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조금씩 익숙해져 볼게요.2017.09.04.
“아니, 얼마나 운 거예요, 대체.”
일단 학교를 벗어난 준서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유정을 근심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퉁퉁 부어버린 눈이 안타까웠다.
회의 시간에도 자꾸 울어서 신경이 쓰였었는데.
“괜찮아요, 힘들어서 운 거 아니니까요.”
“그럼, 내가 좀 멋있었나?”
준서가 입을 길게 늘이며 입꼬리를 올리자 유정이 그런 준서를 노려보다가 꽉 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아아.”
준서가 엄살을 부리며 어깨를 감싸 잡았다.
“뭐, 아프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그거 모르나 봐요. 유정 씨가 때리면 난 배로 아파요. 몸도 마음도 얻어 맞으니까.”
유정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 입술을 준서의 입술이 살짝 덮었다가 놓았다.
“그렇게 얄미운 말만 하니까 때리죠. 맞아요, 준서 씨 너무 멋지고, 대단해서 눈물이 났어요.”
“내가 뭘요. 한 것도 없는데.”
“봤어요? 저 말고도 운 선생님들 있었다고요.”
“봤을 리가. 내 눈에 유정 씨 밖에 누가 더 보였겠어요?”
회의 때와는 달리 능글거리기만 하는 남자가 미워서 유정은 다시 꽉 쥔 주먹으로 준서의 어깨를 내리쳤다.
“알았어요, 내가 졌어요, 흥.”
“유정 씨가 왜요. 날 항복시킨 유일한 사람이면서.”
“그래서, 상이 뭐예요?”
더 있다가는 닭이 되어 날아가 버릴까봐 유정은 몸에 돋은 소름을 잠재우며 화제를 돌렸다.
“상은, 가면서 얘기합시다.”
그러나 준서는 또 쉽게 가르쳐 줄 마음이 없는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유정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아, 또 혼자만 재밌는 퀴즈 대작전인가요?”
“혼자만 재밌다고요?”
“그럼요. 그 다섯 번 퀴즈도 혼자만 재미있었던 건 아시죠? 저 뭐 맞추는 거 싫어한다고요.”
유정이 투덜대며 하는 이야기에 준서가 미간을 좁혔다.
“아, 그래요? 별로 재미 없었어요?”
“아니, 맞추고 나서는 좋았지만.”
“그러면 상도 없었던 걸로 할까?”
유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운전을 하고 있으니 때릴 수도 없고, 속만 부글 부글 끓었다.
“하하, 상 받으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그러니까 상이 뭐냐고요.”
“맞추라고 하면 화낼 거 같고.”
“아, 준서 씨이!”
“그런데 나는 화 내는 게 예쁘고.”
유정은 입을 꽉 닫아 버렸다. 준서는 그것조차 좋은 듯이 유정을 흘긋 흘긋 보면서 웃었다.
차가 멈췄다. 차 대리점 앞이었다.
“여기는 왜요?”
유정이 주위를 휘둘러보며 물었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준서의 차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차에서 내린 준서가 남자와 인사를 했다. 유정도 엉겁결에 내렸다.
남자가 유정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쪽이 차주 되실 분이시군요.”
“네?”
유정의 입이 벌어졌다. 돌아보니 준서는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서, 설마, 상이라는 게......”
“전에 잠깐 면허 있다고 말한 거 같아서요. 따놓고 차가 없어 운전은 안하고 있다고요.”
유정은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설마.
“마음에 안 들면 어쩔 수 없는데. 원래는 생일 선물로 할까 했는데 오늘 너무 빨리 맞춰줘서. 마침 전화하니까 준비가 됐다고 해서 오늘 저녁에 가지러 간다고 했죠.”
유정의 생일은 다음 주였다.
예전에 사귄 초기에 알려주고 나서, 바빠서 유정도 잊고 있었던 날이었다.
“아무리 생일 선물로 준비했었던 거라고 해도...... 생일 선물이 너무 큰 거 아니에요?”
