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제가 잘못했습니다.2017.08.24.
준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 놓았다.
준우가 교무실로 찾아왔고, 유정이 그와 함께 상담실로 갔다고 했다.
교무실에 건의함을 설치하고 나서 준서는 자주 교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강압적이었던 그가 태도를 바꾼 후 교사들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리고 준서가 따로 시키지 않아도 이런 저런 소식을 준서에게 알려 주었다.
준서는 몇 번이나 상담실로 걸음이 옮겨지는 것을 멈췄다. 준우가 먼저 이야기를 하자고 했을 것이지만 그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유정이었다.
자신이 끼어들면 유정이 난감해 할 것이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매듭짓고 나서 준서가 나서야 했다.
종훈 아버지의 일도 훌륭하게 해낸 그녀였지만, 이번 경우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성헌이 자신의 집에서 지낸 일로 유정에게 따지려고 하는 걸까. 상황을 모르는 준서는 갑자기 준우가 왜 유정을 찾아왔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공연히 발소리를 내며 서성이다가 노크 소리에 발을 멈추고 문을 노려 보았다.
“마침 있었구나.”
문이 열린 틈새로 준서는 준우의 퉁퉁한 얼굴을 보았다.
“학부모 상담은 제 소관인데요. 제 허락도 없이 교사를 먼저 만난 이유가 있습니까?”
준서는 일부러 딱딱하게 말하며 준우를 노려 보았다. 준우의 눈 아래에 주름이 잡히며 그 두툼한 살이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건방진 새끼. 학부모가 교사를 만나지도 못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컴플레인을 거실 거면 저를 통하라고요.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러십니까?”
“대접 한 번 훈훈하구나. 앉으라는 말도 없고.”
준우는 그 말을 마치고 앉으라는 말을 들은 듯이 접대용 쇼파 위에 앉았다. 할 말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준서도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당돌한 여자더군. 신입 교육 아주 잘 시켰어.”
준우는 맞은편에 앉는 준서의 유난히 뾰족한 턱을 보며 일부러 능글 능글 웃었다. 준서의 눈빛은 예상대로 더 날카로워졌다.
“소속 학교 교사를 깎아내리는 건 학교와 저를 깎아내리는 거고 결국은 이 학교의 재단 이사장까지 깎아내리는 걸로 들립니다만.”
“해석이야 자유고. 내가 왜 왔는 줄은 알아?”
준서는 말없이 준우를 노려보았다. 준우의 입꼬리가 들렸다.
“모르는 군. 전혀 못 들었어?”
“성헌이라면 어제......”
“그래 어제. 그 녀석이 또 가출했어.”
준서는 말없이 목울대를 움직였다. 허공에 들린 눈이 어젯밤에 온 연락부터 떠올렸으나 성헌에게는 오늘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늘 등교는 제대로 한 걸로 압니다만.”
매일의 출석 시스템으로 준서는 지각생과 결석생을 보고 받고 있었다. 성헌은 결석은 커녕 지각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했는지 모르지. 왜 가출했는지 아나?”
“또 음악한다고 고집 부렸습니까?”
“CD를 가져왔더군. 담임 선생님이 공부 시키기는 커녕 가만히 있는 애를 더 자극시켰어. 엉뚱한 사람을 만나게 하고......”
“네?”
들으면 들을 수록 모르는 말 뿐이었다. 준우는 깊이 주름이 잡힌 준서의 미간을 보다가 버릇처럼 탁자에 손가락을 올렸다.
“전혀 교사 관리가 안되는 거야?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지도 모르고 참. 헛바람 든 녀석 몇 마디 훈계했더니 나간다고 하고 그 뒤로 소식이 없어. 학교는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준서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을 본 준우는 그제야 표정을 폈다.
“아니, 네가 할 건 그게 아니고.”
준우의 손가락이 탁자를 위협적으로 몇 번 두들겼다.
