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제 결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2017.09.07.
“설마.”
공문에 나온 글자를 보고서도 유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설마가 맞아요. 우리 동아리가 서울시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대상이요? 진짜요?”
교사 독서 동아리 결과물을 유정은 조금 특별하게 제출하면 어떨까 제안했었다. 공통 형식으로 요구하는 보고서 외에, 선생님들이 독서 동아리의 결과로서 구성한 수업 지도안이나 교과 활동 결과물을 첨부하자고 했다.
함께 읽은 책에서 자극 받은 부분을 수업에 적용하거나 혹은 학생과의 관계에서 적용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새로운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 보고서를 만드느라 유정을 비롯한 독서 동아리 회원들은 며칠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새우는 강행군을 해야 했다.
오죽하면 준서가 적당히 하자고 유정을 뜯어 말릴 정도였다.
“저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대상이라뇨. 서울시에 학교가 얼마나 많은데......”
“그만큼 서유정 선생님이, 그리고 선생님들이 잘했다는 거죠.”
“그럼 이거 저만이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알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려고 해요. 전체 회의 때 공개해야죠. 그런데 그 전에 미리 보여주고 싶어서.”
준서가 싱긋 웃었다. 유정은 준서에게 눈을 흘기며 물러나 앉았다.
“교장 선생님이, 지금 공과 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요?”
“그러게요. 대상인거 연락 받자마자 유정 씨 표정 보고 싶어 일도 손에 안 잡히더라고요. 하하......”
준서는 참았던 웃음을 토하며 팔을 벌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멀리 앉았어. 이리 와요.”
준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유정이 그 말에 슬그머니 일어서서 준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밖이니까 조심......”
“고생했어.”
조심하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준서의 두 팔이 유정을 힘있게 안았다.
“그 땐 쉬엄 쉬엄 하라고 잔소리 했잖아요.”
“우리 유정이 건강 해칠까봐 그랬지. 그 때는 미안. 정말 잘했어요.”
이마와 볼, 그리고 입술에 와 닿는 입술은 덤이었다.
유정은 금세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쿡쿡 웃으며 준서의 가슴에 머리를 댔다.
독서 동아리가 표창을 받으면서 신영 고등학교는 교사 동아리 시범 학교가 되었다.
다른 학교에서 신영 고등학교로 연수를 오면서, 유정을 비롯한 독서 동아리 멤버들은 더 신이 났다.
그저 시키는 일을 할 때와는 확실히 다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독서 동아리를 시작으로 신영 고등학교에서도 그와 비슷한 자발적인 모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단순한 취미 활동에서부터 교사들이 하는 연구와 관련된 동아리까지, 매우 다양한 모임들이었다.
연구 동아리 결과물들은 책자로 만들어져 다른 교사들에게도 배포되었다. 준서는 따로 발표하는 자리도 마련하여 결과물들을 교사들끼리 공유하도록 했다.
유정이 했던 다양한 국어 수업 자료들도 다른 교사들에게 공유되었다. 동아리에 관련된 일이 많아서 수업 실기 대회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자료는 교육청에서도 인정되어서 교육청 초청으로 수업 관련 연수를 하러 다녀오기도 했다.
가을이 지나 이제 겨울이 오려고 하는 문턱이었다.
작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올해를 맞이한 신영 고등학교에서, 유독 한 사람만 남 모르는 쓸쓸함을 견디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
준서는 몸을 돌렸다. 씩씩하게 걸어오는 여자는 슬쩍 손을 내밀어 준서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준서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 올랐다.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십니까?”
학교에 아직 그들의 사이를 알리지는 않았다. 서로의 일에 방해가 될 거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유정은 요즘 들어 급격히 표정이 굳어진 준서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딱히 말을 해주지도 않아서 유정은 좀 답답해하는 중이었다.
“화장실이요.”
준서는 무표정하게 답하고는 픽 웃었다.
“따라오시려고요?”
“제가 거길 왜요!”
발끈하는 유정을 귀엽다는 듯 옅게 미소하며 보던 준서의 얼굴이 다시 쓸쓸해졌다.
“요즘 무슨 고민 있어요?”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정은 어느새 준서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준서도 화장실에 간다는 말과는 다르게 교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민요?”
교장실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분위기로 그들을 맞이하는 교장실을, 준서는 깊은 감정이 묻은 얼굴로 한 번 휘둘러 보았다.
“외로워서 고민입니다.”
“네?”
“누구랑 같이 살고 싶은데, 그 분이 너무 비싸게 굴어서.”
유정이 준서의 등을 가볍게 내리쳤다. 준서는 억, 소리를 내며 맞은 등을 손으로 감쌌다.
“괜히 아픈 척 하지 마요. 별로 아프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맨날 손찌검만 하고 우리집에 들어오긴 싫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요즘 기분이 그래요? 말했잖아요. 올해만 지나면 생각해 보자고.”
유정은 일단 바쁜 것이 지난 후에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싶었다. 교사 생활 중에 가장 즐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날들인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까 학교를 이렇게 만들라고 했어요? 이거 다 교장 선생님 책임이야.”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네.”
준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부드럽게 웃으며 유정을 끌어 안았다.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떼고는 손으로 머리를 살살 넘겨 주었다.
“미혜 씨도 이제 그만 둔다고 하면 나 진짜 외로워질 거 같은데.”
“그만 두신 대요?”
