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제 조카는 제가 봅니다.2017.09.11.
본가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어서도 그랬지만, 묻어두었던 문제가 드디어 터진 것도 그랬다.
-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같이 가줄까?
사랑스러운 여자는, 오늘도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없는 용기를 쥐어 짜게 만들었다.
자신이 해결할 일이라고, 유정을 애써 다독이고 난 후 준서는 집을 나왔다.
오늘 새벽 사건이 터졌다. 국회의원 하준우의 성스캔들 사건이었다.
잘 나가는 젊은 정치인이며, 청년 정치의 시대를 열어가는 인물로 주목을 받았던 터라, 사람들의 충격은 엄청났다.
준서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모임에 준우는 오는지 오지 않는지 모르지만, 아버지 태균이라면 이 상황 자체를 못 견뎌할 것이었다.
가만히 있는 준서에게 불똥이 떨어질 지도 몰랐다.
어찌되었건, 준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내내 고민하던 것을 이제는 이야기 해야 할 시점이었다.
“안녕하셨어요.”
준서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일하던 아주머니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이미 아침부터 시달릴 대로 시달린 얼굴로 희미하게 마주 웃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안에 계십니까?”
“아휴, 조금 있다 들어가. 난리 났어, 아주.”
예상대로 아주머니는 진저리를 쳤다.
준서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조금 있다 들어가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들어갈게요.”
준서는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아버지의 서재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준서입니다.”
“들어와!”
태균은 책상 앞에 앉아 씩씩대다가 준서가 오자 벌떡 일어섰다.
“너는, 너는 대체 뭐하고 있었던 거야!”
태균의 검지 손가락이 준서를 찌르듯이 겨누어졌다. 예전 같으면 용서부터 빌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 준서는 묵묵히 상대를 마주 보았다.
“어? 네 형이 저러고 다니는데...... 듣자하니 너는 또 무슨 파혼을 했다고. 아버지는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하던데 그거 네가 사고친 거지? 형제가 원 똑같이!”
“형은, 어디 있습니까?”
준서는 피곤한 눈을 깜박거리며 무심한 투로 물었다.
“뭐?”
“제가 책망받을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준서는 태균의 눈을 마주했다. 태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 너 지금 뭐랬어!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지금 아버지가 네 뒤 봐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어?”
성큼 성큼 준서에게 걸어오는 태균을 보고서도, 준서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네 할아버지가 널 그렇게 가르치대? 아버지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대들라고?”
“아버지.”
손까지 번쩍 쳐드는 것을 보며 준서는 미간을 모았다.
“지금 잘못한 건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까지 불러서 뭘하려고 하신 거예요? 그것부터 말씀을 좀 하세요. 화풀이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한 건 네가 아니라니. 네가 처신을 잘했으면 준우한테 그런 일이 생겼겠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준서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 순간 태균의 손바닥이 준서의 옆머리를 내리쳤다.
“뭐가 잘났다고 웃어?”
준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왜 때리십니까? 저는 형과 최근에 연락도 한 적 없어요. 몇 달 전에 성헌이 일 때문에 몇 번 이야기 나눴던 게 답니다. 아버지도 저랑 형이랑 별로 안 친한 거 아시잖아요?”
“그래, 넌 잘못한 게 없다 이거냐?”
“자꾸 이런 식이면 돌아가겠습니다. 화풀이 대상으로 삼으려면 부르지 마세요.”
준서는 몸을 돌렸다. 그제야 태균의 눈이 흔들렸다.
자식 농사를 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준우가 돌아선 곳에 준서라도 남아 있어 주길 바랐다.
“어딜 네 마음대로 가?”
자신이 한 실수는 생각하지 않고, 준서에게 다시 언성을 높였을 때였다.
“저, 전화 왔는데요.”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조금 전 준서와 인사를 나눴던 아주머니가 전화기를 가져다 주었다.
전화를 받은 태균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가 뭐라고 대답을 하고는 전화기를 준서에게 넘겨 주었다.
“할아버지다.”
준서는 두 손으로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할아버지.”
- 네 아버지에게도 말했는데, 너도 지금 당장 집으로 오거라.
“알겠습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준서는 전화를 끊었다.
태균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입술을 잘근 잘근 씹고 있었다.
아버지 태균과 어머니 정희, 그리고 준서가 나란히 윤택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준우가 왔다는 연락이 왔다.
