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동생이랑 안하는 거, 오늘 할까요?2017.08.31.
“어딜 들어가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수정의 걸음이 멈췄다. 캐리어를 빼앗은 남자가 수정의 옆에 섰다.
“오지 말라니까, 너!”
“혹시나 했는데. 가요.”
유원이 수정의 손을 잡아 끌었으나 수정은 붙박인 듯이 서 있었다.
“내 문제라고 했잖아.”
“누나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들 문제지.”
“누구야, 넌!”
민 의원이 삿대질을 하는 것을 유원이 웃으며 되받았다.
“그건 알거 없고. 지금 신문사에 전화하려다가 온 길이거든요. 인터뷰가 필요해서.”
“뭐?”
“민 의원 외동딸 학대 사건이요. 조사해 보니까 아동학대 가해자 처벌법도 발의하셨던데, 본인이 발의한 법에 본인이 걸려들겠어요?”
“하, 너 누구야!”
“지금 이 시간부터 이 여자한테 손대면 바로 연락합니다. 명성에 똥칠하고 싶지 않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민 의원은 뒷걸음질을 쳤다. 욕설을 내뱉고 나서 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복도는 다시 적막해졌다.
그제야 그들의 마음이 보였다. 애초에 수정의 사정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보일지만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유원의 협박에 바로 문을 닫아 버리는 민 의원의 태도에 수정은 절망했다.
조금 전에 움직이던 마음조차 수치스러웠다. 그토록 모진 결심을 하고 갔는데,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려던 것이었는지.
유원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 복잡한 표정의 수정을 보았다.
“아무래도 걱정돼서요. 주소는 누나 쪼아서 겨우 알아냈고.”
“들어가려던 거 아니었어.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말 다 했었어. 그런데......”
“나도 멋대로 참견해서 미안해요.”
유원이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수정이 그를 급히 따랐다.
“어디로, 가려는 거야?”
유원마저 떠나면, 수정은 정말로 혼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준서 씨, 아니 준서 형하고 달라서 돈도 없고.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요.”
유원이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수정의 눈치를 보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면.”
유원의 눈이 빛났다.
“우리집에 가요.”
“어?”
“엄마도 아빠도 반대하실 분 아니고. 유정 누나도 있고.”
마음이 순식간에 밝아졌다가 도로 어두워졌다.
“그래도 어떻게 그래. 그건 아냐.”
“방은 나랑 같이 쓰면......”
말도 마치지 못해서 유원의 등에 수정의 손바닥이 떨어졌다.
“안 가!”
“아, 농담, 농담. 정 그러면 내 방 써요. 우리 집에 창고로 쓰는 방 하나 있거든. 거기 내가 들어가서 자면 되니까.”
“괜찮아. 갈 곳이야 있겠지.”
당분간은 찜질방 신세를 지면서 할 일을 찾아보면 될 것이었다. 숙식 제공하는 일자리가 어딘가 있지 않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원은 수정이 타기를 기다려 뒤이어 엘리베이터에 오르고는, 잠시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그냥 우리집에 가요. 누나는 지금 사람 북적북적한 데 있어야 해. 좀 시끄럽긴 해도 사람 살 맛은 나거든요.”
“시끄러운 건 너 때문 아니야?”
“아뇨, 내가 밖에서야 시끄럽지 집에서는 별명이 조개입니다. 입 딱 다물고 있어서 조개에요. 누나가 더 시끄러워요. 엄마도. 두 사람이 쌍벽을 이룬다니까요. 아빠는 텔레비전을 가끔 너무 크게 틀어서......”
유원이 주절 주절 떠드는데 수정이 갑자기 쿡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만담을 하는 유원이 세상 편하다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그런 유원을 보는 수정의 마음도 좀전과 달리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웃겨요?”
“응, 웃을 상황 아닌데 웃겨.”
“다행이다. 그럼 우리 집 가는 거예요?”
“아니 말이 어떻게 그렇게 이어져? 그건 아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과 수정의 휴대폰이 지릉 우는 것이 동시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휴대폰을 무심결에 꺼내든 수정의 얼굴이 굳었다.
“왜 그래요?”
유원이 슬쩍 보는 척을 하자 수정은 더 감출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유원에게 보였다.
‘입금했다. 입은 다물어 줬으면 좋겠다. 말하면 너한테도 좋지 않다는 거 기억하길 바란다.’
유원은 덩달아 굳은 얼굴로 수정을 보았다.
“쪽팔리네, 진짜.”
수정이 발 끝에 힘을 주어 걸었다. 아파트를 걸어 나가니 늦봄의 향기가 선선했다.
“누나.”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꼴 보이니까.”
문을 닫는 것으로, 그리고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민 의원이나 하영에게 수정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완전히 명확해졌다.
그들에게 끝까지 수정은 딸이기 보다는 다만 대외적으로 필요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마지막에 흔들려버린 어리석음이 슬퍼서, 그걸 들켜버린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수정은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 등에 따뜻한 손이 얹어졌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 거예요, 지금?”
“너도 지금 이 상황에 그 말이 중요하니?”
날카롭게 내쏘아도 등에 얹어진 손은 내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네 집에는 안가도 될 거 같아. 통이 크신 양반이거든. 웬만한 곳 전세는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럼 내가 그 집으로 갈까요?”
“야, 내가 진짜!”
수정이 유원의 팔을 뿌리치고 그 등을 몇 차례 내리쳤다. 유원은 얻어 맞으면서도 연신 싱글거리고 있었다.
“유정이가 왜 네 앞에서는 그렇게 폭력적으로 변하는지 알겠어, 너 사람 속 은근히 긁어, 알아?”
