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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79화 (79/102)

79. 너 가출했니?2017.08.23.

“잠꾸러기 깨워서 등교시키는 것까지 교장의 담당이었습니까?”

준서의 입꼬리가 비틀어져 올라갔다. 유정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말을 시작하려던 유정이 다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준서의 말에서 틀린 부분을 찾을 수는 없었다.

늦잠을 잔 것도, 그리고 준서가 그런 유정을 깨워서 데리고 가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교사 동아리 1차 보고서 작성에 대해 어제 말하는 것을 깜박 잊었다. 출근하기 전에 말해서 잊지 않도록 하려던 전화가 유정의 모닝콜이 될 줄 준서도 알지 못하던 것이었다.

“농담입니다. 뭘 그렇게 정색하시고.”

준서가 하하 웃으면서 말하자 유정은 입술을 깨문 채 준서를 노려 보았다. 이럴 때 보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얄밉기만 했다.

“여하간 고마워요. 아니면 지각할 뻔했는데.”

“고마우면......”

준서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유정의 긴장한 눈초리가 준서의 옆얼굴에 박혔다. 그 옆얼굴이 살짝 경련하고 있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우리 모임 뒤풀이 때 쏘세요.”

준서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의 매듭을 지었다.

유정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서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유정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유정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미 유원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수정과 신나게 만나는 중인 듯했다. 그러니 유정이 준서와 다시 사귄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다만 준서에게 다시 만나자고 하는 이유를 대기가 어려웠다.

동생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수정과 막무가내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왠지 부끄러웠다. 동생 단속도 제대로 못하는 누나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수정이 태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준서를 통해서 유정은 그녀가 베트남에 가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전에는 준서가 이미 살 집과 직업까지 다 구했다는 말까지 전했다.

이제 곧 출국이니, 출국을 하고 나면 윤곽이 보이지 않을까.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나지 않을까. 유정은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대충 미뤄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느라, 옆에 있는 남자와는 아직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이였다.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준서가 피식 웃었다. 유정의 마음을 대강은 짐작한 말이었다.

“아뇨, 뭐......”

“성급했다고 생각합시다. 이어질 인연이라면 천천히 해도 될 겁니다. 오히려 성급해서 어긋나는 인연도 있는 법이니까......”

준서는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유정은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그 때까진 이렇게 모닝콜로 이용하십시오. 얼마든지 이용 당해 줄 테니까.”

“교장 선생님.”

끝까지 장난기를 거두지 않는 준서를 유정이 흘겨보자, 준서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앞을 보았다.

“아니면 그냥 옆집 오빠라고 생각해도 되고.”

“남자들 그 오빠 소리 되게 좋아해요.”

유정이 상념을 버리고 짓궂게 대꾸하자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이미 말에서 계급이 생기잖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는 거지 불러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계급이라뇨.”

“상하 관계 말입니다. 오빠나 누나, 다 상하 관계를 전제로 한 말이죠. 전 그냥 이름 불리는 것이 좋습니다.”

차가 학교에 들어섰다. 유정은 아쉬움의 표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묵묵히 고개를 숙인 유정을 준서의 눈이 아까와는 다른 안타까운 얼굴로 훑었다.

“도착했네요.”

“오늘이 세상 끝 날 아니에요.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바라는 건가요?”

“차라리 그랬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습니다. 나도 이렇게 무한정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준서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얽혔다.

“미안해요.”

결국 유정은 망설이던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는 그러니까 일찍 일찍 일어나요. 나도 놀랐지 않습니까.”

유정의 사과를 아침의 사태로 일축한 준서가 표정을 바꾸어 웃었다.

“수정 씨 베트남 보내고 나서 좀 시간이 흐른 후에, 서로 감정 정리 됐을 때 만나서 다시 얘기해 봅시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알겠죠?”

아이를 달래듯이 노곤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준서는 먼저 차에서 나갔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스스로도 감정을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뒤이어 나오는 유정에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준서는 똑바른 걸음으로 교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 자신도,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였다.

시험 다음 날이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수업 분위기는 산만했다.

유정도 수업 중에 두어번 화를 냈다. 결국 일장 훈계로 수업을 마친 후에 씩씩대며 교무실로 오는 길이었다.

교무실 문을 연 유정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양복 차림의 남자는 40대 전후 정도로 보였다.

“서유정 선생님이시죠?”

애써 매너를 가장한 목소리였으나 두 눈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마치 눈 앞의 상대를 짓누르듯이.

“네, 맞습니다만.”

“성헌이 아버지입니다.”

유정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상대를 살폈다. 그러고보니 눈매가 준서와 조금 닮은 듯도 했다.

