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그럼, 빨리 가져 버릴까?2017.09.05.
“제 생애 지도입니다.”
국어 시간. 우드락 판을 들고, 한 학생이 발표 중이었다.
“이건 저 다섯 살 때인데요.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제가 이 때 똥을 쌌대요. 그래서 힘주는 걸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냄새난다고 형은 도망치고요.”
어린 아이가 장난감 차를 두 손으로 누르며 힘을 주는 사진이었다. 학생들은 요란한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박형태 그 때부터 똥싸개였냐?”
“진짜 박형태 답다!”
학생들의 웃음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형태라고 불린 학생이 나머지 발표를 이어갔다.
“이건 제가 열 살 때인데, 이 때 실은 엄마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요. 그래서 집에 혼자 있다가 라면을 끓였는데, 그 끓인 게 뿌듯해서 사진으로 찍어봤어요.”
‘생애 지도 수업’은 이제까지 찍었던 사진 중에 스무 개를 골라서 우드락판에 붙이고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후 발표를 하는 수업이었다.
처음에는 벌로 시작했던 ‘나의 자서전 쓰기’를 수업에 도입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유정은, 그 후부터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발표하는 시간을 수업 시간에 종종 가졌다.
자신이 살아왔던 것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시간을 통해서 학생들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공감을 했다. 오해로 다투었던 두 학생이 이 시간을 통해 서로의 사정을 알고 화해를 하기도 했다.
유정은 새로운 수업을 도입할 때마다 결과물을 기록으로 남겼다. 준서의 조언 때문이었다.
- 서유정 선생님이 요즘 하는 수업들이 굉장히 반응이 좋아요. 어쩌면 올해 수업 실기 대회 도전해 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년 선생님 수업이나 혹은 후배 교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꼭 기록으로 남겨 두세요.
“오늘 발표 모두 좋았어요. 특히 형태의 그 첫번째 사진은 너무 강렬해서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발표가 모두 끝나고 유정이 평가를 시작했다. 몇 번의 이러한 특별 수업으로 마음이 열린 학생들은 모두 진지한 자세로 경청했다.
“다음 시간에는 오늘 한 발표를 바탕으로 이 중에서 하나의 사진을 정해서, 그 날의 일기를 써 오도록 하세요. 정말 그 날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들 모두 그 때 그 시절로 회귀하는 겁니다.”
발표 수업 후에는 이런 독특한 글쓰기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귀찮아 했으나 대부분은 이런 과제도 다른 때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라 신기하고 재밌어 했다.
“넌 똥쌀 때 어땠는지 쓰면 되겠다.”
형태 옆의 학생이 짓궂게 말하자 형식이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질렀다.
그 다음 시간이 점심시간이라, 수업을 마치자마자 학생들은 총알처럼 급식실로 뛰어나갔다.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았다.
“아휴, 뛰지 좀 마라!”
유정이 문을 열고 나가서 한 소리를 했으나 학생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웃으며 교무실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같은 속도로 그녀의 옆에서 걷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점심 먹으러 갑니까?”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누가 점심 먹으러 교무실을 가나요?”
유정은 표정을 굳히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복도는 학생들의 소음으로 요란해서 그들이 하는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은 그저 학교 업무에 대해 보고를 받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요. 반대편으로 가시죠.”
“출석부랑 교과서는 놓고 가야죠.”
“가지고 갔다 다시 가지고 오면 되죠. 비도 오는데 칼국수 먹으러 갑시다.”
“손가락은 부러지셨나요. 어제 저녁 내내 연락도 없으시고.”
“바빴습니다. 전화하니까 전화기 꺼져 있던데요.”
“자는 사이에 꺼졌나봐요.”
“그러니까 먹으러 갑시다. 엄청 배고프네.”
남자의 손이 슬쩍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손이 놀라 화드득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남자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갔다.
“미쳤어.”
“먹으러 갈 때까지 조를 겁니다.”
“자기가 연락하고 싶을 때만 연락하고.”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맛있는 거 사줄게요.”
남자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유정은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바깥은 벌써 가을비로 젖어 있었다.
남자가 우산을 펼치고 한 손으로 유정의 어깨를 감쌌다.
“어머, 누가 봐요.”
“비가 와서 이러는 건데 뭐가 어때요.”
“그래도요.”
“동아리 하러 나가는 거라고 하면 되죠.”
무슨 동아리를 단둘이 해. 유정은 말도 안되는 핑계에 웃으며 어깨를 잡은 준서의 손을 떨쳤다.
유정이 스타트를 끊었던 독서 동아리는, 교사들이 책을 읽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점차 학교 안에서 인기를 끌었다.
처음에는 4명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열 명이 넘어가서 제대로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동아리를 두 개로 쪼개서 또 하나는 수연이 담당을 하게 되었다.
동아리 활동 결과물은 1학기 말에 제출했다. 그리고 아직은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준서는 유정이 떨친 손을 내리며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도 우산을 기울여 유정이 젖지 앉게 했다.
“나 괜찮으니까 교장 선생님 쪽으로 해요.”
“내가 안 괜찮아요. 우리 유정 씨 감기 걸리면 내가 아버님께 혼나니까.”
혼난다는 말과는 다르게, 유정의 아버지는 준서의 친아버지인 듯이 그를 싸고 돌았다.
처음에 혼쭐을 낸 것과는 전혀 달라진 태도에 유원이 대체 누가 아들이라며 볼멘 소리를 할 정도였다.
“누가 들으면 맨날 혼나는 줄 알겠어요.”
