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나도, 집에 가야 겠어.2017.08.26.
“선생님?”
성헌은 놀란 듯이 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이 유정의 어깨를 황급히 짚었다.
“내가 설명할게, 유정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너, 여기 있었던 거야?”
성헌은 거칠게 끌려 들어왔다. 내내 다스렸던 감정이 폭발한 표정으로 유정은 성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저, 선생님, 그게 실은......”
“설마 유원이가 너 여기 소개시켜 준 거야? 여기 데리고 온 거냐고?”
그녀 답지 않게 고함을 지르는 유정 앞에서 성헌은 잔뜩 쫄아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 유원이 형님은 잘못 없어요, 제가 연락을 해서......”
“그래서, 네가 받아준 거야? 가족한테 연락도 안하고 함부로......”
잔뜩 붉어진 유정의 얼굴이 수정을 향했다. 이것 때문에 준서가 어떤 일을 겪었는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로 그녀의 몸 전체가 푸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미안해. 사정이 딱해서 단 며칠만......”
“단 며칠만? 단 하루라도 부모하고 통화하도록 했어야지. 유원이를 소개시켜 준 건 나고, 그러니 이건 결국 내 책임, 학교 책임이 되는 거야. 학교에서 가출을 방조하고 도와준 거라고. 그래서 준서 씨가 그렇게까지......”
유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성헌이 음악을 한다는 말에 섯부르게 유원을 소개시킨 일부터 후회가 되었다. 유원이 그래도 어른이니 지각은 있을 줄 알았다. 이런 일을 벌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삼촌이 왜요, 또 아버지가 삼촌 어떻게 했어요?”
성헌의 물음에 유정은 조용히 고개만 가로 저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유정이 결심한 듯 내뱉었다.
“유원이 부를게. 어찌된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봐야 나도 내일 학교에 가서 제대로 보고를 할 수 있으니까.”
“유정아......”
수정의 만류하는 듯한 눈을 유정은 애써 외면했다. 대략의 상황을 들은 유원은 지금 가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후 유정은 응접실의 쇼파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좀 앉자. 성헌이 너도 앉아.”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함부로 행동해서......”
“아냐, 내 잘못이야.”
입을 닫고 있던 수정이 성헌의 뒤로 가서 그를 가볍게 안았다. 성헌이 놀라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몸은 단단히 잡힌 채였다.
“유원이가 전화 받았을 때 내가 들이라고 했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서. 학교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줄은 생각 못했어. 내가 미안해, 유정아.”
“아니에요. 이건 우리 아버지가 이상해서 그래요. 별 일도 아닌 걸 큰 사건 만드는 게 그 양반 전공이라서.”
성헌이 수정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러니 유정도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유원은 삼십분도 채 되지 않아 왔다. 택시라도 타고 온 듯했다.
유원은 유정을 보자마자 얼굴 근육을 달달 떨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하려고 했었어, 누나. 수정 누나랑 이렇게 된 거......”
“다 아니까 일단 앉아.”
유원은 유정의 서늘한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평소에는 만만한 누나였지만 때때로 이럴 때에는 말 한 마디 걸기가 무서웠다.
유정은 그들 셋에게서 어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 듣고 보니 그들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갈 곳 없는 학생을 거두어 준 것은 오히려 담임으로서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었다.
“제가 집으로 돌아갈게요. 맞아 죽든지 맞고 살든지 하겠죠. 다 제 잘못입니다.”
마지막으로 깊이 고개를 숙이는 성헌을 유정은 묵묵히 보고 있었다.
정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이 있다면 성헌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있다. 하지만 상황은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상황이었다.
모두에게 책임이 없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였다.
“그럼 넌 나하고 같이 가자.”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성헌은 오히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괜찮아요, 저 혼자 가도......”
“그래, 누나, 내가 갈게. 이럴 땐 남자 대 남자로 상대해야 해.”
“넌 날 따라오지 말고.”