“공짜로 해 주는 거 아닙니다. 왔다 갔다 하니까 좀 많이 피곤해서요. 앞으로는 유정 씨가 저 대신 운전 좀 해 달라고요.”
여유롭게 웃는 모습에 유정은 질린 표정으로 준서를 노려 보았다.
“알았어요. 그런데 괜찮겠어요? 이 세상에서 눈을 감았는데 일어나 보니 저 세상일 수도 있어요.”
“뭐, 그래도 상관 없죠. 어차피 유정 씨에게 운명을 맡긴 몸이니까.”
“하, 진짜, 말이나 못하면.”
유정은 눈으로 준서를 한 번 흘기고 나서, 준서가 마련한 차로 걸어갔다. 아담한 사이즈의 경차였다.
“예쁘다!”
“좋습니까? 난 좀 큰 차로 하려고 했는데. 여선생님들께 물어보니까 이게 제일 낫다고 해서요.”
“여선생님이요? 누구요?”
다시 샐쭉해지는 표정을 보며 준서는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아니, 그냥 지나가다 물었습니다. 누군지 기억도 안 나요.”
“그럼 직접 저한테 물으시지.”
“마음에 안 들면 지금 바꾸고요.”
“아뇨, 아뇨! 저도 운전이 처음이라 너무 크면 부담스럽고요. 그리고 이 차 예뻐요.”
“그럼 한 번 타보세요.”
유정은 버릇처럼 보조석으로 가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준서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 쪽이 아니라 이 쪽인데.”
“저...... 면허 따고 처음인데요.”
“괜찮아요. 내가 있으니까.”
유정은 훅 숨을 내쉬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려다가 헛손질을 하고는 픽 웃었다.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손을 뻗었는데 벨트는 왼쪽에 있었다. 보조석 문이 열리고 준서가 차에 탔다.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걱정하지 말고 집중해요.”
준서가 살짝 웃었다가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의자 거리 조절하고, 깜박이 잘 되는지 체크하고.”
깜박이만 체크하랬더니 와이퍼를 작동시킨 유정은 워셔액까지 품어내고는 공연히 웃었다.
“앞이 잘 보이라고요.”
“네, 잘하셨어요.”
덕분에 앞유리는 깨끗하게 닦였다. 백미러 확인까지 마친 유정이 기어를 드라이브로 놓고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어어어어......”
“긴장하지 말아요.”
“어어어어......”
그러나 긴장하지 말라는 말로 긴장이 줄어들 수는 없었다. 유정은 모든 차들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환상을 보면서 자꾸만 속도를 줄였다.
“이러다 멈추겠는데요.”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 없어요. 어차피 서로 서로 조심하거든요. 제 차선만 지키고 가면 됩니다.”
가까스로 차선에 진입했으나 속도는 여전히 나지 않았다. 뒤에서 빵빵 소리가 나자 유정의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걱정하지 마요. 다 피해서 갑니다.”
그러나 준서는 그런 유정을 다그치지 않고 달랬다. 유정도 점차 안심하며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잘하는데요?”
“아아, 말 걸지 마요.”
“알았어요.”
잔뜩 움츠린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준서가 잘한다고 하니 엄살을 부릴 수가 없었다.
늘 준서의 차에서 편하게 있어서, 운전하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줄 몰랐다. 앞에 집중하는 눈은 시리고 팔과 어깨는 잔뜩 굳어서 아팠다. 무엇보다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몰라 불안했다.
“괜찮아요? 잠깐 좀 세워봐요.”
유정이 팔을 부들 부들 떠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준서가 말했다. 유정이 시키는 대로 차를 세우고는 그대로 늘어져 버렸다.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면 좀 쉬엄 쉬엄 가도 되는데.”
“아니, 잘한다고 하니까, 더 잘하고 싶어서요.”
“유정 씨는 늘 잘하는 사람이죠. 나한테는.”
그런 거였나. 유정이 준서를 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 진짜 너무 힘들어요. 준서 씨는 매일 이렇게 운전했던 거예요?”
