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96화 (96/102)

96. 준서 씨가 우리 진짜 가족 된 거 같아서.2017.09.09.

“뭐?”

식사를 마치고 나서 준서가 꺼낸 이야기에 분위기가 깊게 가라앉았다.

“아니, 자네 그러면 유정이랑 결혼 생각은 없었던 거였나?”

대번에 그 말이 튀어 나왔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데 결혼 앞두고 없는 직장도 만들어야 할 판에 있는 직장을 관두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대체.”

진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자고로 여자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야 결혼을 비로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진구였다. 까닭에 아직도 유원과 수정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준서가 집에 돈이 많건 없건은 진구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느냐 마느냐가 그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었다.

“비틀린 일을 바로 잡는 일입니다. 결혼을 하면 한 사람의 책임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어른으로서 부끄럽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자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거 아닌가. 지금 자네가 그만큼 노력을 해서 학교를 안정적으로 이끌지 않았나. 자네가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일을 하려는 건가.”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준서는 공손하긴 했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불안해진 혜신은 일단 돌아가고 나중에 오라고 눈짓했으나 두 사람 모두 말을 그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가, 자네 다시 볼 일 없으니까 가! 내 참.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인 줄 몰랐네.”

결국 진구는 역정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아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시 볼 일 없다니.”

유정이 소리쳤으나 진구는 화가 난 얼굴 그대로 유정을 보고 소리쳤다.

“너도 이 녀석 그만 만나라. 이런 말 안 통하는 녀석이랑 결혼해봤자 너만 힘들어. 언제까지 맞춰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빠 말 듣고 헤어져라.”

“아빠!”

울먹이는 유정을 혜신이 부드럽게 달래고는 진구에게 다가갔다.

“당신, 지금 흥분했어요. 들어가요. 나중에 또 오라고 하고 얼른 들어가요.”

“오긴 뭘 와! 오지 마! 내 집에 발 붙여봐, 다시!”

씩씩대는 진구를 겨우 달래서 방에 들여보내며 혜신은 유정에게 눈짓했다.

그 때까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준서를 유정이 달랬다.

“준서 씨, 다음에 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아빠 화가 많이 나셔서.”

“그래요, 갑시다.”

준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준서는 이미 닫힌 안방 문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들고 몸을 돌렸다. 다시 밖으로 나올 때까지 유정도 준서도 말이 없었다.

“괜찮아요?”

주차장에 와서 유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준서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아휴, 고집이 너무 세요. 자기 생각한 걸 버리지를 못해서. 나도 답답하네요.”

“내가 죄송하죠. 나도 고집이 센 편이니까.”

준서가 유정의 손을 단단하게 잡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해서.”

“아뇨. 시간 지나면 풀릴 거예요.”

“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풀리겠죠.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고. 또 바로 다음 직장을 구할 생각도 없어요. 당분간은 쉬면서 재충전할 생각이라서.”

“그럼, 직장은 이제 안 다닐 생각이에요?”

준서는 묵묵히 허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시 평교사로 갈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교육 쪽으로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내가 미국에서 공부한 건 수학 교육이었는데, 교육 행정에 대해서도 일해보니까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나는 준서 씨 원하는 거 다 지지해요. 설득하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나하고 준서 씨하고 같이 포기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따뜻하게 쥐어지는 손을 잡고 준서는 물기 묻은 눈으로 유정을 바라 보았다.

“내가 믿었던 분이라 실망했던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고.”

준서는 발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요?”

유정이 놀라서 준서를 따라 걸었다.

“다시 말씀드리려고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준서가 말했다.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뭘 다시 말씀드려요? 지금 화 나셨다니까. 다음에 와요.”

“지금 내가 가면, 그 뒷감당 유정 씨가 다 해야 할 거 아니야. 걱정 마요.”

유정의 머리를 가볍게 넘겨주고 준서는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래서, 아빠 때문에 그러면 준서 씨 뜻을 굽히겠다는 거예요?”

“그러진 못하지만, 그래도 빌어봐야죠.”

“소용 없다니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면서도 유정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다시 집에 이르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혜신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왜 또......”

“뭐야?”

안방에서 거실로 나와 있던 진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무례한 것 같아 다시 돌아왔습니다.”

준서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진구가 손을 들어 삿대질을 했다.

“내가 아까 하는 말 뭘 들었어? 다신 오지 말라고 했잖아! 당장 나가, 썩 나가!”

