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지.2017.08.22.
“우리, 놀러갈래요?”
유원은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수정을 보고 있었다.
수정은 몸을 움찔했으나 곧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탁자 위에 맥주를 놓아 주었다.
“어딜?”
“어디든지요. 누나랑 함께 있는 곳이라면 나는 다 오케이.”
“까분다.”
수정이 눈을 찡긋하며 유원의 옆에 앉았고, 유원이 그런 수정의 허리를 감았다.
“왜요, 왜? 가고 싶은 곳 다 말해요.”
“정말? 그럼 우주 여행 갈까?”
“우주 여행 좋죠. 화성, 아니면 금성?”
수정이 큰 소리로 웃고는 유원의 품에 이마를 대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늘 조신하게 행동했고 그것이 몸에 배어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 유원을 만나면 마음 속의 어떤 장치가 해제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잔뜩 억눌려서 몸에 잠겨 있는 것들이 한꺼번에 깨어나듯이 그와 함께 있을 때 수정은 때때로 자신을 잊고 큰 소리로 웃거나 그의 품에 깊이 기댔다.
그의 품에서 나는 냄새가 좋았다. 매끈한 얼굴도, 친절한 태도도.
며칠 후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만.
- 후회하지 않겠어?
준서는 그녀에게 베트남행 티켓을 건넸다. 가면 미리 준비된 가이드가 그녀를 당분간 살 집으로 안내해 준다고 했다.
그녀가 무조건 받기만 하는 것이 싫다고 해서 일자리도 구해 주었다. 영어와 한국어가 가능한 그녀에게 적합한, 외국어 학원이었다.
-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서 마음부터 편안하게 해. 그리고 돌아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말해. 결국은 수정 씨가 수정 씨 부모님과 풀어야 할 문제야. 수정 씨가 마음으로 독립을 하고 여유를 가졌을 때 그래서 부모님과 대화가 가능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말해.
수정도 준서가 이렇게까지 하는 까닭을 알았다. 준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약혼자도 아닌 그가 그녀를 대신할 수도 없었다.
결국 관계를 끊어내고 정리해야 할 사람은 수정이었다. 준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강제로 떼어 놓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수정의 마음 안에 여전히 부모가 크게 자리하고 있는 한, 물리적인 거리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수정은 준서가 그 이유만으로 자신을 떼어놓지는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떠나야 준서는 유정을 좀 더 편하게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수정은 준서의 충고와는 달리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자리를 부탁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좀 더 그곳에 있으면서 그 나라 말까지 익히면 준서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집세야 스스로 번 돈으로 내면 그만이니까.
유정의 동생이기도 한 유원과의 만남도 그래서 며칠 후가 끝이었다. 유정에게 여전히 불편한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에게서 지워지는 것, 수정이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응, 또 울어요?”
“아니, 안 울어.”
수정은 차오르는 눈물을 참고 유원의 몸을 더 깊이 끌어 안았다. 아마도 오래도록 잊지는 못하리라. 이 착하고 매력적인 녀석을.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위안이 되어 주었던 남자를.
“우는데?”
유원은 억지로 수정의 고개를 들었다. 수정은 눈을 깜박거렸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그래요? 먼지가 있나?”
유원이 수정의 눈에 입김을 후후 불었다. 수정의 눈이 반달로 접혔다.
“그러지 마. 간지러워.”
“뭐가 들어갔다잖아. 가만히 있어봐요.”
“으응, 아니라고.”
“어, 방금 애교 부린 거?”
수정이 입술을 반쯤 깨물고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을 본 유원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다시 새초롬하게 눈을 뜨는 수정을 유원이 물끄러미 보다가 그녀의 반쯤 벌린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뜨거운 입김이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적막한 공간 속에 두 사람의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서로의 내부를 오가는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
유원의 손이 수정의 등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손이 아래로 내려가던 찰나였다.
요란한 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저, 전화…….”
수정의 몸이 먼저 딱딱하게 굳어졌다. 유원은 아쉬움을 참으며 팔을 풀었다.
“제 전화네요. 미안해요. 그런데 이 밤에 누구야.”
이제는 밴드 연습 핑계로 부모님의 출타와는 상관 없이 이 곳으로 오는 유원이었다. 자신이 늦게까지 이 곳에 있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 그는 투덜대며 휴대폰을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유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구? 혹시, 부모님?”
“아뇨. 전혀 의외의 인물인데요.”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늦은 시간인데. 유원은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곧 망설이는 목소리가 저편에서 울렸다.
“호텔이라니…….”
성헌은 멍한 기분으로 택시에서 내렸다. 호텔 앞에 서 있던 유원이 택시기사에게 돈을 치르는 동안 성헌은 묵묵히 호텔을 올려다 보았다.
