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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86화 (86/102)

86. 이 사단을 만든 건 아버지 어머니에요.2017.08.30.

“갔니?”

유정이 집에 들어오자 혜신이 나머지 설거지를 하며 물었다.

“네, 뭐......”

“네 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주무시기 전에 한참을 이야기를 했어. 골프를 같이 치는 게 좋을까 낚시를 하는 게 좋을까.”

“하, 안돼요. 나 빼놓고 또 어딜 가려고.”

“그렇게 무섭게 혼내 놓고 나서 보니까 마음에 드나봐. 하여간 네 아버지도 참.”

혜신의 뒷정리를 도우며 유정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문 소리가 나서 보니 유원이었다.

“너는, 일찍 좀 다녀.”

“연습 있어서요.”

유원이 그렇게 말하고 지나치려다 유정과 눈이 마주쳤다.

유원이 잘 해결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했다.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떻게 됐어?”

유원의 방에 따라 들어간 유정이 방문을 닫고 유원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 되긴. 아까 말한 그대로야.”

“내일 집에 들어간대?”

“고집쟁이.”

양말을 벗어 던지고 유원은 침대 위에 길게 누웠다.

“죽어도 혼자 가시겠대. 자기가 처리할 일이라나.”

“그럼, 너 설마 같이 가려고 했었어?”

“당연하지, 내가......”

“이 맹추야!”

유정의 주먹이 유원의 머리에 가볍게 떨어졌다.

“뭐, 맹추? 하, 누나 그런 말 쓰면 애들한테 왕따 안 당해? 어디서 조선 시대에나 쓰던 말을......”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니가 수정이 따라가면, 수정이는 뭐가 되겠어? 파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런가?”

“수정이도 생각 있는 애야. 어쩌다 너를 사귀게 됐는지 몰라도 고생길이 훤하다.”

“지금 그게 하나 밖에 없는 동생한테 할 소리야?”

빽 고함을 지르는 유원의 입을 유정이 막았다.

“조용히 좀 해. 새벽이거든, 지금.”

“수정 누나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알아. 걔가 남자 보는 눈이 좀 없었어. 옛날부터.”

“뭐래, 진짜.”

“여하간 고맙다. 수정이도 잘 보살펴 주고, 또...... 우리 반애도 책임져 주고.”

“갑자기 또 왜 그래?”

유원이 물러나 앉으면서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유정을 훑었다.

“그냥 고마워서 하는 얘기니까 들어.”

“고맙기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그리고 그 녀석은...... 집에서 혼나긴 했는데 그래도 쫓겨나진 않았대.”

“성헌이?”

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담임은 난데 왜 엉뚱한 녀석에게만 연락을 한 걸까. 계속 연락을 기다렸는데.

“응. 뭐 때문에 마음이 풀렸는지, 많이 혼나지도 않았다는데. 성적만 유지하라고 했대. 그런데 그 녀석 컨디션 좋으면 전교 1등하고 컨디션 나쁘면 반에서 1등하는 애라며. 그러게 평소에 잘하면 안되는 건데, 공부 같은 건.”

“너 그런 말 했어? 평소에 잘하면 안된다고.”

“그런 말을 내가 왜 해? 누구한테 무슨 소리 들으려고. 만났을 때도 공부 열심히 하란 얘기 밖에 안했어.”

그런데 왜 나한테는 연락을 안하고 너한테만 연락을 하는 건데. 유정은 질투 어린 감정으로 유원을 쏘아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연락 오면 나한테 다 보고해.”

“알았어, 알았다, 응? 아 진짜 나는 뭐 해주고도 욕을 먹어.”

“그리고 이런 건 니가 알아서 치워. 여기다 던져 놓으면 엄마가 다 치우는 거 알아, 몰라?”

유정은 유원이 벗어 놓은 양말을 들어서 유원의 가슴팍에 던졌다. 유원이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 앉았다.

“아, 뭐하는 거야, 더럽게!”

문이 닫힘과 동시에 닫힌 문으로 양말이 다시 던져졌다.

유원은 씩씩거리다가 일어서서 양말을 주워 들었다. 알았다, 알았다고.

수정 누나 앞에 떳떳한 남자가 되려면 좋은 남자가 되어야지. 저 여우가 또 무슨 짓을 수정 누나에게 고해바칠지 몰라.

양말을 세탁물통에 넣으니, 부엌에서 그릇을 치우고 있는 혜신이 보였다. 슬그머니 혜신의 곁에 다가간 유원은 뒤에서 가만히 혜신을 끌어 안았다.

예전에는 산처럼 크던 몸이 지금은 아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왜 이래? 용돈 필요해?”

“응, 만원만.”

“그럼 그렇지.”

지갑을 찾으러 가는 혜신을 유원이 다시 뒤에서 끌어 안았다. 혜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 보았다.

“왜 그래, 자꾸?”

“엄마.”

“응?”

“아니, 그냥. 잘 자요.”

수정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자신의 가족이 평범한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저 어느 가정에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이 수정의 가정에는 없었다.

입양 가정이지만 다른 가정과의 차이를 모르고 자랐다. 입양아인 유정은 유원에게는 누나, 부모에게는 자식이라서 유원은 다른 입양 가정도 똑같은 줄만 알았다.

입양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 가정의 문제겠지만.

수정은 내일, 잘 이겨낼 수 있을까.

유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수정보다도 자신이 더 떨리는 날일지 모르겠다고 그는 옷을 갈아 입으며 홀로 생각했다.

같이 있겠다는 유원을 달래서 돌려보냈다.

이제 오로지 혼자인 시간이었다.

누구도 도울 수 없고, 도와서도 안되는 시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깜빡 눈을 감았다 뜨니 아침이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화장을 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 몇 개가 와 있었다.

