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교장 선생님도 부탁 하나 들어주십시오.2017.09.12.
결국 하준우는 국회의원직에서 사퇴했다.
대국민 사과문을 남긴 그는 아무도 모르게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 곳에서 근신하겠다고 하는 그에게, 근신이 관광이냐는 악성 댓글이 붙었다.
그리고 겨울 방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준서는 강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고별 인사를 했다.
강당은 금세 울음 바다가 되고 말았다. 미리 알고 있던 선생님들도 코 끝이 빨개졌고, 여러 가지로 바뀐 학교에 마음을 붙인 학생들은 안된다며 술렁이다가 끝내 몇몇을 시작으로 울기 시작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단상을 내려온 준서는 그 날 오후까지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만큼 정을 주었었나.
내 모든 것을 걸기는 했었지.
그가 해온 일을 인수인계만 해도 여러 날이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보통의 교장이 하는 일보다 훨씬 많고 다양했기 때문에, 인수인계를 한다고 해도 제대로 업무가 이어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전날에 있었던 교사 전체 회식 때에도 몇몇 교사들이 울면서 제발 가지 말라고 붙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인간적인 정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십시오.”
들어선 사람은 교감 석훈이었다.
애써 표정을 밝게 한 준서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 그게......”
석훈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왜요? 무슨 사건이 터진 겁니까?”
석훈의 표정을 본 준서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학부모 항의 전화가......”
“항의 전화요? 무슨 사건이 터졌군요. 뭡니까?”
얼굴을 굳히며 석훈에게 걸어오는 준서를 보고, 석훈은 곤란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사건은 사건이죠. 교장 선생님께서 그만 두시는 사건이요.”
준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석훈을 피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교장 선생님만 마음 바꾸면 되는 일이죠.”
“제 마음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자연스럽게 응접실 쇼파로 이동한 그들은 마주 앉아서도 서로 곤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제가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 줄 아십니까?”
석훈이 내내 참았던 한숨을 뱉었다.
“이제까지 교장 선생님께서 하셨던 일, 정리해서 대충 업무 파악해서 몇몇 오실만한 분들에게 보여 드렸더니, 대개 이런 반응입니다. 이걸 왜 다 교장이 하냐고요. 열 개가 있으면 그 중에 한 두 개 할까 말까, 그나마 평판 좋으신 분들 반응이 이렇습니다.”
준서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묵묵히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교장 선생님 가시면 학교 절대로 현상 유지 못합니다.”
“그래도 좋은 분들 계실 겁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분들이 좋은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그러세요. 이거 다 하면 하루도 못 버틴다고요. 정말 전임 교장 선생님이 이 업무들을 다 하셨냐고 저에게 물으시던데요.”
“교감 선생님이 도와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준서의 눈이 석훈의 얼굴에 화살처럼 꽃혔다.
“제가요?”
“네, 교감 선생님은 저와 함께 하셨던 분이니 분명히......”
“대부분 교장 선생님께서 주도해서 하신 일이고 저는 돕기만 했죠. 저도 혼자서는 못합니다. 이건 오실 분들의 잘못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 잘못입니다. 일을 이렇게 벌이고 그만 두시면, 학교는 혼란스러워지고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될 겁니다.”
준서는 눈을 내리 깔았다.
석훈의 곤란함을 모르지 않았다. 준서 스스로가 생각해도 일을 너무 많이 벌렸다. 현재 학교에서 하고 있는 사업 대부분을 그가 주도하고 있었고, 그것이 새 교장에게 인수인계가 잘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인수인계가 안 되면 그야말로 그 화는 교사들과 학생들이 다 뒤집어 쓰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전화통에 불이 날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집에 연락을 했는지, 왜 그만두신다는 거냐고 계속 물으십니다. 심지어 교장 선생님 가는 그 학교로 학생 전학 시킨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
준서의 눈이 붉게 젖었다.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으나, 더 이상 해줄 수 없는 것이 미안했다.
깊이 한숨을 내쉰 준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공정하지 못한 임용을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교사 채용은 공정하게 한다고 하면서 교장 채용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되죠.”
석훈은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런 준서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석훈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공정한 채용 절차를 거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교감 선생님이 주도해서 교장 채용 공고부터 내고......”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도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면, 어쩔 수 없죠.”
석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에, 교장 선생님도 부탁 하나 들어 주십시오.”
“무슨 부탁입니까?”
