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나 좀 부러워지려고 그런다?2017.09.03.
“아 진짜 뭐야.”
유정은 입술을 내밀고 메신저 창을 노려 보았다.
기회는 네 번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물어도 대답도 없다.
“나 놀리는 것도 아니고.”
연애를 시작하면 좋을 줄만 알았는데 혼자만 좋다. 나는 이런 거 하나도 재미 없다고.
“왜, 유정 쌤, 애인이 성질나게 하나?”
수연이 유정을 툭툭 치며 장난스레 물었다. 유정은 입술을 내민 채 답이 없었다.
“어허, 진짠가 보네.”
“안해, 안할 거예요.”
유정은 노트북을 확 닫아 버렸다.
“아, 그거 아직도 맞추는 중이야?”
“힌트도 안 주고.”
적어도 맞추는 게 재미있게는 만들어 줘야지. 지난 주를 생각하라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도 없지 않은가.
“힌트 하나도 없어?”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라고, 그 한 마디가 끝이에요. 지난 주에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어떻게 네 번만에 맞춰요.”
“지난 주에 있었던 일, 혹시, 성헌이 아버지 오신 그 일 말씀하시는 거 아냐?”
수연의 말에 유정의 눈썹이 꿈틀했다.
“네? 그게 뭐......”
“그 때 교장 선생님도 몹쓸 일 당하고. 여하간 그냥 넘어가긴 좀 그렇잖아.”
“근데 그걸 회의에서 말씀하신다고요? 설마.”
“왜, 나는 교장 선생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거 같은데?”
유정은 묵묵히 턱을 긁었다. 그 일이라면 큰 일이긴 했다. 그런데 회의에서 그것을 대체 어떻게 말할 생각인 걸까.
“아님 말고, 뭐.”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아직 기회가 몇 번 더 남아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 일을 가지고 퀴즈를 낸 거라면, 제정신인 걸까. 수치스러워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을 텐데.
유정은 준서의 일은 빼고 간단히 적었다.
‘혹시 성헌이 아버지 찾아오신 일 말씀하시는 건가요?’
“혹시나 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오늘 저녁에 가면 됩니까? 한 일곱 시 정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준서는 급하게 통화를 마치고 일어섰다. 곧 회의 시작 시간이었다.
다섯 번 기회를 주었는데 두 번만에 맞췄다. 유정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 잘못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세 번만 기회를 주는 건데.
그래도 맞췄으려나.
준서는 싱글거리며 휴대폰을 들고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직전, 바깥쪽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네.”
“아, 교장 선생님, 나가시던 길이셨습니까?”
“가져오셨군요.”
“음악실에서 빌려왔습니다.”
준서는 교감 석훈에게서 부탁한 물건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계속 업무가 밀려서요.”
“아닙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준서는 석훈과 오늘 회의 내용을 공유한 상황이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전...... 지금이라도 취소하셔도 됩니다.”
석훈은 순수하게 준서를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준서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집안 문제라 좀 그렇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에게는 집안보다, 함께 일하는 교직원 여러분들이 더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늦겠습니다. 얼른 가시죠.”
석훈은 준서를 따라 걸으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전 교장과는 달리 가시밭길을 자청해서 가는 사람이었다.
성정이 강한 것도 아니고, 남의 말을 무시하고 내리 누르는 폭력성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 태도는 부드럽고 온화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성정에 반하는 일을 맡아서 모진 상처를 묵묵히 감당하는 모양이 석훈의 눈에는 안쓰럽기도 하고 보듬어 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한 그 고집 때문에 석훈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저러다 무슨 일이 날지......”
오랜 사회 경험으로 석훈은 모난 돌이 결국 정을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다행히 나쁘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으나 석훈은 자꾸만 이상한 예감이 드는 것을 떨칠 수가 없었다.
“부디 퇴임할 때까지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준서는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 시작 전이었으나 대다수의 교사들이 착석해 있었다.
준서는 석훈이 가져온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교사들의 눈이 커졌다.
“저건 왜 가져온 거지?”
“음악이라도 들으려는 걸까?”
유정도 준서가 꺼내놓은 브루투스 스피커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준서는 유정이 한 말이 맞다고 했다. 그런데 성헌이 아버지하고 저 스피커하고는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정말 음악이라도 들으려는 걸까.
미간을 모으고 턱을 만지작거리던 유정이 그 순간 떠오른 생각에 몸을 들썩였다.
설마.
준서는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단순히 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말은, 유정의 짐작이 거의 맞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그걸, 들려주시려고......”
“뭐?”
수연이 유정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고, 그 순간 목소리 하나가 공간에 울렸다.
- 당돌한 여자더군. 신입 교육 아주 잘 시켰어.
유정은 그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했다. 잊을 수가 없었다.
회의실의 술렁임이 멎었다.
