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이 날을 위해서 다 준비해 온 겁니다.2017.09.08.
“중대 발표라뇨?”
유정은 운전을 하다가 옆자리에 앉은 준서를 힐끔 바라 보았다.
그러나 준서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피곤에 젖어 있었다.
“아니, 말 한 마디 툭 던져놓고 모른척 하는 거예요?”
“유정 씨도 크리스마스에 말한다면서.”
“아, 복수하는 거구나. 그럴 줄 알았어. 은근히 속 좁은 거 알고 있었는데 역시 좁아요.”
유정이 웃기 시작했다. 천진한 웃음을 보던 준서도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유정의 집 앞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유정에게 먼저 말하고 싶다고 했다. 유정은 또 결혼 이야기겠거니 생각하고 가볍게 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니, 학교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가겠다는 거예요? 무책임하게?”
“말했잖아요. 오래 생각해 왔던 일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유정의 눈가가 젖어 왔다.
준서는, 사랑하는 연인이기 이전에 그녀에게는 존경하는 상사였다.
그래서 진심으로 서운했다.
그녀가 행복하게 일하게 만들어준 사람이, 직장에서도 자신의 뜻을 펼치며 재미있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난다니.
“어차피, 이 날을 위해서 다 준비해 온 겁니다.”
준서는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유정을 안아 주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선생님들과 잦은 면담 시간을 가졌던 것도, 선생님들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하도록 만들었던 것도, 그리고 그런 선생님들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애썼던 것도.”
준서의 손이 유정의 등을 다독였다.
“제가 떠나도 모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한 거였어요.”
“그래도 그건 아니죠. 안 떠나셔도 되는 거잖아요. 새 사람이 와서 다 망쳐놓으면 어떻게 해요!”
유정이 준서를 뿌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잖아요. 교장 선생님 한 분의 영향이 얼마나 큰 지. 교장 선생님 처음 오신 때하고 지금하고 바뀐 거 보면 아시지 않아요? 선생님들 마인드도, 교무실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일 안하는 부장 선생님들이 큰 소리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일 안하면 찬밥 신세에요. 심지어 그 정인기 부장님도 요즘은 수업 준비를 한다는 소문까지 있다고요.”
정인기, 라는 말이 나가자 준서의 입이 벌어지며 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는 점차로 교무실 안에서 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교사들의 모임과 연구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와 같이 일 안하고 놀고 먹는 교사들은 점차 찬밥 신세가 되어간 것이었다.
일은 안해도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정인기는, 더 이상 윤택도 자신의 편이 아닌 것을 알자 어느 날 준서를 홀로 찾아왔다.
목소리와 태도는 여전히 딱딱했으나, 그 내용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거, 전공이 수학이었다고 하니, 뭐 요즘 수학 교재로 좋은 거 있으면 추천 좀 해보세요.”
“교과서 있지 않습니까?”
“아니, 참 말을 못 알아듣네. 누가 요즘 교과서 봅니까? 잘 나가는 문제집이요.”
“교과서가 기본이 되어야죠. 응용 문제 하나라도 더 푸는 것보다 개념 한 번이라도 더 보는게 낫다는 게 제 생각이어서요. 교과서로 기본을 다지지 않으면......”
“아, 내가 설교 들으러 온 건 아니고.”
그렇게 무례한 방문을 한 인기였으나, 준서는 그가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는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수업을 혼자 진행해서 원성이 자자했는데, 이제는 조금씩 수업 연구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게 다 어떻게 이뤄낸 건데요. 그런데 여기서 또 교장 선생님이 바뀐다고요?”
“좋은 분이 오실 거예요.”
“어떻게 장담해요? 작년의 그 분이 안 오신다는 보장이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르게 말하는 유정을 물끄러미 보던 준서가 그녀를 달래듯 머리를 가만 가만 쓰다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분은 못 오실 겁니다. 앞으로는 교장도, 교사처럼 공정하게 임용하게 될 거니까요. 교감 선생님 생각 바르시고 좋으신 분이에요. 좋은 분 오실 거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유정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잔뜩 상한 심기를 어떻게 달래야 할 지 몰라 준서는 묵묵히 유정의 옆모습만 바라 보았다.
“그리고, 내가 교장 그만 둔다고 했지 유정 씨 애인 그만 둔다는 건 아니었는데.”
잠시 후, 준서는 장난기 묻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유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라고요?”
“그래서 허락 구하는 겁니다. 내가 교장 아니고, 백수여도 괜찮냐고.”
“아, 진짜, 이 남자 한다는 소리가!”
유정의 손이 번쩍 들렸다. 잔뜩 긴장한 준서를 보고 유정이 입술을 깨물며 손을 내려 준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얼굴을 가까이 당기고 입술에 입술을 대었다.
“내가 가장 화나는 게 뭔지 알아요?”
잔뜩 소리를 죽인, 그러나 생생한 감정이 느껴지는 어투로 유정이 준서의 입 바로 앞에서 입을 열었다.
“뭔데?”
“아무리 이렇게 속을 썩여도, 난 준서 씨가 좋다는 거죠.”
