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잘 들어가, 유정아2017.08.29.
방에 따라 들어간 준서는 방석 위에 앉는 진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구는 방석을 내주려다가 준서의 자세를 보고는 미간을 모았다.
“편히 앉게. 그렇게 앉으면 내가 불편해.”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많아 이렇게 앉는 게 편합니다.”
“하, 무슨......”
진구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헛웃음을 삼키며 방석을 내밀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깔고 앉아.”
“감사합니다.”
준서는 거절하지 않고 방석을 받아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정말 혼나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유정이가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난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 취해서 함부로 여자 집에 찾아와서는 그게 무슨 꼴인가?”
진구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바로 준서에게 내쏘았다. 준서는 머리를 더 숙이며 무릎 앞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그 날을 생각하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때 자네가 그랬었지. 할아버지 빽으로 교장이 되었다던가. 아무리 사실이라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건방진 태도 아닌가?”
“죄송합니다.”
준서는 정말로 크게 꾸중을 듣는 학생처럼 머리를 숙이며 연신 사과했다. 그 모양을 보는 진구의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그런데 유정이는 자꾸 그게 아니라고 하고, 또 유정이가 선택한 거니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나는 그 날 취해서 나타난 그런 놈한테는 절대 내 딸을 줄 수가 없고.”
준서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뭐?”
“저도 아버님 입장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 날은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사정이 있긴 했지만 그런 상태로 유정 씨 집에 나타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이라니?”
진구가 고개를 내밀었다. 준서는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뭐 말하기 싫으면 관두고.”
“아니, 그게 아니라......”
준서는 간략하게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학교에서 가장 비리가 많고 문제가 많은 교사가 할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준서도 할아버지로부터 그 교사를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
“믿었던 할아버지가 그런 행동을 하셨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서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엉뚱하게 유정 씨 생각이 났고, 그냥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라도 보고 오고 싶었습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진구가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면 할아버지 빽으로 그 자리 있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던 그런 건 아니군. 그래서 그 비리 교사는 어떻게 됐나?”
“사립학교 교원도 공무원에 준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제 마음대로 해고하거나 징계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냥 두고 있긴 한데......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게 제가 다른 선생님들과 만나고 대화를 하면서 그것을 계속 학교 정책에 반영을 하다 보니까......”
준서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진구의 눈이 점차로 밝아졌다.
“허어, 아예 무관심으로 힘을 못쓰게 한다는 거군?”
“그렇게 됐습니다.”
“자네, 할아버지 빽으로 그 자리 앉았다더니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유정이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제야 알겠군. 왜 그런 말을 내게는 해주지 않았나? 할아버지 빽으로 그 자리 앉아 있다고 하니 난 오해할 뻔하지 않았나.”
“할아버지 빽은 사실입니다. 떳떳한 자리 아닙니다. 저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준서는 더 하려던 말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제가 노력한다고 해도 그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든 학교가 좋아지면 학생들도 학부모도 그리고 교사들도 좋은 것일세. 자네 이제 보니 일을 안해서 혼나야 하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겸손해서 혼나야 할 것 같군.”
“아닙니다.”
준서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진구는 그에게 당겨 앉았다.
술 마시고 여자나 희롱하는 한량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저 소년 같은 우직함이 있는 남자였다.
“이보게.”
준서가 고개를 들었다.
진구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가슴 속의 진실을 내보이듯이 그 깊은 눈은 준서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난 그렇게 뒤를 봐줄 사람도 없었어. 부모님은 안 계신 게 차라리 나은 처지였고. 어렸을 때는 신문 배달부터 시작해서 안해본 일이 없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뒷배 짱짱한 녀석들을 질투했지. 그래서 그런 거네, 자네한테도.”
진구의 눈이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자네가 생각한다면 내가 뭐라고 하겠나.”
준서는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그 안에 점차 안개 같은 물이 고이고 있었다.
“나도 미안하네. 그 동안 나 때문에 마음 고생 심했을 거야. 그 날도 모진 소리 하고 돌려 보내고......”
“아니,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준서는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애써 감정을 다스렸다.
“그 날 제 행동이 잘못된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혼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니 뭐 감사할 것 까지야......”
“진심입니다. 언제든 뵙고 사죄할 때를 노렸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이제야 사죄 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깊이 고개를 숙이는 준서를 묵묵히 보다가, 진구는 손을 내밀어 준서의 어깨 위에 얹었다.