“못난 것.”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윤택이 무거운 입을 뗐다.
준우는 파리한 얼굴로 들어섰다. 고개를 들어 마주하는 준서의 눈조차 피하고, 그는 구석에 무릎을 꿇었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너 때문에 소집된 거 안 보이냐?”
윤택이 다그치자 준우가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원인이 없었다고는 못하겠지. 보니까 동영상도 돌던데 말이다.”
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는 비서였다. 관계는 꽤 오래 지속되던 것이었다.
침대에서 몇 번, 준우는 자신이 곧 아내를 버리고 그녀에게 가겠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준우가 선택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자신이 가진 동영상을 공개해 버렸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준우는 한참 후에야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정에서 제 역할 하나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엄숙한 꾸짖음이었다.
준서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윤택이었으나, 원래 성정은 불같은 그였다.
고지식한 준서가 자신과 잘 맞아서 더 정을 준 것이기도 했다.
“에미는 일단 에미 친정으로 보냈다. 성헌이는 준서네 간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고.”
“아, 그렇습니까?”
준서는 처음 듣는 말에 몸을 떨었다.
집을 치우고 왔는지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저분해서가 아니라, 유정의 흔적이 남겨져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성헌은 물론 둘의 연애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별로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왜, 안되면 내 지금이라도 성헌이가 갈만한 다른 곳을 알아보고.”
“아닙니다.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준서는 옅게 새어나가는 불만을 어쩌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유정의 집에는 가족이 있어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은 준서의 집 뿐이었는데, 성헌이 준서의 집을 차지하면 곤란했다.
교사와 학생 사이였으나 유정과 성헌이 지나치게 가까운 것도 준서는 불만이었다.
준서는 엉뚱한 생각을 애써 밀어넣고 고개를 앞으로 했다.
“겨우 아들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해서 집안을 풍비박산을 만들고. 대체 정신 머리가 있는 거야? 응?”
윤택의 꾸짖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숨쉬기도 힘든 적막 가운데 준우는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없이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너, 태균이.”
윤택의 눈이 아들을 바라 보았다. 잔뜩 언짢은 표정으로 잘근 잘근 입술을 씹던 태균이 윤택을 보았다.
“이게 결국 네가 자초한 일이다. 네가 아들을 이렇게 키운 게야.”
“아버지, 그렇지만 장성한 아들까지 제가 단도리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회초리를 들 수도 없고.”
“엇나가면 그리 해서라도 바로 잡았어야지. 이게 처음이 아니지 않으냐.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도 이런 일 있어 내가 잘 단도리 하라고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 때는......”
태균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윤택의 말이 맞았다. 그 때에, 태균은 어떻게든 사건을 덮는데 급급했었다.
“그리고 그것 뿐만이 아니다.”
윤택은 내내 참고 참았던 말을 꺼냈다.
“준우가 은밀하게 사람 만나고 다니고, 뇌물 받고 공정하지 못한 일을 했던 것, 너는 몰랐다고 할 수 없겠지. 그걸 막아준 결과가 이거다. 준우 뿐만 아니라 온 집안에 망신살이 뻗쳤어.”
태균은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얼굴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너는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에게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거다. 그래서 잘못을 해도 감추려고 하고 제대로 훈육도 하지 않았어.”
꾸지람은 한참을 이어졌다.
준우도 태균도 잔뜩 민망한 얼굴을 숙인 채 묵묵히 듣고 있는 도리 밖에는 없었다.
“어머, 너 여기 와 있었어?”
준서가 기분이 별로일 것을 예상해서 장을 봐서 들고 온 유정은, 쇼파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을 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곧, 오늘 그의 아버지에게 일어난 엄청난 일을 떠올렸다.
피해 왔었던 모양이구나.
“네, 제가 방해를 했나 보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성헌은 별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해는 무슨. 까르보나라 좋아해?”
“까르보나라 해주시게요? 와!”
“좋아한다니 다행이다. 얼른 해줄게.”
“그런데 삼촌 오면 해야 하지 않아요?”
“언제 올 줄 알고. 우리끼리 먹고 있다가 나중에 오면 또 해주면 돼.”
유정은 안쓰러운 기분으로 성헌을 살폈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 곳에서라도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런데요.”