“아, 알았어요, 미안, 미안, 항복!”
유원이 수정의 손을 잡아 내리고 그 앞에 똑바로 섰다. 수정도 일어선 채로 유원을 마주보고 있었다.
“이제 맘 좀 풀렸나?”
“마음이 왜 풀려?”
“그야 내가 옆에 있으니까.”
수정이 기가 막혀 훗 하고 웃자 그 입술에 유원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입술로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가 떼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수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만해, 사람 다 보는 데서.”
“그럼 집에 가서 할까요?”
“그놈의 집. 얼마 입금됐는지 확인이나 해보고.”
몸값 같아서 받기도 싫었으나, 수정은 그럴 수록 받아서 보란 듯이 살아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꺼내 은행으로 접속을 하는데 전화가 왔다는 알림과 함께 진동이 왔다.
“어, 준서 씨네.”
“아니, 그 헤어진 약혼자한테는 왜 이렇게 연락이 오는 거예요?”
“내가 걱정 되서 그런가보지.”
수정이 전화를 받으려는데 유원이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준서 형님? 저 유원입니다.”
“야, 내놔!”
“여긴 상황 종료에요. 얘기하고 나왔고 돈까지 받았습니다. 지금 막 금액 확인하려던 차였는데.”
“야아! 서유원!”
“그 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수정 누나는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 누나나 좀 챙겨 주세요. 제 누나지만 폭력적인 성향도 있는데다 은근히 잘난 척도 심해서 속 뒤집어질 각오 좀 하셔야 할 거예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준서는 얼굴을 찌푸린 채 간신히 차분하게 답했다. 이러니까 유정이 폭력적으로 대하지. 자기 누나한테 말하는 것하곤.
하고 싶은 말은 꾹꾹 우겨 넣고 전화를 끊은 준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도 저쪽 커플은 수정이 고생을 좀 해야 할 듯했다.
하긴 수정에게는 자신처럼 답답한 녀석 보다는 유원처럼 밝은 녀석이 더 맞을 지도 모르지.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아침 식사를 정리했다. 요즘 미혜 씨는 거의 부르지 않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와서 밀린 집안일과 반찬 준비를 하도록 부탁했다.
그것도 점점 준서가 직접 배워가는 중이었다.
유정은 계속 일을 해야 하니까, 이런 집안일도 나눠서 해야 하겠지.
아침을 먹은 것을 설거지를 해 놓고 나니, 문득 외로워졌다.
쉬는 날이니 쉬고 있겠지. 어제도 늦게 잤는데 지금 연락하는 건 너무 이를 거야.
그럼 몇 시쯤 연락을 해야 좋을까.
고민하는데 초인종이 울었다.
주말에 올 사람이 없는데.
“수정이 전화 받아요? 제가 전화했는데 통화중이더라고요. 유원이도 전화 안 받고. 오늘 아침에 내가 잠도 덜 깼는데 유원이가 수정이 어디 사느냐고 막 그래서 잠결에 말해주고 나서 정신이 번쩍 났어요. 유원이 나갔다길래 전화했는데 전화 안 받아서. 혹시 준서 씨한테는 연락......”
유정은 눈만 크게 떴다.
입술에 말캉하고 뜨거운 것이 침입해 들어왔다. 그대로 유정을 안아든 준서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유정을 침실에 내려주고 나서 그녀의 신발을 벗겨 도로 신발장에 가져다 놓은 준서는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걸어와 침대에 걸터 앉았다.
“내가 미쳤나봐요.”
“네?”
“뭐라고 말하는지는 하나도 안 들리고 입술 움직이는 것만 보였어.”
“네? 뭐......”
다시 벌어지는 입술에 준서의 입술이 닿았다. 들썩이는 가슴을 준서의 손이 눌렀다.
천천히 가슴을 스친 손이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거센 호흡이 섞이면서 흥분으로 차오른 몸이 요동했다.
“잘 해결 됐대요.”
유정의 숨이 꼴깍 넘어갈 찰나 준서가 입을 떼고 말했다.
“통화 했어요?”
“네, 그런데 유정 씨 동생이 받던데.”
“하, 그 새끼 내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갔어, 내가......”
유정이 씹어 뱉듯이 말하다가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아, 저......”
“동생하고 과격하게 노는 군요.”
준서의 눈이 반이 접혀 있었다. 연인의 비속어 사용도 그저 귀엽기만 하다는 눈빛이었다.
“아니 제가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닌데요.”
“알아요. 그런데 캐릭터 바뀐 것도 예뻐요.”
준서의 입술이 유정의 코와 볼에 쪽쪽 닿았다 떨어졌다.
“나도 그렇게 불러줘요.”
“네?”
“그 새끼라고.”
“하, 준서 씨, 그건 아니죠. 이상한 취향이시네.”
유정의 말에 준서가 큰 소리로 웃고는 몸을 숙여 유정의 쇄골을 핥았다.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거친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세웠다.
“아아, 아직요.”
“유정 씨한테 특별한 사람 되고 싶어요.”
“그게 욕은 아니죠.”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봐요. 왜 유정 씨 동생한테도 질투가 나는 건지.”
잠시 고개를 들었던 준서가 다시 고개를 숙여 유정의 귀를 혀로 매만졌다.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고개를 잡고 손을 아래로 내렸다.
“동생이랑 이런 건 안해요. 그럼 됐어요?”
유정이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준서의 목을 마주 안으며 말하자 준서가 고개를 들고 훗 웃고는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그럼 동생이랑 안하는 거, 오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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