유정이 눈짓으로 수정을 가리켰다. 수정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수정이랑 더 대화나 나눠봐.”
“무슨?”
“도울 것 있으면 돕고. 성헌이 너는 나랑 가자.”
담담히 일어서는 유정의 뒷모습을 수정은 말없이 보고 있었다.
지금 가장 자신의 삶에 맞서야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수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책임을 회피하고 돌아선 곳에 오히려 준서와 유정, 그리고 유원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탓하지 않고 기다렸다.
귀찮아서 내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귀찮았다면 수정과는 상관 없이 준서와 유정은 계속 연애를 했을 것이고, 유원도 이 곳까지 드나들면서 수정을 돌보아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전 성헌의 일을 진지하게 나누고 마음을 모으는 것을 보면서, 수정은 자신의 일 또한 그들이 그렇게 진지하게 대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학생의 일에 불똥을 맞을 것을 알면서도 성헌의 집에 함께 가겠다고 하는 유정을 보면서, 수정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모자랐던가를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았다.
“갈게.”
유정과 성헌이 뒤를 돌아 보았다. 난데 없이 가겠다는 말에 유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수정을 보았다.
“어딜요?”
“나도, 집에 가야 겠어.”
“누나?”
유원이 입을 벌렸다. 성헌이 집에 가겠다는 것과 수정이 가겠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유정도 우뚝 선 채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유원이랑, 일단 이야기나 하라고......”
베트남 가는 것부터 어떻게 해보라고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수정은 자신이 꺼낸 폭탄 발언을 수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갈 거야. 괜히 여기 저기 피할 필요 없겠어. 성헌이 말대로 맞아 죽든 맞고 살든 둘 중 하나겠지.”
“누나......”
“그리고 준서 씨가 한 말도 통했잖아. 나도 비슷하게 위협하면 될 거야. 내가 찌그러져 있으니까 멋대로 굴었던 거잖아. 그러니까 힘을 내면 돼.”
“그런 뜻은 아니었어. 진짜로...... 무리하지 않아도 돼.”
유정이 천천히 수정에게 다가와서 그녀를 끌어 안았다.
“아냐, 알려줘서 고마워.”
망설일 때에는 한없이 늘어졌던 마음이 결심을 하자 팽팽해졌다. 수정은 유정의 몸을 힘있게 끌어 안았다 놓고는, 탁자 구석에 놓여 있던 것을 집어 들어 그대로 찢어 버렸다.
“그게 뭐에요?”
유원이 다가서서 물었으나 수정은 미소하며 그대로 그것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냥 쓰레기.”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유정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티켓은 어차피 인터넷에서 다시 발급받으면 되니 찢어도 상관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 행동은 수정의 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무엇이 갑작스레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정은 이제라도 그녀가 움직여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응원할게.”
“너도.”
유정과 수정의 미소가 스쳤다.
“같이 가요, 그럼, 저도.”
유원이 수정의 손을 잡았다. 유정의 눈이 커졌다.
“야, 너는......”
“왜? 누나도 성헌이랑 같이 간다면서.”
“괜찮아, 나는. 일단 준서 씨 만나서 이야기도 좀 들어보고. 차근히 준비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수정이 손에 잡힌 유원의 손을 꾹 쥐어주며 말했다. 유원은 그제서야 수정의 입에서 두 번이나 나온 이름에 주목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생각보다 흔한가봐? 거기 누나 일하는 학교 교장 선생님도 준서 씨라고 안했나?”
유원의 말에 세 사람의 입이 동시에 다물렸다. 유원의 볼이 씰룩거렸다.
“설마.”
다시 초인종이 울었다. 유정은 유원이 신기가 있는 것이라고 직감했다. 아니면 저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실은 호랑이였거나.
먼저 움직인 사람은 성헌이였으나, 그를 밀치듯이 앞질러 문을 연 사람은 유원이었다.
이제 숨길 것도 없다 싶어 유정은 잠잠히 서 있었다.
“설마, 진짜.”
유원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것은 마주 선 준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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