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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89화 (89/102)

89. 저와 관련된 결혼 발표는 아니죠?2017.09.02.

“그 땐 좀 추웠는데. 벌써 여름 되겠어요.”

선선한 봄바람을 느끼며 유정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준서는 아쉬운 듯이 보조석으로 와서 공연히 입맛만 다셨다.

“왜요?”

그제야 준서의 불편한 심기를 깨달은 유정이 고개를 들고 빤히 준서를 보았다.

“내가 열어주려고 했단 말입니다.”

“에, 나는 손이 없어요?”

“그게 그런 게 아니죠. 내가 다 해주고 싶었는데.”

토라진 척 몸을 돌리고 비척 비척 걷는 준서를 유정이 급히 따랐다.

“아니, 뭘 그런 걸 가지고 삐치고 그래요? 놀래라.”

“내가 삐쳤다고 했어요?”

“딱 보니까 삐쳤는데. 삐돌이.”

유정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자 준서가 픽 웃었다.

“그러지 말아요.”

“네?”

“이런 데서 키스하고 싶지 않으니까.”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하고 앞질러 식당으로 들어서는 준서를 유정이 다시 급히 따랐다. 신발을 벗고 있는 그의 등을 가볍게 치고 유정은 눈을 흘겼다.

“준서 씨도 그러지 말아요.”

“내가 뭘요?”

“아무데서나.”

고개를 삐쭉 내민 그녀의 입술이 준서의 입술에 닿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놀란 눈을 내버려둔 채 유정이 안으로 들어서며 우렁차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유정 쌤!”

유정이 놀라서 우뚝 걸음을 멈춘 곳에, 수연이 앉아 있었다.

“뭐, 뭐, 여긴 어쩐 일이에요?”

수연의 앞에는 상우가 앉아 있었다.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아니, 상우 쌤이 어제 또 애들하고 일이 있었다고 해서. 주말 내내 우울해 하길래 불러냈어. 그런데 유정 쌤은 무슨 일...... 아, 교장 선생님?”

뒤이어 준서가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유정 쌤도, 어제 학생하고 무슨 일 있었나봐?”

“아, 알잖아요. 성헌이 아버지 찾아오고. 설마 몰라서 묻는 거예요? 그런 언니는 왜 나는 걱정해주지도 않고 상우 쌤이랑만 만나요?”

유정이 일부러 샐쭉한 표정으로 묻자 오히려 당황한 수연이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유정 쌤한테도 연락 하려고 했어. 우리 멤버잖아, 멤버, 응? 나 이번 주 책도 다 읽고 완전 모범 학생, 아니 모범 교산데!”

“같이 앉을까요?”

준서가 유정에게 눈짓하며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따로 앉기도 민망한 노릇이긴 했다.

“그래요.”

“어쩐지 싫다는 거 같은데. 따로 앉아도 돼요.”

수연이 말했으나 유정이 옆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가 저 떨쳐내려는 건 아니고요?”

“아니, 떨쳐내긴 뭘 떨쳐내!”

수연이 유정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자, 준서의 표정이 굳었다. 수연은 손을 유정의 어깨에서 떼고는 준서를 슬쩍 바라 보았다.

“우리도 설렁탕 주문할까요?”

준서가 공연히 헛기침을 하고 유정에게 물었다.

먹는 내내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으나 어쩐지 불편한 기운이 내려 앉아 있었다.

“윤상우 선생님은, 아직 힘든 상황입니까?”

준서는 조금 전의 말을 떠올리고 상우에게 물었다.

“네, 뭐, 그런데, 올 한 해는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요. 처음부터 잘하면 그게 사람입니까. 윤상우 선생님 누가 봐도 잘하고 있으니까 기운 내세요.”

준서가 가볍게 상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맞아요. 상우 쌤. 그렇게 배워가는 거예요. 나도 첫 담임 때는 얼마나 헤맸다구. 학부모 찾아오시고, 막......”

수연이 유정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닫았다. 유정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나도 어차피 끝난 일이니까요.”

“끝난 일이라니. 난리 났었다면서.”

“성헌이랑 잘 이야기하고 돌려보냈어.”

“아 그래? 하긴 성헌이가 건실하지. 고딩 답지 않게 너무 성숙해서 나는 마음이 짠하더라. 꼭......”

수연이 준서를 보고는 입을 막았다.

“저랑 닮았다고요?”

준서는 수연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대신 뱉었다. 수연은 입꼬리를 늘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 네, 좀, 분위기가...... 교장 선생님 어렸을 때 보는 거 같기도 하고요.”

“전 그 녀석처럼 그렇게 착하지는 못했어요.”

“아...... 그러세요?”

“그 녀석은 어제 바로 집에 들어갔다던데. 저 같으면 한 한 달 쯤은 집에도 학교에도 안 오고 전국을 돌았을 겁니다.”

“교장 선생님이요?”

수연이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준서는 쓸쓸히 웃었다.

“상상이 안 가요. 엄청 모범적이셨을 것 같은데.”

“아뇨. 겉으로만 그런 척했죠.”

“와, 뜻밖의 모습이네요. 그런데 유정 쌤하고는 어떻게 만나......”

수연이 입을 막았다. 유정이 당황한 듯 수연을 보다가 그 눈빛 그대로 준서를 바라 보았다.

어떻게 하죠.

유정의 눈빛에 준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좋으니까 만났죠.”