“그 여자, 해고시켜.”
“네?”
준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학생 헛바람 불어서 가출까지 시켰어. 내가 상황 이야기하니까 오히려 나에게 뭐라더군. 그런 자세로 무슨 교사를 한다고. 있어봐야 너한테도 도움 될 거 하나 없겠고. 성헌이에게도 마찬가지야.”
“성헌이 아버님.”
준서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푸들 푸들 떨리는 얼굴을 애써 바로한 그는 심호흡을 하며 준우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왜요, 교장 선생님. 또 주절 주절 변명할 거리가 남았습니까?”
준우는 비웃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교장은 교사의 해고 권한이 없습니다. 모든 교사는 공무원이거나 준공무원입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해고는 위법입니다.”
준우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까닭이 있다고 여겼으나 준서는 일단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괜히 감정을 건드려 더 문제를 크게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걸 모르고 하는 말 같나.”
“그리고 이렇게 교사를 찾아와서 위협을 하는 행동 또한 교장으로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법적으로 처리할 거고......”
“하준서.”
준우가 다시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탁자 위에 꽂았다.
“그리고 여기 학교입니다. 거실 바닥에 누워서 하듯이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로 준서는 준우를 마주 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떨리던 손을 말아쥔 채 준서는 가빠오는 호흡을 애써 다스렸다.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준우는 다시 입꼬리를 올려 준서가 만든 긴장감을 가볍게 무너뜨렸다. 준우의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 하나가 나왔다.
“오전 한나절이면 자료가 완성이 되더군. 그 서유정이라는 여자의 가족, 그들이 하는 일, 그 모든 게 말이야.”
“네?”
준서의 눈이 준우의 서류 봉투를 향했다. 준우는 재미있는 것이라도 보이는 듯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나도 그냥 하는 말은 아니야. 봐봐.”
준서의 손에 의료기기 납품 업체에 관한 서류가 들렸다. 서류를 넘겨보던 준서의 눈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서진구. 서유정 아버지야. 꽤 오랫동안 운영했고 중소기업 치고는 탄탄한 편이지.”
“뭘 하시려는 겁니까.”
준서의 손이 떨렸다.
“많이 손을 쓸 필요도 없어. 그 업체가 납품하는 병원장이 내 동창이거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것 저것 서로 도움 받는 일도 많았고.”
“하, 형님, 설마 이렇게까지......”
“건너 건너 부탁할 일 생길 줄 알았는데 그럴 것까지도 없게 된 것은 천운이랄까. 그 병원이야 다른 곳에서 납품 받으면 되니까 그리 손해날 것도 아니야. 어디까지나 갑의 입장이니까.”
준서는 눈을 감았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대화를 다 녹음해서 경찰에 알리고 그를 국회의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었다. 이런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닌다고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준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경찰에 알린다고 제대로 조사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어차피 할아버지 윤택이나 아버지 태균이 막아줄 것이니까.
오히려 집안 싸움으로 번져서 준서의 어머니나 할아버지만 상처를 받게 될 것이었다. 준서가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상관 없었으나 그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까지 모른 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해고를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권고 사직이라는 게 있잖아. 내가 이런 사실을 알리는 건 그 선생한테도 굴욕일 테니까 네가 적당히 말하고 쫓아내. 그러면 나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준우는 만족한 웃음을 삼키고 준서를 건너 보았다.
준우에게 신영 고등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자신이 한없이 대접 받아야 할 곳. 할아버지가 재단 이사장인 환경에서 자란 준우는 당연히 학교 하나쯤은 자신에게 떨어질 줄 알고 있었다. 신영 고등학교도 ‘그런 학교 하나쯤’ 중에 하나라 준우는 그 곳에서 마음껏 세력을 휘둘러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동생이 지금은 교장으로 있는 학교였다. 신입 하나 누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히려 주제를 모르고 꼿꼿하게 나서니, 제대로 눌러서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게 해야 겠다고 준우는 생각하며 쳐들린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내렸다.