“처음이라 몸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래요. 어깨도 그렇고. 나도 그렇게 운전하면 오래 못해요. 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어깨랑 팔에 힘도 빠지고 훨씬 힘이 덜 들어요.”
“그래도...... 그냥 운전대만 잡고 있는 건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힘드네요. 면허 딴 지도 좀 되어서 다 잊어버리고.”
“아닌데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금세 잘할 거 같은데.”
준서의 손이 부드럽게 유정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듯이 목 주변도 매만지고 주물렀다.
뭉친 어깨가 부드럽게 풀려가는 것이 시원했다. 유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선물도, 그리고 이렇게 해주는 것도. 솔직히 너무 과분해서 받아도 되나 싶긴 한데.”
“받는 대신 저 태워주면 된다니까요.”
“그것도. 솔직히 내 옆에 타는 거 무섭잖아요. 나 믿어주고 옆에 타준 것도 고마워요.”
준서가 조물 조물 만지던 어깨를 놓고 그녀의 몸을 자신에게 당겼다.
“이건 좋네.”
“네?”
“차가 작아서 유정 씨가 금방 안겨요.”
유정이 웃으며 준서의 목에 머리를 얹었다. 준서의 손이 유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이마에 준서의 입술이 닿았다.
유정의 얼굴에 준서의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그것은 그의 뜨거운 마음인 듯도 했다.
“유정 씨가 먼저 나 믿어줬잖아요.”
“네?”
“내가 하는 일, 응원해주고 격려해주고. 오늘도 솔직히 유정 씨 없었으면 그렇게까지 못했을 거예요.”
“오늘요?”
준서는 유정의 까맣고 큰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그런 거...... 솔직히 오늘 나온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는 없어요. 경찰에 알려도 대충 덮일 거고, 언론에 알려도 이슈가 되기 전에 할아버지와 그 쪽 사람들이 막을 거예요. 그리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린다? 형님도 할아버지 손자입니다. 결과적으로 별 일 없었다면 할아버지도 형님 불러 몇 마디 하고 끝낼 거예요.”
“아......”
“작년에도 그렇게 덮였죠. 몇몇 사람들만 알고 다른 교사들은 모르는 채로요. 그래서 모두에게 알린 겁니다. 나도 이런 일을 당했으니,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고 공론화하고 이야기하자고요. 같이 힘을 모아 대응해 가자고요.”
공론화하고 마음을 모으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작이었다. 피해자는 당당해질 수 있고 문제 해결은 가까워질 수 있다.
해결이 나지 않은 문제라도 괴로워할 이유는 없었다. 공론화되고 마음이 모아진 이상 언제든 다른 해결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믿음직한 남자의 품에 더더욱 깊이 머리를 묻었다.
“그게 그런데 왜 나 때문이에요?”
“유정 씨가 먼저 알려줬으니까. 나도 그저 할아버지 힘을 빌릴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정 씨가 나에게 새로운 힘이 있다는 걸 알려줬고, 나라는 사람 자체를 믿어주고 세워줬죠.”
“내가, 그랬나요?”
준서는 웃으며 그에 대한 대답처럼 유정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제 다시 갈까요?”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한 준서가 유정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운전석에 바로 착석했다.
이제 관계도 새롭게 바뀔 것이었다. 서로 교대하여 운전을 하는 차를 탄 것처럼, 순간 순간 주도하는 이가 바뀌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어찌되든 상관 없었다. 함께 갈 수 있다면.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무서워요.”
“곧 익숙해질 겁니다.”
“나중에는 괜찮아질까요?”
“아뇨, 그 무서움에 익숙해지는 거죠.”
유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이 준서가 사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 것 같아서였다.
조금 전에도 떨렸으나 훌륭하게 견뎌냈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네, 조금씩 익숙해져 볼게요.”
유정의 입이 단단하게 다물렸다. 차는 아까보다 훨씬 안정적인 속도를 내며 도로를 미끄러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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