“집에서 나왔다니? 아니 내가 해준 말은 뭘로 듣고…….”
“저도 열심히 해 보려고 했단 말이에요.”
유원은 분명히 낮에 만날 때에는 어른스러웠던 성헌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완전히 아이가 되어 버린 듯이 막무가내였다.
유원은 막막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으며 돌아섰다. 어떤 기분인지 알아서 외면할 수 없었다. 유정이었다면 집에 돌아가라고 따끔하게 말했겠지만.
유정 때문에 집으로 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그에게 답을 제시한 것은 수정이었다. 수정 역시 남의 일일 수가 없어서 한 말이었지만 유원은 그래도 되나 싶어서 또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결정을 내렸다.
“그러니까, 그게, 너, 비밀 지켜야 한다.”
“네?”
“지금 네가 만나는 사람, 못 본 척 하라고. 알았어?”
유원은 일부러 따끔하게 말한 후에 엘리베이터에 올라 탔다. 성헌은 유원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자신을 내치지 않아 주어서 고맙다고 생각했다.
“혹시, 사귀는 분이신 건…….”
“아는 척도 하지 마.”
“맞군요.”
조금 전의 상황도 잊은 듯이 성헌이 허허 웃었다. 유원은 미간을 더 깊게 모았다.
“웃지 마. 뭘 잘했다고 웃어?”
“잘했다고 웃는 건 아닌데요.”
“따박 따박 말대꾸도 잘하지. 여하간 너 앞으로 만나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굴면 안된다. 친절하고 깍듯하게. 알았어?”
수정이 알지도 못하는 유정의 학생 사정까지 배려한 이유를 유원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정의 호의를 그 역시 거절하지 못했다. 성헌이 남학생인 점이 걸리기는 했으나 자신도 함께 있을 거니 상관 없다고 여겼다.
“네, 물론이죠.”
성헌은 잠시 후에 만날 사람이 누군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성헌은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전혀 모르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수정도 마찬가지였다.
“왜, 아는 녀석이에요?”
유원이 수정에게 먼저 물었다. 수정이 대답을 망설였고 그 순간 성헌의 입에서 생각 외의 단어가 튀어올랐다.
“제 과외 선생님었어요.”
“정말?”
성헌은 수정의 망설이는 눈을 보고 자신과 수정이 어떻게 아는지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성헌이 수정을 엄밀히 말해 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준서의 약혼식 때 한 번 실제로 보고 나서 그 후로는 사진으로만 보았을 뿐이니까. 수정도 마찬가지로 약혼식 때 성헌을 처음 보았고 준서가 보여주는 가족 사진을 통해서 그를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성헌이 천연덕스럽게 인사했고 수정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어, 그래, 반가워.”
“그런데 되게 어색한데? 과외 선생님이라면서.”
“그 때는 제가 공부를 잘 안해서요. 그냥 몇 번 하다가 관뒀거든요.”
유원이 눈치를 채고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자 성헌이 두 손을 내저으며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어, 으응, 그랬지, 그 때.”
수정의 눈이 성헌을 보았다.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 입은 모습이었던 그 때보다 지금은 훌쩍 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준서를 닮아 있었다.
준서와 함께 산 적도 있다고 했었나. 그가 성헌을 아꼈던 것은 수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성헌이 부모와 계속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어쩐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도 남 같지 않았었는데.
“무슨 일 있었는지 들어가서 차근 차근 이야기해 보자.”
흥분을 가라앉힌 수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성헌이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수정을 살피다가 네,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유원은 과외 선생님이라고 보기에는 공기가 너무 경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다른 추측은 하지 못하고 말없이 그들을 따랐다.
성헌의 이야기는 두서없이 이어졌다. 수정은 말없이 맥주만 홀짝거렸고, 유원은 중간 중간 추임새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내가 그들의 도구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해도 CD 한 장 가져온 걸 가지고 내가 한 말은 다 무시하고 화만 내는 걸 보니까, 내가 뭘 위해 공부를 하려는 건지 싶어서 허무해졌어요.”
“미안하다. 내가 그걸 괜히 줘서.”
유원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런 유원의 어깨를 성헌이 가볍게 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혀요. 형이 왜 미안해 하세요. 진짜 아니에요, 그건.”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데?”
수정의 물음에 성헌은 입을 다물었다. 대책 없이 나온 건 사실이었다.
“나도 오래 못 받아줘. 여기가 내 집도 아니고.”
“그래, 여기 수정 씨 약혼자, 아니 지금은 약혼자도 아니지, 전 약혼자가 마련해 준 곳이거든.”