입과 입이 다시 뜨겁게 만났다. 그 안의 살덩이가 부벼지면서 유정의 몸이 준서의 위에 쏟아졌다.
“근데 정말 얄미워. 다시 생각해 줄 순 없는 거죠?”
키스를 마친 유정이 준서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은 채 간절하게 말했다. 준서의 눈이 쓸쓸하게 웃었다.
“난 한 번 결정한 건 잘 안 바꾸는 편이라. 하지만 이렇게 말하니까 진심으로 흔들리네.”
유정이 준서의 얼굴을 놓았다. 그리고 두 팔로 그 얼굴을 안았다.
“왜 늘 이렇게 쉬운 길 버리고 어려운 길만 갈까. 나는 같이 가주는 수밖에 없지만. 나는 늘 준서 씨 편이에요.”
“나, 좀 울어도 됩니까.”
“자주 울면서. 편하게 해요.”
준서는 운다는 말과는 달리 유정의 품에서 키득거리다가 고개를 들고 그녀의 입과 혀를 삼켜 버렸다.
차 안이 뜨거운 김으로 덮였다.
“어머, 준서 왔구나. 아니 왜 말도 없이. 찬거리도 없는데.”
혜신은 준서를 보자마자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아닙니다. 드실 것은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
준서는 손에 들린 봉투를 내려 놓았다. 곧 초밥 도시락과 갖가지 예쁜 디저트 세트들이 그의 손에서 식탁 위로 놓여졌다.
“어머나, 이걸 다 사온 거야?”
늘 몸만 오라면서 준서의 앞에 진수성찬을 차리는 혜신이었다.
“엄마 초밥 좋아한다고 했더니.”
“자네 왔는가?”
마침 집에 있었던 진구도 반갑게 웃으며 준서를 보았다. 준서는 평소와는 다른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 아버님.”
“내 자네 오면 보여주려고 오려둔 게 있는데.”
요즘 진구는 준서와 토론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신문을 보다가도 괜찮은 기사가 있으면 오려 두었다가 보여주고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아, 네.”
“자네도 보면 놀랄 거야. 참 바둑판도 바꿨어. 지난 번에 그건 내가 커피를 쏟아서. 유원이 녀석이 인터넷으로 주문했는데 저번 것보다 괜찮아.”
“아빠는 이제 나는 안 보이죠?”
유정이 서운한 듯이 입술을 내밀었다. 진구는 유정을 보고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 내가 내 딸이 왜 눈에 안 보여, 허허......”
“얼른 와서 먹어요. 와, 진짜 신선하네. 어디서 샀어?”
초밥 도시락을 늘어놓고 식구들이 둘러 앉았다.
“오늘 안 그래도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당신도 좀 본 받아요.”
“뭐? 내가 뭘?”
혜신이 진구를 가볍게 타박하는 것을 웃으며 보고 있던 유정은 서늘한 분위기에 고개를 돌렸다.
준서는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어서 먹어, 응? 많이 피곤하지? 유정이 얘기 들으니까 늘 일이 많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일이 많지, 하서방은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지 않나. 허허...... 그런데 자네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네. 정 피곤하면 식사만 하고 가게.”
“아닙니다. 실은, 식사 마치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준서의 고개가 들렸다. 마주하는 진구는 그가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 채고 미간을 살짝 모았다.
“할 얘기라니? 뭐 우리 사이에 전화로 해도 되는 걸. 혹시 그것 때문에 온 건가?”
“얼굴 뵙고 드릴 말씀이라서요.”
준서의 진지한 말에 진구의 몸이 뜨끔하더니 유정을 노려 보았다. 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저, 저도 몰라요. 무슨 얘기 하려는 건지.”
“아, 아니...... 뭐 때는 됐지만.”
진구가 살짝 입맛을 다셨고 혜신도 먹던 초밥을 내려놓았다.
“정말이니?”
“뭐가 정말이에요. 저, 저는 멀쩡합니다. 병원 갈 일도 없고요.”
“그래?”
혜신이 눈꼬리를 휘며 준서와 유정을 번갈아 보았다. 유정이 준서를 노려보았다.
“아니, 왜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고 그래요?”
“으, 응? 아, 아닙니다. 유정 씨하고 관련된 일은......”
뒤늦게 눈치를 챈 준서의 얼굴이 벌개졌다. 혜신은 그제서야 안심하며 먹던 초밥을 입에 넣고 씹었다.
“아니, 뭐, 갑작스러워 그렇지 늘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그리고 요즘 임신 안되는 사람들도 많던데 일찍 되면 더 좋은 거지. 그쵸?”
“그래, 아예 낳으려면 일찍 낳아야지. 네 나이가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다, 유정아.”
“아니라니까!”
금세 의기투합을 한 듯이 진구와 혜신이 밝게 말하는 것을 보고 유정만 흥분을 하고 말았다.
준서는 유정을 보고 가볍게 웃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긴장한 그의 입술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뭐?”
식사를 마치고 나서 준서가 꺼낸 이야기에 분위기가 깊게 가라앉았다.
“아니, 자네 그러면 유정이랑 결혼 생각은 없었던 거였나?”
대번에 그 말이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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