다들 짐작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유원, 유정, 그리고 준서와 성헌까지.

어제 모였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메시지를 보냈다.

수정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너무 어릴 적부터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죄악인 줄 알고 자라 왔다. 그래서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녀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런 그녀 때문에 오랜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구애를 거절했고, 새 연인은 뒷일은 생각도 않고 그녀의 집에 따라가겠다고 우겨댔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는 학생조차, 자신의 사정이 있음에도 메시지를 보내 그녀를 챙겨 준다.

결심을 하니 이제까지 보았던 것이 달리 보였다. 자신이 빠져야 이 세상이 좀 더 조화롭고 평화로워지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그녀의 부모였던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짐을 캐리어에 모두 실었다. 준서는 더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리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깊이 심호흡을 했다.

바닥에 구두가 닿는 느낌이 날 때마다 몸이 움찔 떨렸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다.

주말이라 아버지는 출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냐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문을 연 이는 그대로 굳은 채로 수정을 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수정이 느슨해진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상대는 웃지 않았다.

“들어오거라.”

비켜나는 몸을 수정은 바라보기만 했다.

“네 아버지 식사 중이니까......”

“들어오려고 온 것 아니에요.”

무슨 일이냐는 소리와 함께 다른 이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말씀드리러 왔어요.”

“너, 이제 온 거야? 하준서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당장......”

수정은 눈에 힘을 주었다. 감정을 누른 목소리가 딱딱하게 나갔다.

“준서 씨는 제 부탁을 들어준 것 뿐이에요. 제가 숨겨달라고 했어요.”

“뭐?”

“어차피, 아버지도 뒤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가만 두셨잖아요. 찾으려는 노력도 없이.”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민 의원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가 그녀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 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동네 창피하니까 들어와서!”

어머니 하영이 수정의 몸을 잡아당기려는데, 수정이 재빨리 몸을 피했다.

“창피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죠.”

수정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었다.

“뭐, 당신?”

민 의원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며 구두를 신었다. 수정은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민 의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난 잘못한 것 없으니까요. 당신들이 입양한 아이 학대하고 괴롭혔잖아요. 아니에요?”

“뭐라고, 수정이 너 제정신이야? 갑자기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

성난 걸음으로 민 의원이 수정에게 다가오려다가 우뚝 멈추었다.

큰 소리가 났다가는 동네에 다 소문이 날 것이었다. 소문에 민감한 신분이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아뇨. 전 들어가지 않아요.”

이제는 무릎 뿐만 아니라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자꾸만 허물어지려고 하는 몸을 이를 물어 세우며 수정은 끝까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는 저 속으로 안 들어가요.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함부로 하면 다 이야기할 거예요. 제가 저 안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아시면서 모른 체한 거잖아요. 안 그랬으면...... 내가 숨어버렸을 때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셨겠죠.”

“뭐야?”

민 의원은 그렇게만 말하고 하영을 말없이 노려 보았다. 하영은 굳어지려는 얼굴을 애써 풀고는 민 의원을 바라 보았다.

“수정이가, 아무래도 갑자기 파혼을 해서 스트레스가 많아졌나봐요.”

그런 하영의 말을 무너뜨리듯이, 수정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난, 아버지의 외도로 난 자식이니까. 아버지도 어머니 눈치를 봐야 했겠죠. 아닌가요?”

“민수정!”

민 의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구둣발로 집 밖으로 나왔다. 수정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너, 어떻게 니가 이럴 수가......”

민 의원은 주먹을 부르쥔 채 수정을 내려다 보았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몸을 바로 세우고 수정은 입꼬리를 더 들어 올렸다.

“웃어? 이 년이, 이 사단을 만들어 놓고......”

“말은 똑바로 하세요.”

수정은 쓴침을 삼켰다. 그녀의 삶의 일부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수정은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몰라도 수정은 그렇지 않았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과 함께 했던 생애가, 덕지 덕지 묻어 있는 삶의 조각들이 생살이 베어져 나가듯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면서 마음에 피가 쏟아졌다.

“이 사단을 만든 건 아버지 어머니에요. 제가 아니라요.”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살 수 없다. 인정하자 슬픔이 차올랐다. 그들에게 구걸했던 삶이 너무나 비참했다.

“잘 모르시겠으면 제가 한 번 인터넷에 올려 볼게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수정아.”

민 의원이 다급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수정을 불렀다. 아까보다는 한껏 부드러워진 음성이었다.

“뭘 올린다는 거야? 응? 네가 이러면 안되지, 그건 결국 너한테도 흙탕물 튀기는 거다.”

“흙탕물 튀겨도 괜찮아요. 지금까지는 튀기는 정도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서 살았었는데요.”

“민수정!”

“끝까지 모른다고 하셔서요.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죠.”

“이러지 마라.”

민 의원이 캐리어에 올려진 수정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 입술을 깨물며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런데 거짓말같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억지로 날을 세웠다. 거부하고 부정하면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진 마음은 익숙해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부모라는 이름으로 내 옆에 있어준 사람들이 아닌가.

내가 어딜 가서도 부끄럽지 않게 해주던 이들이 아닌가.

수정의 손이 꼬물거렸다. 민 의원이 수정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래, 수정아. 들어가서 차근차근 얘기해.”

하영도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그녀를 모질게 때리고 가두었던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욕설을 뱉으며 그녀를 캄캄한 현실 가운데 무너지도록 했던 사람.

그들이 다시 손을 내밀어주고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친절이 눈 앞에 있는 모양을 본 수정은 모진 결심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다시 사랑 받고 싶었다. 뜯어버린 살점을 도로 붙이고, 무너진 몸을 세우고 싶었다.

다시 손을 잡으면, 예전의 그 아픈 기억을 보상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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