“어머님이랑 식당 개업한대요. 워낙 음식 솜씨는 좋으니까. 이제는 집안일도 웬만큼 할 줄 알고 다른 사람 들이기도 싫고. 그래서 앞으론 그냥 혼자 지내려고요.”
유정의 시선이 염려를 담고 준서를 향했다.
티는 안내지만 은근히 외로움을 타는 남자인데.
미혜 씨가 입주 가사도우미였던 것도, 일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준서의 그 외로움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타인과는 늘 딱딱한 경계를 짓는 그였지만 마음 속에는 남모르는 공허감이 있었다.
누군가 집에 있다는 든든함, 말은 하지 않아도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정이 그를 훨씬 안정감 있게 만들어 주었다.
“진짜, 이제는 사람 안 쓸 거예요?”
“네. 새 사람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내 성격 맞춰줄 사람도 희귀해서.”
“뭐 그리 까다로운 성격이라고.”
“유정 씨가 몰라서 그래요. 나 얼마나 까다로운데.”
말 끝에 고개를 내린 준서가 유정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뜨거운 촉감에 유정의 눈이 감겼다.
“정말, 까다롭기는 하네요.”
“아, 물론, 이런 건 유정 씨랑만 하는 거고.”
“그럼 다른 사람이랑도 할 생각이었어요?”
유정이 준서를 뿌리치고 미간을 모았다. 준서가 당황하며 유정을 붙잡아 다시 끌어 안았다.
“왜 그래요, 응? 다른 사람이랑 안한다니까.”
“생각은 했다는 거잖아요.”
“유정 씨랑 같이 살면서 할 생각은 했지.”
“저리 가요.”
“이러니까 얼른 합치자고. 응?”
준서의 입술이 유정의 코와 뺨, 입술에 골고루 닿았다. 결국 유정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말았다.
“하, 진짜 안팎에서 너무 시끄러워. 알았어요. 올해 크리스마스에 대답하도록 하죠.”
“크리스마스?”
“네. 그 날이 디데이에요.”
“그런데 안팎에서 시끄럽다는 건......”
“부모님도 유원이도 맨날 나만 보면 결혼 언제 하냐고 야단이란 말이에요. 아빠가 제일 시끄럽고. 아니 무슨 로비를 그렇게 했어요? 이제까지 사귄 남자친구들 아빠는 다 별로라고 했는데 준서 씨만 특별 대우야.”
뾰로통한 유정을 준서는 물끄러미 보다가 품에 다시 으스러지게 끌어 안았다.
크리스마스라.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건지.
대답은 대략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님이 특별 대우하신다고 하니 좋은데. 나는 특별히 해드린 게 없어요. 잘해주신 건 아버님이죠.”
“우리 아빠 호불호 확실한 사람이거든요.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준서 씨한테 하는 것처럼 안해요. 준서 씨가 마음에 드니까 그러는 거야. 그런데 대단해요. 우리 아빠 마음 얻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
같이 쇼파에 앉아 도란 도란 십 분 정도 이야기를 하다가 준서는 일 때문에 유정을 보내야 했다. 퇴근 후 또 만날 수 있지만 아쉬워서 그는 또 한참을 유정을 안고 안 보내주려다가 한 차례 등짝을 맞았다.
유정이 가고 난 후 얼마 있지 않아 교감 석훈이 들어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굳은 표정으로 석훈을 맞이한 준서는 그를 안내하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제 제게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석훈은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 잘근 씹다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준서의 고개가 들렸다.
“네.”
“아무래도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요.”
준서는 시선을 내렸다.
오래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아니, 이미 봄에 마음의 결정을 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옳은 것을 이길 힘은 없으니까요.”
“저는 신념으로 옳은 것보다 현실적인 것이 더 옳다고 믿는 사람이라. 제 경험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교장 선생님이 여기 계셔 주셨으면 합니다.”
준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석훈은 그 표정에서 뭔가 통할 가능성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학교가 여러가지로 바쁩니다. 게다가 교사 동아리 시범 학교로 내년에 선정될 것 같은데 그 일을 해 나가려면 누구보다 교장 선생님의 추진력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준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교장 선생님.”
“제 결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미소를 지운 준서가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석훈은 미간을 모았다.
어제, 준서는 석훈에게 올해로 교장직을 사임할 의사를 전했다. 옳지 않은 권력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가 무슨 일을 했건, 재단 이사장 라인이라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사도 그리고 다른 어떤 교직원도 이런 식으로 임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곳에 올 때에는 제가 무지해서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이제라도 고칠 것은 제대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은 모두 버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준서는 자신의 현재 위치야말로 가장 큰 ‘오류’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교장이 된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으니까.
보통은 평교사로 20년 이상 재직한 후 교감으로 승진하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야 교장 승진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관례를 모두 깰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윤택 덕분이었다.
젊은 준서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서 그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려는 윤택의 욕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준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자신이 찾고 싶은 힘이 아닌 것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마인드를 바꿨고 결국 할아버지가 세운 자리에서도 물러날 것임을 알았다.
다만 자신이 벌려놓은 일은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1년을 견딘 것 뿐이었다.
“오래 생각해 온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결심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제 편이 되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석훈은 눈을 감아 버렸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젊고 경험도 적어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열정과 용기를 존경하게 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아야 꼭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나이가 어리다고 모자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온 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저는, 교장 선생님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후 눈을 뜨고, 석훈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도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준서가 석훈의 손을 잡았다. 석훈의 눈이 붉게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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