하면서, 다음부턴 적당히 마셔요.”
“네?”
“아닙니다. 도착했어요.”
“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준서는 벨트를 끌러주고 나서 마주 웃고 말았다.
내 여자친구가 너무 잘난 것이 흠이지.
“축하합니다.”
유정은 준서를 마주 보고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잘...... 생겼다.”
그리고 잠시 후 손을 뻗어 준서의 뺨을 어루만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도 압니다, 저 잘생긴 거.”
“키스해 줘요.”
“이거 집에 데려다 줬다가는 내가 또 혼나겠는데.”
데려다주기 싫은 것도 있고.
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도로 벨트를 채웠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도로 방학이었다.
며칠 쉰 후에는 다시 업무를 해야 하지만 매일 출근할 필요는 없었다.
“유정 씨가 너무 취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오늘은 제가 재워줄 겁니다.”
“네?”
“자요, 얼른.”
준서는 망설이다가 유정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혜신은 웃으면서, 진구에게는 교사 전체 연수 갔다고 대충 둘러댈 테니 잘 데리고 있으라고 했다.
자신의 집에 도착한 준서는 유정을 안아 일으켰다. 등에 업은 채로 집에 들어서려다, 그는 함께 살고 있는 불청객을 생각하고 이맛살을 모았다.
자고 있겠지, 늦었는데.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늘어져 있던 성헌이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와? 너무 늦었잖...... 허!”
“가, 저리 가!”
준서의 거절에도 성헌은 아랑곳 않고 그의 등에 늘어져 있는 담임 선생님을 받아 내렸다.
“선생님 오늘 상 받아서 기분 좋으셨나 보다.”
“비밀이다.”
“당연하지, 내가 그런 눈치도 없는 줄 아나. 그런데...... 같이 자게?”
“상관 마.”
“상관은 무슨...... 축하해.”
기어이 성헌은 준서에게 꿀밤을 맞고 입을 내밀며 물러섰다.
“아니 축하한다는데 왜 때려.”
“얼른 부축이나 해.”
“어디로.”
“침실로.”
“그것 봐.”
성헌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식 비식 웃는데 준서는 굳은 얼굴로 유정을 침실로 옮겼다.
이 녀석만 없으면 안고 재워주려고 했는데. 눈치가 보여서 그럴 수도 없잖아.
“나가.”
“알았어. 원하면 오늘은 내가 찜질방에 갈까?”
“시끄럽고, 방에서 잠이나 자. 너 내년이면 고3인 거 몰라? 텔레비젼 보면서 늘어져 있을 때야?”
“알았어, 알았어. 우리 엄마 온 줄 알았네.”
성헌이 투덜대며 돌아갔다.
준서는 침대에 걸터 앉아 바른 자세로 누운 유정을 내려다 보았다.
유정이 감았던 눈을 떴다.
“준서 씨.”
“일어났어요?”
“여기가 어디에요?”
“우리집.”
“왜요? 왜 우리집에 안 가고.”
“유정 씨가 너무 예뻐서 데려왔어요.”
가만히 볼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유정이 비식 웃었다.
“그렇구나.”
“오늘은 여기서 자요.”
“준서 씨랑 같이 자요?”
“나랑 같이 자고 싶어요?”
“네.”
취하니까 솔직해져서 좋군.
“그러고 싶은데, 성헌이도 같이 있어서.”
“문 잠그면 되잖아요.”
유정이 뜻밖에 좋은 의견을 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잠그고 같이 자요.”
에라 모르겠다. 준서는 몸을 굽혀 유정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 싶어?”
“네.”
아이처럼 팔을 벌리는 유정을 안고 준서는 그녀의 목에 코를 묻었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그녀의 취기가 옮아와서 그런가 그도 덩달아 취하는 느낌이 들었다.
“삼촌! 나 잠깐 나갔...... 헉.”
성헌은 무의식적으로 안방 문을 열었다가 놀라 도로 닫고는 살금 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몇몇 친구들과 만나서 놀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현관으로 걸어가는데 안방 문이 열렸다.
“어디 가는데?”
준서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거실로 걸어나왔다.
“아니, 친구들 만나기로......”
“하, 이 새끼...... 야! 너 공부는 도대체 언제 할 거야? 학교 독서실 신청도 안하고.”
“그야 혼자 할 수 있으니까......”
학교에서는 특별히 방학 중에 독서실 건물을 개방하여 신청자 중심으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혼자 할 수 있어? 매일 같이 놀러 나가는 놈이 무슨 정신에 혼자 공부를 하겠다는 거야?”
“오늘까지만 놀 거라고.”
여느 집 부모나 다름 없이 준서도 조카를 볼 때 안타깝고 속이 탔다.
“모의고사 성적 좋다고 자만할 필요 없어. 수시 비중 높아진 거 몰라? 이번에 기말고사 성적 보면 위태롭다고, 너.”
“그야 삼촌이 목표를 한국대로 삼으니까 그렇지. 대한민국에 대학은 많아.”
“듣자 듣자 하니까......”
결국 성헌은 준서에게 헤드락이 걸리고 나서야 내일까지 방학 중 학업계획서를 제출하겠다는 말로 항복을 선언했다.
성헌을 보내고 나서 준서가 쓰러지듯 쇼파에 주저 앉는데 안방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저, 준서 씨......”