어깨에 닿는 뜨거운 기운에 준서의 몸이 떨었다.
참았던 감정이 북받치며 무릎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진구가 놀라 다가 앉으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허어, 참, 이러면 내가 크게 혼낸 줄 알게 아닌가. 유정이한테 한 소리 듣겠는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진실한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자신을 자랑으로 삼는 어머니나, 남에게 잘 보이기만을 원하는 아버지가 아닌 마음을 이야기해도 부끄럽지 않을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무섭기만 했던 유정의 아버지가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또 한 명의 어른이 생긴 것을 알았다. 적어도 그의 말을 왜곡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단단한 자기 기준이 있는 어른이었다.
어른을 만나자 그의 안에 참았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준우가 찾아왔을 때부터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감정들이었다. 그 또한 어른인 척을 하느라 잔뜩 쌓아두기만 했던 감정이 진짜 어른 앞에서 터져 나오자 수습하기가 곤란했다.
그런 준서를 진구는 말없이 달래 주었다. 자신 또한 그러했듯이. 혜신의 아버지에게 기대고 위로 받았던 것처럼 준서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예요? 이제 그만 좀 하지?”
밖에서 소리가 들리고서야 준서는 정신을 차렸다. 혜신의 목소리였다.
“괜찮은가?”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아닐세. 내가 좀 많이 마음 고생을 시켰어야지.”
“아닙니다, 그것 때문이 아닌데......”
준서는 겨우 눈물을 닦아내고 한 쪽으로 비껴 앉았다.
문이 열렸다. 들어선 유정이 준서의 얼굴을 보더니 술상을 거의 내던지듯이 하고 그에게 다가 앉았다.
“왜 그래요, 응? 아빠가 많이 혼냈어요? 아빠 왜 그래요! 왜 준서 씨한테 그래요!”
“아니야, 아니예요, 내가 얘기할 테니까 아버님께 그러지 마요.”
준서가 웃으며 유정을 달랬으나 유정은 얼굴이 붉어진 채 진구에게 쏘아댔다.
진구는 그런 것도 안 그런 것도 아니라 공연히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 내가 사과할게요.”
밖으로 나온 유정이 준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뭘 사과해요?”
준서는 그런 유정에게 미소했다. 그러나 이미 울어서 부어버린 눈을 숨기기는 어려웠다.
“아니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이래요. 평소에 잘 울지도 않는 사람이.”
“유정 씨 말대로 평소에 잘 울지도 않는 사람이 왜 울었겠어요?”
준서의 손이 유정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아버님이 아무리 무섭게 혼내도, 제가 그것 때문에 설마 울었겠어요? 왜 유정 씨는 아직도 날 잘 모르지?”
“그러니까 왜......”
“혼내신 건 사실이예요. 하지만 내가 그 날 혼날 짓 했지. 나라도 딸이 그런 남자 만나는데 좋다고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서 다시 사과 드렸는데...... 아버님이 내 사정을 물으셨어요. 그리고 집중해서 들어주셨고.”
유정은 말없이 준서를 올려다 보았다. 진구가 준서의 사정을 들어주었다는 말을 들으니 유정도 공연히 울컥한 마음이 치솟았다.
정말로, 준서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아버님 사정도 말씀해 주시고. 그렇게 대화 나누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면서 죄송하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해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유정이 준서의 몸을 힘있게 끌어 안았다.
그 따스함에 준서의 눈이 웃었다.
“이러면 또 울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울어도 괜찮아요.”
“이제는 그만하려고요. 너무 부끄러워서.”
준서의 입술이 유정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아버님 어머님 걱정하시는데 그만 들어가요. 난 대리 불러서 가면 되니까.”
2차로 술상을 나누며 준서는 평소와 달리 좀 많이 마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어지러움을 참고 있었던 듯 유정이 포옹을 풀자 그는 조금 비틀거렸다.
“헤어지기 싫은데.”
“연락할게요.”
“그런데 왜 도로 존댓말이예요?”
유정이 입을 뾰족하게 내밀며 물었다. 준서가 마주 웃으며 유정의 뺨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럼, 계속 반말하는 게 좋아요?”
“친근감 있거든요.”
“잘 들어가, 유정아.”
준서의 말에 유정이 다가서서 그의 코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뗐다.
“준서 씨도 잘 들어가요.”
준서의 눈이 다시 붉어졌다. 그의 몸이 그녀의 몸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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