준서보다는 약간 퉁퉁한 얼굴이긴 했지만.

현직 국회의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여기까지 올 시간이 있는 걸까.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종훈의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종훈의 아버지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던 기가 지금은 눈 앞의 상대를 감아 흐르고 있었다.

이 집안은 무슨 주유소처럼 사람들에게 기를 주입하는 그런 집안인가.

말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유정은 이유 없이 배가 아팠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혹시 상담실이나 다른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은 없는지요.”

“이리로 오세요.”

유정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발에 힘을 주었다. 이미 나은지 오래인 발목이 도로 욱씬대는 기분이었다.

상담실 문을 열고 준우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유정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준우는 유정이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려 자리에 앉았다.

군더더기 없는 태도였다.

“성헌이가 가출을 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준우는 더 끌 것 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유정은 다시 한 번 긴장한 몸을 폈다.

“네?”

“오늘 학교는 왔습니까?”

“네. 제시각에 등교했어요.”

“혹시, 선생님께서 다른 이와의 만남을 주선했습니까?”

유정은 침을 삼키고 말없이 준우를 보았다. 다 알고 하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준우가 미간을 모았다. 아까부터 참고 있었더 감정인 듯이 다음 말이 조금 거칠게 나갔다.

“사실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취조를 받는 기분이 그럴까. 유정은 꼬여오는 배를 한 손으로 누르며 호흡을 다스렸다.

“어떤 상황인지 먼저 말씀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왜 가출을 한 거죠?”

유정도 성헌이 시험 기간에 준서네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준서는 성헌에 대한 말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이번 가출은 준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곤란하지요. 아무래도 그 만남이 문제였던 것 같은데.”

준우가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툭툭 손가락이 탁자에 부딪히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마치 그런 효과를 기대하는 듯이.

유정은 떨려오는 손을 말아 쥐었다.

“제가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상황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질문부터 하는 태도, 조금 불쾌합니다.”

준우는 말없이 유정을 보았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말로는 안되겠군.”

혼잣말인지 아니면 유정을 향한 말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대로 유정의 심기를 건드렸다.

“네?”

“아직 정직원 된지 1년도 안된 햇병아리라고 들었는데. 세상 무서운 거 모르고 사셨나 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따박 따박 말대답 하는 태도를 보니 우리 아들에게 뭘 가르쳤는지 보이는 군요. 멀쩡한 녀석에게 헛바람 불어서 가출까지 조장한 주제에, 끝까지 당당한 걸 보니 아무래도 교육이 좀 필요한가 봅니다.”

준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교육이 좀 필요하다니......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전 이 학교 교사고......”

휘청대며 일어서는 유정을 준우가 싸늘한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죠. 마음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 학교 있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준우는 인사도 없이 돌아서 상담실을 나갔다. 유정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준우의 뒷모습을 보다가 서둘러 교실로 향했다.

성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이 칠판을 향한 것을 보니 어린 준서의 모습이 저랬나 싶어 가슴이 시렸다.

수업을 하고 있는 교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성헌을 불러냈다. 웬만하면 기다려 주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너, 가출했니?”

성헌이 복도 밖으로 나오자마자, 유정은 그의 손목을 잡아 끌며 물었다.

“네?”

“어제 집에 안 들어간 거야? 무슨 일이야?”

“부모님 오셨어요?”

성헌은 유정의 한 마디에 모든 상황을 짐작한 듯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성헌은 대강의 상황을 전했다. 대신에 지금 의탁하고 있는 곳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유원과의 약속도 있었고, 그들까지 노출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왜 가출을 해서...... 나한테 연락이라도 하지!”

“죄송해요.”

유정은 자신이 준우에게 당한 것이 억울해서 공연히 성헌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헌도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당하고 쫓겨난 셈인데.

“그래서, 지금 있는 곳은 누구 집인데?”

“아, 중학교 때 친구 집이요.”

성헌은 아버지가 또 무슨 난리를 쳤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작년에도 있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는데, 문제는 유정이 상처를 받았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유정은 오히려 성헌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어쩐지 찡해서 성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하신 말씀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요. 원래 사람 마음 같은 거 모르는 사람이니까......”

“신경 안 써.”

실은 지금도 여전히 배가 꼬이듯이 아프고 식은 땀이 솟는 것이었으나 유정은 성헌 앞에서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것이야 걱정이 없었다. 걱정이 있다면 이 학교가 자신 때문에 오명을 뒤집어쓰는 일이었다. 그녀가 한 일에 부끄러움은 없었으나 준우의 태도를 보면 충분히 학교를 그렇게 만들고도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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