약혼자라는 말에 성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마주친 수정이 묘하게 웃었다. 참 인연이라는 것이 웃기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수정 씨도 너 오래 못 거둘 거야. 그 약혼자가 누군지는 나도 모르지만 전 약혼녀의 남자 친구의 누나의 반 학생까지 책임져 줄 사람은 아닐 거니까.”
성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원과 수정을 번갈아 보았다. 그 사람이 삼촌인 건 감추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건 담임 선생님과 삼촌 관계 때문일 거고.
성헌은 준서와 유정의 자세한 사정 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둘 사이의 공기가 여전히 심상치 않다는 것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성헌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그럼, 그 약혼자라는 분 허락만 맡으면…….”
“아니, 내가 허락이 안돼.”
성헌이 눈을 빛내며 하는 말을 수정이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나 혼자 신세지는 것도 버겁고. 아니면 네가 아는 사람 연락해서 여길 나가야지.”
성헌은 그 말의 행간을 읽었다. 준서의 신세를 지려면 직접 연락해서 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안될 노릇이었다. 준서의 집에서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돌아가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고, 또 그랬을 때 아버지가 준서를 함부로 대할 것도 걱정이었다.
이미 자기 때문에 욕을 먹을 대로 먹은 그가 아니었던가. 더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그럼 일단 며칠 내로 친구집이라도 알아봐야 겠네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성헌은 그것도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느 집에서 가출한 녀석을 받아줄 것인가. 그것도 현직 국회의원의 아들을.
그 집하고 척지고 살려는 결심 아니면 쉽게 성헌을 받아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 오늘은 일단 여기서 지내고. 엑스트라 베드 하나 주문할 테니까.”
“아니에요. 여기 쇼파에서 자면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밤새 돌아다닐 결심이었는데 여기라도 있어 다행이에요.”
성헌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정은 차마 따라 웃지 못했다.
수정의 고개가 옆에 있는 유원을 향했다.
“그리고 너는 그만 돌아가. 늦었으니까.”
“네?”
아무 생각 없이 쇼파 위에 앉아 있던 유원은 난데없이 튄 불똥에 당황한 듯이 입을 벌렸다.
“돌아가라뇨? 저는 갑자기 왜요?”
“갑자기 왜긴. 돌아가야 하잖아.”
“그렇긴 한데, 이런 녀석 두고 어떻게 가요?”
“과외 학생이었다고 했잖아. 별 일 없을 거니까 돌아가.”
유원은 수정의 완강한 태도에도 미간을 모으며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얼른.”
“다 큰 녀석인데.”
“괜찮다고. 내 학생이었고 또 유정이 학생이잖아. 이상할 것도 없어. 어서 돌아가.”
기왕에 이렇게 된 것, 유원은 오늘은 아예 돌아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거기에는 성헌을 구실로 수정의 곁에 더 오래 붙어 있으려는 야심 또한 숨어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두 사람이 지인이었고, 수정이 전에 없이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유원도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시키는 대로 일어서기는 했으나 못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현관 앞까지 걸어 갔다.
“이래도 되나 싶네요? 진짜 이렇게 맡겨두고 가도 되는 건지.”
“걱정하지 마. 걱정되면 내일 또 오든가.”
마지막 말에 잔뜩 구겨졌던 유원의 얼굴이 다림질을 한 듯이 반듯하게 펴졌다.
“그래요, 내일 또 올게요.”
“너 하는 건 제대로 하면서.”
“물론이죠. 내일 또 봐요. 성헌이도 안녕!”
내일 오라는 말에 금세 신이 난 듯이 손을 흔든 유원이 슬쩍 성헌의 눈치를 보다가 수정에게 다가와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성헌은 눈을 아예 다른 데로 돌리고 그들의 마지막 애정 행각을 애써 외면해 주었다.
유원을 배웅하고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온 수정은 그제서야 긴장한 얼굴을 풀고 쓸쓸하게 성헌을 돌아 보았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지. 널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런데 정말 삼촌이 여기 마련해 준 거라고요?”
성헌도 참고 참았던 궁금증을 꺼냈다. 수정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성헌은 파혼 사실만 알고 있었지 그 밖의 다른 사정은 잘 모르고 있었다. 성헌과 다시 쇼파 위에 마주 앉은 수정은 자신의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성헌은 그제야 수정이 자신을 받아준 진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까까지는 유원의 부탁 때문에 받아준 줄만 알았던 것이었다.
국회의원인 아버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가정, 그리고 그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미칠 듯이 노력해야 하는 삶과, 결국 인정받지 못해 이런 모습이 되어 버린 것까지.
묘하게 자신의 삶과 일치하는 부분이 성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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