“뵐 때마다 혼나죠. 우리 예쁜 딸 홀려 놨다고.”
유정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계속 비식 비식 웃는 표정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원래 유정을 보면 좋은 티를 내긴 했으나 오늘은 평소보다 그 횟수가 좀 더 잦았다.
약속에도 없던 밥을 같이 먹으러 가자는 것도 평소와 달랐다.
“아버지한테 무슨 말 들었어요?”
준서의 차에 올라타며 유정이 물었다. 보조석까지 우산을 씌워준 준서는 운전석에 올라타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데 왜 그러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혹시 어디 갑자기 떠나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나쁜 소식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유정은 불안감을 삼키며 준서를 살폈다.
“왜요, 너무 잘생겨서 눈이 안 떨어지나.”
“얘기 안할 거예요?”
“일단 좀 먹고요. 배가 등가죽에 붙을 거 같아요. 칼국수 말고 다른 거 먹을까?”
“아뇨. 나도 비가 오니까 땡기는 데요.”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은 날씨였다. 매운 것보다 시원한 국물을 좋아하는 유정은 비 오는 날에는 칼국수나 수제비와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을 즐겼다.
“그럼 갑시다.”
준서는 인근의 맛집으로 차를 몰면서 콧노래까지 불렀다. 아무리 보아도 정말 이상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노래까지 부르는 사람이었나.
“혹시.”
“네?”
“누가 나 임신이라고 그런 건 아니죠?”
준서는 놀라서 콧노래를 멈추고 쿨럭 기침을 했다.
“이, 임신이라뇨?”
“아니, 아닌데 누가 소문 냈을까봐.”
“누가요?”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이번 달에 생리가 계속 늦어져서 수연 언니한테만 살짝 얘기했거든요.”
이제는 별 것을 다 이실직고 하는 구나.
유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닌데......”
“설마, 그래서 임신이에요?”
“아니구나. 아니에요! 어제 시작했다고요.”
부끄러운 사실까지 말하고 나자 유정의 얼굴은 더 빨개지고 말았다.
“아하. 그런데...... 우리 피임 잘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그게...... 그럴 수 있나?”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래도 식 올리고 나서 갖는 게 더 좋지 않아요? 나야 아무 때고 좋지만.”
유정은 붉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못했다. 임신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괜히 먼저 말해서 화제만 이상하게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도 계속 나눴어야 했는데. 유정 씨한테만 부담을 안겼나 보네요. 미안해요.”
“아니, 준서 씨,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솔직히 말하면, 기대를......”
“기대?”
“아니, 그게, 나도 식 올리고 나서 갖는 게 더 좋긴 한데요. 생리가 늦어지거나 하면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다고요.”
유정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괜히 더워서 손부채질을 하며 입 밖으로 열기를 토했다.
“그럼, 빨리 가져 버릴까?”
준서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유정이 준서를 노려 보았다.
“아니, 그래도, 현실적으로! 좀 그렇죠.”
“그렇죠.”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얼굴에는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아이가 평소에 많이 갖고 싶었나 봐요.”
“아뇨, 전혀.”
“그런데 왜 그렇게 기다리는 것처럼......”
“그야.”
준서의 차가 칼국수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유정 씨와 함께 만드는 아이니까.”
준서의 볼살이 위로 올라 붙으며 입술 끝이 길게 늘어졌다.
“아이가 갖고 싶다기 보다는, 빨리 가정을 갖고 싶은 거죠. 유정 씨와 함께 하는.”
“하......”
결국 마주 웃어 버리고 마는 유정에게, 주차를 마치고 벨트를 푼 준서가 다가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빙글 빙글 웃는 얼굴은, 늘 감정 조절을 하며 합리적으로 행동하려 애쓰는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얗게 반짝거리는 얼굴을 마주한 유정이 입술을 내밀어 준서의 짧은 키스에 답례했다.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삼키는 여자의 입질에 준서의 몸이 가볍게 경련했다.
“이러다 칼국수 먹기도 전에 홍콩 가겠습니다.”
입을 뗀 준서가 마무리인 듯 유정의 이마에 입술을 콩 박고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기다려요.”
우산을 펼쳐들고 내린 준서가 보조석 문을 열고 나오는 유정을 이번에는 아까 못했던 감정까지 실어 강하게 끌어 안았다.
유정은 그것까지는 말리지 않았으나 우산은 준서 쪽으로 밀었다.
“나 이런 걸로 감기 안 걸리니까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다니까.”
“그리고 자꾸 우리 아버지한테 어쩌구 하는데 나 아버지 소유물도 아니고,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기분 나쁘거든요, 저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유정 씨가 예뻐서 내가 이렇게 해주고 싶다고. 그러면 괜찮습니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웃는 유정의 볼에 준서가 짧게 입을 맞추고 칼국수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지락 칼국수와 들깨 칼국수를 주문한 후 준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유정은 그제야 그것 때문에 준서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임을 알았다.
“뭐예요?”
“글쎄, 뭐 같아요?”
“또 시작이다. 얼른 내놔요.”
준서에게서 서류 봉투를 가로챈 유정이 천천히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내용물은 흔히 보던 공문이었다. 이걸 왜 전자 시스템으로 올리지 않고 이렇게 바로 가져왔을까.
보통은 이런 공문은 전자 시스템으로 올려서 부장을 거쳐 부원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도 절차를 중시하는 준서가 왜 부장도 거치지 않은 공문을 자신에게 가져왔는지 궁금해하며 유정은 공문을 살피다가 자기도 모르게 억 소리를 냈다.
“설마.”
공문에 나온 글자를 보고서도 유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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