목만 살짝 내민 채 유정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준서를 불렀다.
“아, 일어났어요?”
“네, 저, 그런데, 입을 옷이......”
어제 준서는 유정의 얼굴과 손발을 닦아주고 겉옷만 벗겨 재웠다.
속옷 차림의 유정은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 있었다.
“아, 입을 옷이 없겠구나. 사다 줄까요? 어떻게 유정 씨 입을 만한 옷이 하나도 없지......”
학교에서와는 다르게 머리를 긁으며 우왕좌왕하는 준서를 보고, 유정은 크게 웃었다.
“괜찮아요. 전에 제가 입혀드린 체육복이라도 좀......”
“아니 무슨 그런 걸 달라고 해요.”
준서는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티셔츠와 반바지를 찾아냈다. 유정에게는 좀 컸으나 입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됐어요. 있으면서.”
옷을 받고 난 유정은 몸을 숙여 준서의 볼에 입을 맞췄다.
뻣뻣하게 굳은 준서를 보고 유정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부끄러워 해요? 프러포즈도 했으면서.”
“아니, 어제 취한 거 아니었어요?”
“어제요? 나 취해도 다 기억해요. 머리는 좀 어지러웠는데, 준서 씨랑 같이 자고 싶다고 했잖아요, 내가.”
눈을 똑바로 뜨고 하는 얘기에 준서가 공연이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취해서 한 말이 아니었구나.”
“네, 그런데 준서 씨 생각보다 순진하던데요.”
“뭐, 뭐가요.”
“같이 자고 싶다고 하니까 정말 잠만 자는 걸 보면.”
준서는 고개를 저으며 급히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 더 있다가는 이 여자에게 잡아먹혀 버릴 것 같았다.
“왜요, 아니면 취한 여자 취향은 아닌가.”
“아침을 먹죠.”
“차려주시게요? 어제 재워주신 값으로 오늘은 제가 차리려고 했는데.”
“제 집입니다.”
“그러면, 이것만 하고 갈게요.”
유정은 준서를 돌려 세우고는 그를 양 팔로 꼭 끌어 안았다.
“됐어요, 이제 들어갈게요.”
포옹을 풀려고 하는데 준서가 그런 유정을 마주 안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격렬한 호흡이 엉켰다. 그녀의 입 안에 침투한 그의 살이 깊은 곳까지 찌르고 눌렀다.
마주 비벼지는 살의 뜨거움이 그들의 몸을 잠식했다.
천천히 입을 뗀 준서가 유정의 몸을 가슴으로 안았다.
“남자들이 주는 술 다 받아 먹고.”
유정은 불퉁하게 울려나는 목소리를 들었다. 어제는 다른 여교사의 고민을 내내 귀기울여 들었으면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그런 준서 씨도 두 사람만 아주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데요.”
“아, 이진아 선생님이요? 그거야 학급에 문제가 있다니까......”
설마 이 여자도 질투를 했던 건가.
깨닫고 나니 웃음이 났다. 포옹을 푼 준서는 물끄러미 유정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 화나서 마셨다고?”
“화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뭐, 신경은 쓰였죠. 그런 교장 선생님은 제가 술 마시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아니 싫은 것까지는 아니고 나도 신경이 쓰이는 정도.”
“설마, 되게 싫었던 거 같은데.”
“좋진 않았지.”
“정말, 쿨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보면 완전 집착남이야.”
“내가? 내가 집착을 한다고? 하, 나 포스트잍 정도의 끈적임도 없는 남자에요.”
“포스트잍은 무슨. 청테이프거든요. 아, 찐덕찐덕해.”
유정이 준서를 떨치고 나서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준서가 유정을 급히 따랐다.
“이것 봐,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마시지 말라고 했나? 한 마디도 안하고 곱게 차로 모시고 오니까 한다는 소리가 집착남이라니.”
“그럼 끝까지 입 닫고 있었어야죠. 나중에 이러는 거 뭐예요? 나보고 다신 회식도 가지 말라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그랬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참.”
아무래도 괜히 말했나 싶었으나 그래도 이해는 받고 싶었다. 유정을 애써 돌려 세우니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말 화가 난 건가.
“화 났으면 미안해요. 그런데 유정 씨도 비슷한 걸로 신경 쓰였잖아. 그러니까 같은 걸로 치고 서로 마음 풀......”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준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아뇨, 화 안 났어요.”
“그러면...... 설마 나 놀린 겁니까?”
“하하, 강아지 같이 쫓아다니는 게 귀여워서요. 나 술 마셨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내가 신경쓰였어요?”
이 여자가.
준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사람 놀라게 해요? 난 단단히 마음 상한 줄 알고.”
“아뇨, 나는 좋은데요. 나한테 집착해 줘서. 나 혼자 신경 쓴 거 아니라서.”
준서는 손가락으로 유정의 이마를 밀었다. 미세한 주름이 잡히는 이마를 보다가 그 곳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놀려도 사랑스러운 거 보면 내 눈에 단단히 뭐가 쓰였나 봅니다.”
곧게 뻗은 콧망울에, 그리고 볼록한 윗입술에 입을 맞춘 준서는 그녀의 입술 안으로 다시 더운 살을 밀어 넣었다.
작은 웃음 소리가 열기에 묻혔다. 격렬한 숨이 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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