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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77화 (77/102)

77. 자식 하나 죽은 셈 치세요2017.08.21.

“삼촌.”

오늘도 여지없이 열 시가 넘어 퇴근한 준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성헌을 보고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시험 기간 내내 성헌은 이 곳에 있었다.

그 까닭에 준서는 준우에게서 학생들의 가출을 방조하고 돕는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으나, 성헌의 성격상 나가라고 하면 더 엉뚱한 곳에 가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비난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준우가 많이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성헌이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들어가는 즉시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알고 있어서 준서는 준우가 마음을 다스릴 때까지 적어도 2주 이상은 성헌을 곁에 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교복도 벗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성헌의 태도가, 아무 말을 듣지 않아도 그의 결심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왜, 안 자고?”

준서는 짐작되는 말을 모른척하고 일부러 심드렁하게 물었다.

“삼촌, 나 집에 가려고.”

“왜?”

준서가 형형한 눈을 떴다.

“불편해. 삼촌이 좀 깔끔해야지. 씻기만 하면 욕실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고 잔소리 하고.”

“그건 니가 너무 지저분하게 쓰니까 그런 거잖아.”

“그것만이면 말을 안해. 아침에 텔레비전도 못 보게 하고. 볼만한 DVD 타이틀도 없고.”

성헌은 말도 안되는 이유들을 함부로 갖다 붙였다. 준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 텔레비전 좋아하지도 않잖아.”

“좋아해.”

“혼자 있을 때 보는 것도 없잖아. 미혜 씨도 너 방에서만 뒹굴거린다고 하던데.”

“여하튼 삼촌하고 같이 지내는 거 불편해. 집에 갈 거야.”

“안돼.”

“왜?”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 나가.”

“그거, 어디서 나온 말이었더라......”

성헌이 머리를 긁적이는데 준서가 그런 성헌을 바로 지나쳐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허튼 소리 그만 하고 씻고 자.”

“갈 거야.”

성헌은 드레스룸까지 쿵쾅거리며 들어서서 준서를 마주 보았다.

슈트 재킷을 반듯하게 걸고 넥타이를 풀려던 준서가 성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위압적인 눈빛이었다.

그러나 성헌은 조금도 꿀리지 않는 태도로 준서를 마주보았다.

“내가 가고 싶다는데 삼촌이 왜 말려?”

“네 아버지 아직 화 안 풀렸어.”

“어차피 안 풀릴 거야. 가서 한 번 죽으면 돼.”

“하성헌.”

준서의 손이 성헌의 어깨에 올려졌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 정도로 강압적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그럴 이유가 있다는 걸 성헌은 알았다. 하지만 준서가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준서가 자신 때문에 아버지께 괜히 욕을 먹은 것도 알고 있었다.

“싫어. 오늘 갈게.”

“성헌아.”

“인사하려고 기다린 거야. 잘 있어.”

어깨에 얹힌 손을 내려놓고 성헌은 싱긋 웃었다.

유원을 만나고 나서 알았다. 어차피 자신이 견뎌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맞딱뜨려야 하는 것이라면.

“데려다 줄게.”

가만히 입술만 씹으며 성헌을 노려보던 준서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한숨을 내뱉었다.

“고마워.”

성헌은 일부러 씩씩하게 말했다. 준서는 벗었던 재킷을 도로 입었다. 넥타이도 도로 반듯하게 매고 나서 준서는 성헌을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드레스룸을 나갔다.

“따라 나와.”

성헌은 가방을 둘러메고 준서를 따라 나갔다. 아직 봄이라 밤공기가 서늘했다.

“나 들어갈게. 고마워, 삼촌.”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성헌은 그렇게 말하고 얼른 차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나 준서는 대답 없이 성헌과 같이 차에서 내렸다.

“삼촌.”

“같이 들어가자.”

“괜찮다니까.”

준서가 같이 들어가봤자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성헌의 만류하는 몸짓에도 준서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그대로 아파트 건물 앞으로 직행했다.

현관은 카드가 있어야 열 수 있었다. 준서가 서서 성헌을 돌아보자, 성헌은 어쩔 수 없이 카드를 꺼내 인식기에 대었다.

“삼촌, 그런데 들어가봤자......”

“너 죽는 거 구경하려고 그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잖아.”

웃지도 않고 하는 소리에 성헌은 미간을 모았다.

“그래, 나 아버지한테 터지는 거 보고 싶다는 거지.”

“당연하지.”

“보든지 말든지.”

성헌이 성큼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준서는 피식 웃고는 뒤이어 걸었다. 어른인 척하는 성헌도 저럴 때 보면 아이 같다고 생각하며.

성헌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뒤에 서 있던 준서가 그를 제치고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성헌의 어머니이자 준우의 아내인 미란은 준서를 보고 눈을 크게 뜨다가 뒤이어 들어서는 성헌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너, 너!”

“형수님 안녕하세요. 형님 안에 계십니까?”

준서는 슬쩍 성헌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성헌에게 떨어졌던 미란의 서슬 퍼런 눈빛이 어느 정도 순화된 채로 준서를 향했다.

“아, 저, 안에 있긴 한데......”