유정이 그렇게 툭 뱉고는 얼른 설렁탕 국물을 입 안에 넣었다.

“허, 만나는 게 사실은 사실이었어?”

“그게 여러 가지로 좀 꼬이다가 이제야 해결이 되는 기미가 보여서요. 당분간은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준서가 부드럽게 이어 말했다.

“당연하죠. 그런데 진짜, 진짜? 와! 그래서 성헌이 일이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아무 것도 아닌 건 아니죠. 예전에는 성헌이가 학생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사귀는 사람의 조카이기도 하니.”

“그래, 더 신경쓰인다는 거야?”

장난스레 묻는 말에 유정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축하드립니다.”

묵묵히 앉아 있던 상우가 고개를 꾸벅 숙였고 유정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렇게 축하 받으니까 엄청 쑥스럽네요.”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서 좋네요. 서유정 선생님도 성헌이 일 때문에 걱정 됐었는데. 그 일도 잘 해결되었다고 하고요.”

상우가 예의 바르게 말하자, 수연이 그런 상우의 말을 이었다.

“잘 해결되었다는 게, 혹시 이렇게 해결된 걸 뜻하는 건 아니지? 성헌의 가출이 결국 두 사람의 결합을 도왔다는 그런......”

“그 문제는 그 문제고 이건 이거죠. 나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사람이에요.”

짓궂게 묻는 눈치에 몸서리를 치며 대꾸했으나, 유정은 내심 수연의 눈치에 놀라고 있었다.

“다 드셨으면 후식이라도 먹을까요? 이렇게 만난 김에 앞으로 모임 이야기도 하고요.”

준서도 민망함을 감추는 듯이 애써 담담하게 꾸민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재미 없게 모임 이야기라니. 그냥 재미 있는 연애 이야기나 들었으면 하는데.”

“저도 그 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만.”

이제는 상우까지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수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준서는 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다른 데 돌렸다.

“또 무슨 회의야. 맨날 회의, 회의!”

인기는 월요일 아침부터 성질을 있는 대로 내며 결재판으로 책상 위를 내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인기를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학교 분위기는 묘해졌다. 교무실 안에 설치된 건의함에 의견을 써넣은 교사 중심으로 준서가 일대 일로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나이는 젊어도 재단 설립자의 손자였다. 게다가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만만치 않은 포스를 풍기던 그라서 그런지, 일대 일로 만나는 것은 교사들에게는 두려운 동시에 또한 설레는 일이기도 했다.

이제는 인기가 대놓고 교장을 욕해도 맞장구를 쳐주는 이가 거의 없었다. 젊은 교사들을 중심으로 의견이 활발하게 공유되면서 업무 능률도 더 올랐다.

인기는 요즘 점심 시간에도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대놓고 교장을 배척한 그를 다른 교사들이 꺼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정은 교장으로부터 온 메신저 창을 살폈다. 과연, 오늘 원래 예정에 없던 회의를 오후에 할 계획이라고 했다. 되도록 빠지지 않고 전부 참석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뭘까, 뭘 발표하시려고.”

수연이 웃음을 삼키며 유정을 보았다. 유정이 팔을 뻗어 수연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아아, 왜에!”

“놀리지 마요.”

“놀리긴 누가 놀렸다고 그래? 그 날은 잘 들어갔어?”

설렁탕을 먹고 후식까지 먹은 후 그들은 헤어졌다. 후식을 먹는 자리에서는 수연의 기대와 달리 준서와 유정의 연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언니는요? 상우 쌤 잘 바래다 드리고요?”

상우가 근처에 살아서 수연이 그 곳까지 온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유정은 뭔가 낌새를 느꼈으나 애써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상우 쌤 알아서 갔지. 나는 나대로 가고.”

“좋은 소식 있으면 알려줘야 돼요.”

“알았어, 알았어. 괜히 상우 쌤한테 찌르지 마. 우리 진짜 아무 것도 아니니까.”

유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회의, 기대되는데?”

“설마요.”

결혼 발표라도 하려는 거야, 뭐야. 유정은 공연히 긴장되는 것을 참으며 메신저를 노려 보았다. 궁금함에 발끝이 저려 왔다.

그래, 궁금하면 물으면 되지.

이제는 혼자 끙끙댈 이유가 없잖아.

유정은 메신저 창에 천천히 글자를 입력했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국어과 서유정입니다. 혹시 그 회의가 저하고 관련된 회의인가요?’

너무 직접적인가.

글자를 조금 지운 유정은 다시 메시지를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국어과 서유정입니다. 오늘 회의 안내는 받았습니다. 혹시 회의 주제를 미리 알 수 있을까요? 저와 관련된 발표는 아니죠?’

아니 이것도 아니다.

아, 뭐라고 말하지.

물끄러미 메신저창을 주시하던 유정은, 갑자기 ‘발표’ 하니 생각나는 단어를 입 속으로 뇌었다.

어차피 보내지도 않을 거 한 번 써볼까.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국어과 서유정입니다. 오늘 회의 안내는 받았습니다. 혹시 회의 주제를 미리 알 수 있을까요? 저와 관련된 결혼 발표는 아니죠?’

웃음이 났다. 결혼 발표라니.

혼자 쿡쿡 웃는데 뒤에서 소리가 났다.

“선생님.”

“어!”

유정은 깜짝 놀라 검지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우스 위에 있던 검지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메시지 전송’ 버튼이 눌렸다.

“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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