- 소속 학교 교사를 깎아내리는 건 학교와 저를 깎아내리는 거고 결국은 이 학교의 재단 이사장까지 깎아내리는 걸로 들립니다만.
- 해석이야 자유고. 내가 왜 왔는 줄은 알아?
뒤이어 들린 목소리 때문에, 대부분 교사들은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챘다.
준서와 또 다른 누군가의 대화인 것을.
- 그 여자, 해고시켜.
내내 고압적으로 말하는 상대가 누군지도 금세 알 수 있었다.
- 그게 정 싫으면, 네가 대신해서 사과하든가.
유정을 협박하는 정황은 대부분 빠져 있었다. 유정의 아버지의 일까지 교사들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아서 준서가 편집을 한 것이었다.
- 내가 그 선생에게 받고 싶었던 대로, 무릎 꿇고 정식으로.
무서운 침묵이 일었다. 모두가 심각해하는 상황에서 준서만 여유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보고 있었다.
- 정말로, 건드리지 않을 겁니까
- 물론
- 제가 잘못했습니다.
유정은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그러나 눈까지 벌개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괜찮아?”
수연이 유정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다른 교사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충격을 받은 듯 모두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지금 들려드린 것은,”
준서는 스피커를 끄고 단상 앞에 섰다.
“지난 금요일, 제가 하성헌의 아버지에게 협박 받고 강요된 사과를 했던 녹음본입니다.”
애써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있었으나, 준서도 눈가 옆에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긴장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히 느껴지는 눈으로 준서는 말없는 교사들을 휘돌아 보았다.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학교장으로서 학부모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선생님들과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점 정식으로 사과 드리겠습니다.”
허리까지 깊이 숙여 보이는 준서 앞에서 교사들은 고개만 저을 뿐 여전히 입을 봉하고 있었다.
몸을 세운 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준비된 말을 꺼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재단 이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조치를 취할까, 아니면 아예 언론에 공개를 할까. 그러나 그러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학교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은 재단 이사장님이 아닙니다. 그 분은 저에게 이 자리를 주시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학교를 이끌어가는 분들은 여기 계신 선생님들입니다.”
준서의 눈이 반짝였다.
“처음에는 저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뜻에 선생님들을 맞추려고 했고 제 고집대로만 끌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노력이나 헌신 없이 학교가 바르게 세워져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제가 지향하는 방향도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도, 우선적으로는 선생님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정은 손수건으로 눈 밑을 꾹꾹 눌렀다. 준서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보였다.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꿋꿋하게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격려하고 싶었다.
“방금 들으신 것은, 학부모가 함부로 학교의 교직원 인사까지 간섭을 하는 상황입니다. 제가 분명 양쪽 상황을 다 들어보고 결정할 문제라고 해도, 협박까지 하면서 간섭을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유롭게 이야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준서는 단상에서 내려섰다. 잠시 굳은 듯한 교사들의 눈이 고민으로 반짝였다. 누군가 손을 들었다.
김윤호였다.
정인기 대신 부장 자리에 앉아 주기를 바라는 준서에게 따끔한 일침을 남긴 교사였다.
“이건 확실히 학교에 대한 갑질입니다. 재단 이사장의 손자이자 현 국회의원이기도 하니 학교가 만만해 보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작년에도 이 비슷한 일로 그 하성헌 학생의 생활기록부 조작 사건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더 이상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윤호에 이어 몇몇 교사들이 동조의 입장을 말했다.
방법으로는 경찰에 신고하는 것, 언론에 공개하는 것, 재단 이사장에게 말하는 것 등등이 논의되었으나 의견이 모아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계속 늘어지자 준서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양한 의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마음을 모은 것 자체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준서는 뒤이어 교사들이 대하기 어려운 학부모를 만났을 때의 매뉴얼을 배포했다. 그제야 교사들은 준서가 하려던 말이 자신이 당한 일만이 아닌 것을 알았다. 매뉴얼에는 단순히 어떻게 대응하라는 말이 아닌, 그것이 법적으로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조항이 들어 있었다.
“지금 당장은 예산 문제 때문에 지연되고 있지만 2학기 때부터는 학교에 상주 변호사가 있을 겁니다. 법적인 자문을 구할 때나 학부모와의 불미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때 도와주실 분입니다. 선생님들의 인권은 지켜져야 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에도 함께 이야기하고 힘을 모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시작으로 박수 소리가 번져 갔다. 준서가 단상에서 내려온 후에도 박수 소리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유정은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수연이 그런 유정을 다독이자, 유정은 눈물 묻은 얼굴을 돌려 웃어 보였다.
“남자 친구로서는 얄미운데, 저런 거 보면 또 미워할 수도 없네요.”
“그러게, 유정 쌤, 나 좀 부러워지려고 그런다?”
수연이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유정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다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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