“왔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준우는 발소리를 거칠게 내며 준서에게 다가섰다.

“아무래도 시험 때라, 안정 좀 시켜야 할 것 같아서 제가 데리고 있었습니다.”

준서는 준우의 시선을 피해 감정을 감추고 말했다. 이미 전화 통화에서 한 말이었지만 다시 한 번 성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안정? 애새끼 도망친 거 제대로 훈계도 안하고 안정이라니?”

“2학년 첫 중간고사에요. 훈계도 좋지만 일단 시험은 봐야 하니까요.”

“그만 좀 해요. 시험 때문에 데리고 있었다는데 왜 그래요?”

미란이 준서 편을 들고 나서야 준우의 입이 닫혔다.

“일단 안으로 좀 들어오세요.”

미란이 다시 말했으나 준서는 곧 돌아갈 작정으로 신도 벗지 않고 현관에 서 있었다.

“아닙니다. 밤이 늦었고 가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성적 제대로 안 나와봐.”

준우가 준서를 노려 보았다. 단단히 벼르고 있는 눈이었다.

“성헌이도 많이 반성했으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준서의 눈이 신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성헌을 향했다. 성헌이 고개를 돌리고 웃어 보였다.

“잘 가, 삼촌.”

“연락해라.”

준서는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다행히 준우는 준서가 걱정했던 것 만큼 폭발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성적 때문에 데리고 있었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아들을 생각해서 데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면, 준우가 어느 정도 상대는 해줄 줄 알았는데. 그는 여전히 완고한 태도를 고집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준서를 보고서도 준우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미란과 성헌의 인사만을 받고 준서는 집을 나왔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준우는 아버지 태균을 가장 많이 닮았으면서도 태균과 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태균이 준서를 편애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준서를 좋아하는 할아버지 윤택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알맹이 없는 속물에 자격지심 덩어리가 되어 버린 모양이 준서는 안타까운 한 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준서가 돌아가고 나자, 준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 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성헌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깨진 컴퓨터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욕까지 뱉었다. 그대로 뛰쳐나온 후에 다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준우는 아무 말 없이 성헌의 가방을 빼앗았다. 성헌이 말릴 사이도 없이 그의 가방이 열리고, 거꾸로 쏟아져 내렸다.

“뭐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준우는 준서를 물론 믿지 않았다. 성적 때문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대들고 간 아들을 그대로 받아준 것을 보면 역적 모의를 했음이 분명하다.

눈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준서는 끝까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꼼짝할 수 없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증거는 금세 준우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야?”

참고서 사이에서 집어든 CD자켓은 유원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 그건 그냥 친구가 준 거......”

“내가 음악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CD를 또 받아와?”

준우는 본보기라도 보이듯이 CD케이스를 꺾어 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CD를 꺼내 두동강을 냈다.

그냥 의미 없는 물건이라면 성헌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성헌은, 도로 야수가 된 듯이 표효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 사인도 되어 있네. 이거 이 가수한테 직접 받은 거지? 준서가 소개시켜 줬냐? 공부 시킨다고 하고 음악하는 애 말리지는 못할 망정 가수 소개를 시켜?”

“삼촌이 그런 거 아니에요, 담임 선생님이!”

다급하게 말한다는 것이, 더 심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성헌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담임 선생님이?”

준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니에요, 왜 남의 CD를 그래요, 나 이제 마음 잡고 공부 열심히 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집에 왔는데!”

울부짖는 성헌을 보면서도 준우는 동요하지 않는 듯이 냉랭한 얼굴로 그런 성헌을 지켜 보았다. 보다 못한 미란이 성헌을 흔들었다.

“넌 공부 하라니까 무슨 CD를 또 들고 와서는. 얼른 들어가, 밤도 늦었는데.”

“제가 뭘 했다고 그래요, 집에 다시 왔잖아요, 음악을 한 것도 아니고, 컴퓨터 부서졌어도 다시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래요!”

“왜 그래? 이 녀석이, 몰라서 물어? 가수 안한다는 녀석이 가수를 만나고 와?”

“그 형도 일단은 공부 하라고 했단 말이예요, 그래서 공부할 생각이었는데......”

“왜, 공부 잘해서 허락 맡으려고? 결국은 가수 하겠다는 거 아냐, 이 새끼야!”

성헌은 입술을 씹었다. 집에 돌아온 것이 잘못이었다. 준서가 더 있으라고 할 때 그 말을 들을 것을 그랬다. 이 집에서 자신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저 성적이나 높여주는 기계일 뿐이었다.

“그래요, 결국은 가수하려고 했어요. 그게 뭐 잘못됐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모두에게 인정 받은 다음에 내 돈으로 가수 하려고 했다고요. 진짜 너무하시네요.”

비틀거리며 성헌은 현관으로 걸었다. 미란이 그런 성헌을 붙들었으나 성헌은 거칠게 뿌리쳤다.

“하성헌, 너 이 자식, 지금 나가면 다신 못 돌아오는 줄 알아!”

“이젠 안 들어올 거예요. 자식 하나 죽은 셈 치세요.”

성헌은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 속에 그대로 녹아 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냥 이대로 먼지가 되어 버리고 싶다. 그래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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