“아버님.”

준서는 진구에게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걸어갔다.

“누가 아버님이야?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면서 무슨 아버님이야!”

“제가 아버님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마주하는 혜신과 유정의 눈빛이 묘해졌다.

진구나 준서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어쩐지 토라진 연인을 달래는 모양 같았다.

“제가 의지할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과 대화할 때는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여러 해주신 이야기들도 깊이 새겼고요. 그리고 지금도, 아버님은 제 아버님이십니다.”

진구가 손가락을 내렸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눈으로는 여전히 준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뜻대로 하지 않아 서운하신 것 압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제 뜻을 다 알아주지는 못하셔도 제 마음만은 알아 주십시오. 서운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준서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던 진구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누구 마음대로 가?”

준서의 걸음이 멈췄다.

“서운하게 한 거 알면서 왜 그냥 가? 자네 할 말만 하면 그만인가?”

준서가 돌아섰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였어. 나도 아들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단 말일세. 자네와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는 게 즐거웠고...... 그런데 무책임하게 직장 관둔다는 말이나 하고.”

“죄송합니다.”

“사과만 하면 뭘 하나. 그렇다고 다시 마음 바꾸진 않을 것 아니야.”

준서는 묵묵히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유정이랑 살면서도 그렇게 별안간 돌발 행동을 할까 걱정이 됐어. 내 뜻이 이렇다고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단 말일세.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직장 관둔다고 하니 내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어. 날 이해하겠는가?”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순순히 하는 고백에 진구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면 하나만 약속하게.”

준서가 눈을 들어 진구를 마주 보았다.

“결혼하고 나서는 이렇게 갑자기 통보하지 말게. 충분히 얘기하고, 유정이하고도 마찬가지고. 알겠는가?”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그 점에서는......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같이 상의하고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하겠습니다.”

“이리 오게.”

진구가 손을 들어 손짓했다. 준서가 가까이 다가가자, 손을 들어 준서의 등을 가볍게 내리쳤다.

아프기 보다는 놀라서 준서가 아, 소리를 내며 몸을 숙이자 진구가 들었던 손으로 그의 등을 가볍게 매만졌다.

“내 아들이었으면 이 정도로 안 그쳐.”

“더 때려 주셔도 됩니다.”

준서의 입술 끝에 매달린 웃음을 보고 진구가 손을 들어 준서의 등을 한 번 더 내리쳤다. 그리고 그의 몸을 당겨 가볍게 끌어 안았다.

“우리 애 속썩이지 마. 그러면 진짜 그 땐 자네 용서 못하네.”

“약속드리겠습니다.”

혜신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젓다가 유정을 보았다.

“내가 사위한테 질투를 하기는 처음이네.”

“그러게. 나도 내가 질투를 해야 하는 건지 내 포지션을 잘 모르겠어요.”

포옹을 풀고 진구가 혜신을 보며 말했다.

“저, 사위랑 한 잔 해야 하니까 술상 좀 봐.”

“조금 전에는 오지도 말라면서. 알았어요.”

혜신은 일부러 삐쭉하게 입을 내밀고 대답했다. 유정은 그 옆에서 빙긋 웃었다.

진구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준서의 팔을 잡고 안방으로 끌었다.

“괜찮아요?”

밤까지 술을 마신 준서는 약간 알딸딸한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답했다.

“아니.”

“아까도 그렇고 우리 집에 오면 계속 안 괜찮네요.”

“지금은 다른 이유로. 그런데 아까 내가 너무 좀 그랬나?”

술을 마시고 기분이 조금 풀린 준서는, 실은 아까 서운했다며 진구 앞에서 주절 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어쩌다 보니 부모님과의 이야기와 할아버지와 형과의 일도 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진구는 그의 등을 두들겨 주며 달래 주었다. 자신도 가정에서 외로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만큼 훌륭하게 자라 뿌듯하다고 격려도 해 주었다.

“아뇨. 보기 좋았는데요.”

“술 깨고 나면 뵙기 너무 민망할 거 같은데.”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유정이 준서의 몸에 안겼다.

“왜.”

“그냥, 준서 씨가 우리 진짜 가족 된 거 같아서 좋아서.”

“나도.”

준서가 물기 묻은 음성으로 말하고 유정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회의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 보았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준서는 마지막으로 깊이 허리를 숙인 후 단상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준서의 움직임을 막았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어선 사람은 뜻밖에 정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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