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나 때문이었던 거지?2017.08.25.
수연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도중에 멈췄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결재 서류를 꼭 끌어안은 채, 수연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언니.”
유정이 미간을 모으며 수연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 응, 아니, 아니야.”
“교장실 다녀오세요?”
수연이 든 결재판을 보고 유정이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 말에 수연은 대단한 것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는 길이었어, 교장실에......”
“아 그래요? 그러면 같이 갈까요? 저도 교장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성헌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유정은 바로 교장실로 가려던 참이었다. 모든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연은 그런 유정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니, 아니야, 지금은 아냐.”
“네? 왜요?”
“아니, 지금 내가 배가 고파...... 아니, 밥 같이 먹자......”
“점심 시간은 아까 끝났잖아요?”
유정은 그렇게 물으며 손으로 수연의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픈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연의 이마는 유정의 이마보다 차디찼다.
“혹시 교장 선생님께 혼났어요?”
유정의 입꼬리가 짓궂게 들렸다. 수연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니까. 교장실 다녀온 거 아니라고!”
“아니면 아니지 뭘 그렇게.”
“그런데 유정 쌤은 왜? 왜 교장실에 가려는 거야?”
“아,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요.”
유정이 간략하게 한 말을 들은 수연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래서, 그랬나.”
“뭐가 그래서 그래요?”
유정이 수연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만 말하지 말고. 무슨 일 있었죠? 안되겠다, 같이 교장실로 가요. 교장실에서 무슨 일 있었죠? 어차피 뭐 직접 들으면 되는 거니까.”
유정이 걸음을 옮기자, 수연이 몸을 파르르 떨며 유정의 팔을 잡아 챘다.
어쩐지 지금은 준서를 혼자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아냐, 말할게, 유정 쌤, 실은......”
준서는 피곤한 몸을 쇼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꺼내든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재생’을 눌렀다.
아까 준우와 했던 대화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혹시 몰라 준우가 오기 전에 녹음 버튼을 눌러 놓았던 것이었다. 녹음은 깔끔했다.
이제 유정의 증언과 성헌의 증언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사법 처리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준서는 다만 학부모가 찾아와 ‘갑질’을 하는 이런 상황을 막고 싶었을 뿐이었다.
준우는 안심을 하고 돌아갔을 거고, 약속대로 유정 아버지 사업체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로서는 가장 원하던 것을 얻은 셈이니.
그러니 이제 준서도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진 것을 충분히 활용할 때였다.
상황을 알리고 마음을 모을 것이다. 학부모와 학생을 대하는 규정을 다시 세우고 같이 지켜나갈 생각이었다.
준서는 업무를 하는 책상으로 돌아가 유정을 부르기 위해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글귀를 보고 미간을 모았다.
교내 메신저창이었다.
‘급한 일이 있어 조퇴하겠습니다. 수업은 모두 마쳤고 종례는 이수연 선생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유정은 눈을 먼 데 둔 채 덜컹이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수연이 한 말이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조금 생각하고 나서 깨달았다.
학교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유정 자신 때문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유정은 깊은 숨을 내뱉었다.
준서에게서 배웠다. 함부로 굽신거리지 말라고. 교사는 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준우 앞에서도 떨면서 할 말은 모두 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상관 없었다. 끝까지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그런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꼿꼿한 사람이, 자존심 강한 사람이.
정거장에 버스가 서고,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다음 정거장을 확인한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창 밖으로는 익숙한 건물이 지나고 있었다.
버스가 멈추고 유정이 내렸다. 온 길을 되돌아 걸어가니 건물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저 마음 안에 두고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고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해결을 준서에게만 맡겨두는 건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이었다.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결했어야 했다.
유정은 때늦은 후회를 와락 깨물며 발에 힘을 주었다. 딱딱 부딪히는 아스팔트가 그녀의 심장까지 울리고 있었다.
수정은 물끄러미 보던 비행기표를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유원에게 연락을 했다. 당분간 바쁘니 오지 말라고.
그는 투덜댔으나 ‘당분간’이라는 말에 희망을 건 듯이 다음 주면 되는 거냐고 해맑게 물어 왔다.
다음 주면 그녀는 한국에 없을 텐데. 더 이상 이 곳에서 찾을 수도 없을 거고.
이 곳에서 사라진다고 수정의 인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수정은 그렇게 지우자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제까지의 삶 전부를 과거의 기억으로 묻어두자고.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르는 언어를 배우고 새로 시작하는 거다.
누구와도 엮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거다.
달콤한 슬픔이 그녀를 감아 흘렀다. 고개를 젖히고 그녀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초인종 소리에 수정의 몸이 굳었다. 성헌이 벌써 끝났나.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문을 연 수정은 잠시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유정은 억지로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응.”
그리 오랜만도 아닌데. 수정은 평소와 다른 그녀의 인사에 주춤하며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 있어?”
자리에 앉자마자 수정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유정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뭐 차라도 마실래? 커피?”
“잠깐.”
일어서려는 수정을 유정이 손으로 막았다. 유정의 얼굴에 그제야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무슨 일인데.”
수정은 몸을 잘게 떨며 물었다. 기어이 온 건가, 나의 마지막 도망마저 끝나버린 건가.