“뭐 못하겠다고 울고 불고 사정하면 나한테 제대로 사과하라고 하고. 그러면 한 번 정도는 봐줄 수 있으니까.”
준우는 그래도 마지막 회생의 기회를 주는 스스로의 너그러움에 감탄했다. 실은 그보다는, 그 젊고 예쁜 교사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렇게까지 하셔야 겠습니까.”
준서는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은 주먹을 세게 쥐며 상대를 노려 보았다. 집안만 아니라면, 그의 뒤의 배경만 아니라면, 아무 생각 없이 한 대 치고 싶었다.
“먼저 이렇게까지 하도록 만든 게 누군데.”
“잘못한 일이 있으면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서유정 선생님 말씀도, 그리고 성헌이 이야기도 들어보고요. 정말로 교육적으로 바르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제가 대표고 책임지는 자리니까요.”
빠르게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준우는 여전히 건방진 동생의 얼굴을 마주하다가 한 부분에 얼굴을 씰룩였다.
“네가?”
준서가 직접 사과하겠다는 말이 준우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직접 알아보고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위협적으로 일처리를 하려고 한 것 또한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면, 당장에 오늘부터 여기 흔들어도 좋다는 거야?”
준우가 서류 뭉치를 들어 보였다. 준서의 눈이 흔들렸다.
“나야 손해날 것은 없거든.”
“그만 두죠, 그건. 형님한테도 별로 도움 되는 일은 없을 듯한데.”
준서의 싸늘한 음성에도 준우는 개의치 않는 듯이 더욱 음정을 높여 놀리듯이 말했다.
“내가 뭘? 난 그저 더 좋은 업체를 소개 시켜 주고 싶다는 건데. 그리고 그 쪽에선 내가 소개하는 곳을 거절하지 못할 거고.”
“형님만 뒷조사가 가능한 거 아닙니다. 쪽팔린 일 생기기 전에 그만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너도 뒷조사 착수해.”
준우가 서류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일어서는 준우를 준서가 따라 일어서서 막았다.
“진짜 하시려는 겁니까.”
“좋은 교장이군. 교사 아버지까지 책임져 주려는 걸 보니.”
“부당한 피해를 막고 싶은 것 뿐입니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준우는 말없이 동생을 마주 보았다. 한 번은, 이기고 싶은 녀석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의 시선은 준서에게만 향해 있었고 자신은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게 정 싫으면,”
준우는 어릴 때에도 하지 않던 유치한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준서는 여전히 매끈한 얼굴로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대신해서 사과하든가.”
준서의 미간이 꿈틀했다.
“내가 그 선생에게 받고 싶었던 대로, 무릎 꿇고 정식으로.”
준서의 입이 벌어졌다. 이게 그 유명한 갑질인가.
“아니면 그 선생 데려와서 무릎 꿇리든가.”
“전 아직 아무런 상황 파악도 하지 못했습니다.”
“안 그러면 오늘로 이 업체는 거래가 끊길 거야.”
준서는 깊은 숨을 내쉬며 눈을 아래로 떴다.
“할 말 끝났으니까 나는 간다.”
“정말로,”
준서의 눈이 다시 들렸다. 어떤 뜨거운 결심이 그 눈 안에 흐르고 있었다.
“건드리지 않을 겁니까.”
“물론.”
준우의 눈이 웃었고 그 순간 준서의 몸이 꺾이듯이 내려 앉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준우는 새어나가는 미소를 참으며 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의 사과는 아쉽지만, 이 정도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한 기분이었다.
“보기 좋군.”
준우는 고개까지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준서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나갈 때까지 그러고 있어.”
준우는 성큼 성큼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문을 안 닫고 들어왔나.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왜 이 곳에 왔는지도 잊고, 준우는 문을 열어 젖혔다.
준서는 여전히 그 자세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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