석훈은 눈을 빛냈다. 준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교장 선생님을 아예 교사들에게 오픈해서 공개 채용한대. 이거 지금 교장 선생님 생각일까? 이제는 놀랍지도 않네.”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을 보고 수연이 턱을 긁었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하고 아쉬운 감정은 여전했다.
“교사들이 질문하고 마지막에는 투표로 결정한다는데, 이거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 같다? 제 선택은 요, 그런 거 하는 거니?”
수연은 여전히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정은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들의 곁으로 전보다 훨씬 밝아진 상우가 다가섰다. 수연이 상우를 손짓하고 게시판을 가리켰다.
“상우 쌤, 상우 쌤도 이거 봤어? 교장 공개 채용.”
“네, 아까 봤는데 되게 신기하더라고요. 원래 교장 선생님을 이렇게 채용하는 건가요?”
“이렇게 채용하는 게 어딨어, 우리학교가 표준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돼.”
수연이 소리 높여 웃었다.
“채용 과정은 신기하지만, 그래도 저는 서운합니다.”
상우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소처럼 크고 순한 눈이 금세 눈물로 채워졌다.
처음 준서가 사직 의사를 밝혔던 회의실에서도, 그리고 학생들을 상대로 이야기했던 강당에서도 상우는 눈물을 보였었다.
“계속 같이 있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배신이에요.”
“상우 쌤만 그 생각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해. 교장 선생님 성격 알잖아. 아닌 건 아닌 거. 지금 학부모 항의도 엄청나다는데.”
수연이 입맛을 다셨고, 유정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 애인 생각은 어떠신가.”
수연이 유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시잖아요. 애인도 어쩔 수 없는 고집쟁이라는 거.”
“그러면서 웃는 건 뭐지? 남친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
수연이 놀리자 유정이 팔꿈치로 수연의 옆구리를 가볍게 밀었다.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에 출근이라니.”
회의실은 아침부터 술렁였다.
교장 공개 채용 날이었다.
방학 다음 날이었으나 교사들은 전원 출근했다.
단상 앞에는 커튼이 설치되어 있었다.
“면접은 블라인드 면접으로 이루어집니다.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얼굴도 볼 수 없어요. 하는 이야기만 듣고 뽑으셔야 합니다.”
석훈이 말했다.
정말로 공개 오디션 현장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교장이 떠나는 것은 아쉬웠으나, 이런 신선한 방식의 채용은 처음이라 교사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흥분을 달랬다.
“그런데 오늘, 교장 선생님은 안 오시는 건가?”
수연은 커피를 홀짝이다가 유정을 돌아보았다. 유정의 눈은 쓸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야 정말로 준서를 떠나보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봐요.”
“유정 쌤이 모르면 어떻게 해. 무슨 말 없었어?”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에 통화를 했지만 별 말은 없었다. 오늘 출근이라고 하니 출근 잘 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채용 심사에 참여할 필요는 없죠. 어차피 가실 분이니.”
“냉정하긴.”
술렁임이 잦아들었을 즈음, 첫번째 남자가 들어섰다.
교사들은 그의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인사를 했다. 음성 변조 기능이 있어 목소리는 헬륨 풍선을 마신 듯이 높고 이상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난 후, 교사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학교에서 하고 있는 일 중에 주요 업무 다섯 가지만 말씀해 보시고, 그것이 왜 주요 업무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교사가 학부모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을 경우,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까지 하신 일 중에 가장 학교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하신 일이 있습니까?”
질문은 하나같이 날카로웠으나 그 질문에 대답하는 지원자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생각해 본 것인 듯이 중언부언 하기도 하고, 어쨌든 학교를 잘 이끌어 나가겠다는 목적 없는 포부를 보이기도 했다.
첫 번째 면접이 끝나고 지원자가 나가자, 회의실은 전보다 더 술렁였다.
“우리 학교에서 하는 일을 잘 이해 못하는 거 같은데.”
“당연하지. 하는 일이 한 두 가지인가. 보통 학교에서 근무했던 경력 가지고는 적응하는 데만도 한참 걸릴 걸.”
석훈의 예상대로였다. 워낙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지원자들은 그 일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새로 채용되는 사람이 교사라면 적응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우면 되는 일이었지만 교장인 경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추진력 있게 끌고 나가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지원자가 들어와서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앞서의 지원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에 교사들의 얼굴은 짙은 실망의 기운이 덮였다.
이러다가 결국 아무도 뽑지 못하는 건 아닐까.
마주보는 눈 속에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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