유원을 버리고 가지 말라고 붙들까, 그것이 아니면 유원과 어떻게 그런 관계냐고 다그칠까, 그것도 아니면.
갖가지 공상으로 어지러워진 수정이 말없이 눈을 깜박이는 앞에서, 유정은 대답 없이 한숨만 길게 쉬었다.
이윽고 결심한 듯이 고개를 바로하는 그녀의 눈이 서늘했다.
“수정아, 나......”
말은 다시 유정의 혀 끝에서 멈췄다. 말아쥔 손이 떨렸다.
“응, 할 말 있어?”
어서 해 보라는 듯 수정은 입을 다물고 유정을 주시했다. 유정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표정을 관리했다. 상대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그저 이리 저리 치여 산 죄 밖에 없다.
“나 이제, 내가 할 선택을 해야 겠어.”
뭔지 모를 소리를 뱉고 유정은 다시 입을 닫았다.
수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유정은 적어도 이런 모호한 말을 뱉고 말아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교사가 되기 전에도 그녀는 무엇이든 확실히 전했다.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상황이든. 그것이 수정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나, 준서 씨랑 헤어진 거, 실은......”
“나 때문이었던 거지?”
수정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먼저 읽었다. 유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정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먼저 읽었다. 유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이었나. 겨우 안심의 한숨이 새어 나갔다. 어차피 수정은 떠날 것이고 그들의 삶에는 관여하지 않을 생각인데.
애써 표정을 밝게 하며 수정은 관대하게 보이는 어조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럴 필요 없어. 이제라도 말했으니까 나도 확실히 말할게. 나 생각할 필요 없어. 그게 나한테도 더 부담스럽고......”
“그래서 나도 안 그러려고.”
수정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락하려고 했는데 이미 선택을 해 버리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미세한 서운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도 그냥 그 바보 같은 선택을 해 버릴 거잖아.”
“무슨......”
“유원이는 어떻게 하라고.”
역시 그런 거였구나. 수정은 애써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어. 이건 내 선택이고......”
“반대했었어, 처음에는.”
유정은 가빠오는 호흡을 다스리며 수정을 뚫어지게 보았다. 사랑하는 친구지만,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였다.
“너 때문이 아니라 네 가정 때문에. 유원이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유원이는 이미 선택해 버린 것 같고. 그 녀석에게 요즘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대강 짐작하고 있어. 외박 하는 날도 잦고.”
“유정아 그건......”
“그렇다는 건 너도 마음이 없지 않다는 거잖아.”
“하지만......”
“유원이는 알아? 너 베트남 가는 거. 가서 아예 오래 살 생각이잖아. 그거 알고 있어?”
수정은 입을 다물었다. 영영 말을 안해 버릴 듯이. 유정은 답답한 숨을 삼켰다. 짐작하고 있었다. 수정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숨어버리고 도망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참았다. 그녀가 스스로 나오도록 배려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준서의 말없는 기다림 앞에서, 그의 헌신 앞에서 유정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각자의 선택이라는 거 알아. 준서 씨도 나도 너도, 그리고 유원이도 선택했어. 하지만 그 선택이라는 거, 일단은 각자를 위해서 했으면 좋겠어. 서로 좋은 길로 가면 충돌할 이유가 없어. 너는 유원이와 잘 지내면 되는 거고 나는 준서 씨와 좋은 관계로 있으면 돼. 각자가 원하는 게 있는데 왜 돌아가고 기다리고 힘들어하는 건지 난 이해할 수 없어.”
수정의 홀로서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유원과 수정의 뻔한 결말을 가슴 졸이며 바라보는 것보다, 그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래야 하나씩 꼬인 실타래가 풀리고 서로가 가장 좋은 길로 갈 수 있다.
“유정아, 난......”
그녀 스스로 없어지려 했다는 말을 수정은 삼켰다. 금세 굵은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붉어진 눈을 유정은 애써 감정을 가라앉힌 채 보고 있다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널 위해서 내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네가 결국은 그 악마들로부터 나오도록 기다려줘야 한다고. 그런데 내가 참으니까 너도 꾹꾹 참기만 하잖아. 준서 씨도 그러고 있고. 유원이까지 곧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어차피 마찬가지잖아. 네가 베트남으로 가건 이 곳에 있건. 언젠가는 그 악마들 네가 맞서야 하는 거고. 오히려 여기서 든든한 네 지원군하고 같이 맞서는 게 낫지 않아?”
수정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정은 눈을 감았다. 이 친구를 이렇게 두고 내가 편히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나 편한 선택 하자고 했지만 내가 정말 그러고도 행복할 수 있을까.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생각을 애써 정리해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었다. 수정이 놀란 듯이 화다닥 일어섰다.
유정은 설마 유원이 왔나 싶어 같이 일어섰다. 그러나 수정의 아랫 입술이 달달 떨리는 것을 보고 그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 혹시 부모님이......”
“아냐, 그런 거......”
수정이 황급히 문 쪽으로 나갔다. 유정은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를 따랐다.
허둥대는 수정을 앞질러 유정이 걸어가 문을 열어 젖혔다.
여차하면 대신 상대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 밖에는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선생님?”
성헌은 놀란 듯이 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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