성헌이 슬금 슬금 다가왔다. 유정은 우유와 생크림을 꺼내고 재료들을 정리하다가 성헌을 돌아 보았다.
“응? 왜?”
“프러포즈는 받았어요?”
도발적인 눈빛에 유정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런 건 왜 궁금한데.”
“하, 궁금한 게 당연하죠. 삼촌이 절대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런 쪽으로는 제가 좀 불안해서 말이죠.”
“해도 되고 안해도 돼. 이미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마.”
유정의 말에 성헌이 두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아, 진짜, 이럴 줄 몰랐어, 유정 쌤!”
“부러우면 너도 연애하든가.”
“선생님이랑 하고 싶었는데.”
성헌이 지나가는 말로 하고 나서는 몸을 돌렸다.
“이거 씻는 거예요? 샐러드 하실 거예요?”
양상추를 집어들고 묻는 성헌의 등을 유정의 손이 매섭게 때렸다.
“진짜 못하는 말이 없어, 너!”
“아, 진심인데. 제가 삼촌만 아니면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지금은 축하해 드리는 도리 밖에는 없죠. 이거부터 씻을게요.”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성헌은 양상추를 씻기 시작했다.
유정은 웃으며 우유와 생크림을 적당량을 섞고 베이컨을 꺼내 잘랐다.
문소리가 난 것은 그들이 한창 음식 준비에 몰입하고 있을 때였다.
유정은 후라이팬 위에 삶은 스파게티면을 투하하다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몸짓에 바짝 긴장했다.
“서, 성헌아, 이건 장난이라기에는 좀......”
그러나 유정을 안은 남자는 대답 없이 거친 숨소리만 냈다.
유정이 뾰로통하며 몸을 돌렸다.
“소리 좀 내고 다니죠?”
“성헌인 줄 알았나?”
“아니 누군지 밝히지도 않아 놓고서.”
그녀의 뾰족한 입술 위에 준서의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 이게 성헌이를 위해서 준비하는 음식인 거죠?”
질시 어린 눈빛에 유정의 눈이 반이 접혔다.
“네, 준서 씨 것은 없는데.”
“하아, 내 집에서 이게 뭐하는 겁니까.”
토라진 표정을 하면서도 준서는 유정의 몸을 놓지 않았다. 뒤에서 소리가 들릴 때까지.
“이거, 샐러드 다 됐......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고, 앞으로 많이 볼 장면이니까 적응해라, 알아서.”
준서는 천천히 유정의 몸을 놓았다.
“그럼, 나도 안아도 돼?”
일어서서 다가오는 성헌의 이마를 준서의 손가락이 밀었다.
“까분다.”
“뭘 생각하는 거야.”
성헌의 몸이 준서의 몸에 안겼다.
유정이 몸을 돌렸다.
“내가 삼촌 여자 건드리는 그런 이상한 놈일까봐.”
“징그럽게 왜 이래?”
“많이 혼났어? 미안해. 우리 아버지 때문에.”
준서가 손을 들어 성헌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난 안 혼났어. 네 아버지랑 내 아버지가 많이 혼났지. 당분간 네 아버지는 근신하고 있을 것 같다.”
성헌이 천천히 포옹을 풀었다.
“그래야지, 그 인간은.”
성헌의 눈에 어리는 고뇌를 묵묵히 보던 준서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네 인생이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결국은 타인이야.”
성헌이 흔들리는 눈을 들었다.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 할 도리 하고 살면 돼.”
“삼촌은......”
성헌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나 버리지 마.”
말 끝에 울먹임도 조금 섞인 것 같았다.
“내가 널 왜 버려? 하는 소리 하곤. 지금 너 때문에 데이트도 못하는 거 안 보여?”
준서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하며 성헌의 등을 툭 쳤다. 그 바람에 흘러내린 눈물을 성헌이 훔치고 멋쩍게 웃었다.
“자, 더 시간을 드리고 싶지만 파스타는 얼른 안 먹으면 면이 불어요.”
유정이 웃으며 다가왔다. 성헌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성헌이 유정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을 때 성헌의 손을 쥐고 있는 사람은 준서였다.
“제 조카는 제가 봅니다.”
“제 학생이거든요.”
“아, 진짜. 알았어요. 빨리 먹어요, 배 고파요.”
성헌이 질린 듯이 두 사람의 손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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