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혼자가 아니니까.2017.08.20.
“꼭 소개팅 가는 기분이란 말이야.”
시험이 끝난 날이었다. 내내 공부에만 매달린 모범생도 이 날만큼은 노는 그런 날에, 성헌은 유정이 보내준 지도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작은 간판으로 향했다. 나무를 깎은 질감 그대로 얹은 간판에서는 풋풋한 향기가 나는 듯했다.
“여기.”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커피 볶은 향이 코에 아릿하게 퍼졌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을 돌린 성헌은 그 곳에 앉아 있는 해사한 남자를 보았다.
아, 저 사람인가.
“안녕하세요.”
다가선 성헌이 허리까지 굽혀 인사하자 남자는 쾌활하게 웃으며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뭘 그렇게 얼어붙어 있어. 우리 누나가 엄청 무섭게 했구나? 나 무서운 사람 아니니까 긴장 풀어.”
유정은 무섭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편하게 만나라고 했었다. 성헌이 처음 보는 이들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 공손한 것은 집안 교육의 영향이 컸다.
성헌은 그런 말은 하지 않고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유원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에 적당한 정도의 힘이 들어갔다. 친밀감과 배려가 반반씩 들어간 듯한.
손을 놓은 유원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성헌은 맞은편에 앉아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너무 그러지 말라니까. 참, 서유원이에요.”
내내 반말이다가 소개할 때만 그렇게 존댓말을 쓰고는 유원은 싱긋 웃었다.
성헌은 가만히 눈을 가늘게 떴다. 유정하고는 또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유정이 따스하면서도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반면, 유원은 거기에 비하면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결코 우습게 볼 수 있는 그런 가벼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내면은 더 묵직한 농도를 지닐 것 같았다. 유원이 가지고 있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인식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었다.
어려움과 근심 같은 것도 적당히 웃으며 넘길 줄 아는 여유 같은 것.
유원에게는 그런 것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누나한테 이야기는 들었고.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다시 반말을 시작하는 유원 앞에서 성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구나. 음악은 언제부터 했는데?”
“저,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초등학교 때부터였구요, 애들이랑 본격적으로 팀 만들어서 활동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요. 그리고 작년에는 그룹 만들어 대회도 나가고......”
“무슨 대회?”
사정을 아는 만큼 유원의 질문은 구체적이었다. 성헌은 점점 더 신이 나서 대답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유원은 성헌이 나간 대회도 알고 있는 듯이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아는 정보들을 툭툭 내뱉었다.
확실히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말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심지어 삼촌인 준서조차도, 이렇게 깊이 파고들어 묻지는 않았다.
“그래도 빨리 했네. 난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어. 부모님 반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반대 때문에 집에는 숨겼지만 나중에 들켜서 죽는 줄 알았지.”
이어지는 유원의 이야기는 성헌이 금세 푹 빠져들어 들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특히 군대를 다녀와서 등록금으로 등록은 안하고 앨범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에 성헌은 턱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입을 벌렸다.
“그래서요? 아버지께 안 혼났어요?”
“혼났지. 지금 살아서 여기 있는 게 기적이다.”
그 후의 불완전한 허락과 지금의 아슬아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성헌은 그 새 물기가 고인 눈을 깜박거렸다. 유원은 담백한 사실만 읊었지만 그가 얼마나 큰 고난을 헤쳐왔을지 성헌은 금세 알 수가 있었다.
“고생하셨네요.”
“고맙다. 이 얘기 하면 다들 욕만 하더라. 부모님 속 그만 썩이고 정신 차리라고, 심지어 친구 녀석까지 그런다니까.”
유원은 하하 웃고는 눈 앞에 있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덩달아 아메리카노를 든 성헌을 눈으로 살피며 유원이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너 커피 마셔도 되냐? 머리 나빠진다고 그런 말 들은 거 같던데.”
“아휴, 왜 이러십니까.”
“너도 참 신기한 녀석 같아서. 술은 하냐?”
성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성적은 전교에서 상위권이었지만 성헌이 사귀는 친구들은 다양했다. 성헌과 비슷한 성적인 모범생도 있었고, 공부 따위는 놓아버린 녀석들도 있었다.
“왜요, 사 주시게요?”
빙글 빙글 웃으며 유원의 말을 받아치는 성헌을 마주보다가 유원은 손을 들어 성헌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너도 참.”
“죄송합니다.”
“우리 누나가 담임이라서 깝깝하겠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에 성헌이 웃었다.
“아니예요, 이제까지 만난 선생님 중에 제일 좋으신데요.”
“누나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카페 가서 너 과일 쥬스나 사주라고 하더라. 커피 안 된다고. 꽉 막혔어, 아주.”
유원은 낄낄 웃으며 말하다가 정색을 하고는 성헌의 눈을 마주했다.
“그래도 술은 안돼. 누나가 안 그래 보여도 손이 맵거든. 나중에 졸업하면 그 때는 원없이 사줄게.”
“농담입니다. 졸업하면 술은 제가 사 드릴게요.”
“정말? 너 그 약속 지키는 거다.”
유원은 그 후로도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음악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싸인을 한 CD까지 내밀었다.
“이거 초판본이라서 엄청 귀한 건데 누나 학생이라고 하니까 줄게.”
“정말요? 이렇게 주셔도 되는 거예요? 아니, 제가 구입할게요. 이렇게 받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팔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려고. 공연하면서 간간이 팔던 거라 이제는 몇 장 안 남았어. 정 고마우면 열심히 들어. 그리고 포기하지 마.”
성헌의 눈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유원은 그 눈을 말없이 마주했다. 성헌의 눈에서 읽히는 감정이 남의 감정 같지 않았다.
내내 가볍게 떠들던 그의 입이 다물렸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성헌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진중한 음성이었다.
“나도 지금에 와서 좀 후회하는 게...... 음악은 어차피 평생 할 거잖아. 경제적 능력도 없고 부모님께 의존해야 할 시기에 음악을 하는 건 내 경험으로 봤을 땐 너무 무모하고 힘들어. 이 바닥에서 먹고 살 만큼 뜨기도 어렵고. 결국 알바 전전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래서 나도 일단은 복학해서 졸업은 하려고 해. 그렇게 약속하기도 했고......”
유원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은 유원 자신도 하루에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복학이고 뭐고 이대로 음악에 푹 빠지고 싶었다.
제 밥벌이는 하고 살았으면 하는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유원은 이 쪽으로도 밥벌이를 해낼 만한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닌 것도 알았다. 자유롭게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돈이 있어야 했다.
“부모님이 그렇게 반대를 하신다면, 네 시기에는 고집을 내세우기 보다는 일단은 하라는 거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어. 스무 살이 넘으면 또 모르겠지만.”
성헌의 얼굴은 점점 까맣게 죽어갔다. 어떤 마음으로 해주는 말인 줄 알아서 더 그랬다. 결국 결론은 그런 거였나. 저절로 쥐어진 주먹에 퍼런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회는 오게 되어 있어. 나 고등학교 때 같이 밴드 했던 친구 중에 지금은 좋은 대학 가서 대기업 입사한 녀석 있거든. 그 때는 돈 많이 벌어 음악 하자고 했었는데. 얼마 전에 만났는데 완전 그냥 회사원이더라. 뭘 할 만한 여유도 없고 하루 하루 치여 사는게. 참 반짝반짝했던 녀석이었는데.”
“저도 그럴까봐......”
“아니, 그 녀석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 대기업 포기하고 그 커리어에 다른 직장 찾아서 가면 되지. 월급은 적게 받더라도 자기 하고 싶은 거 찾아서. 그런데 그게 싫은 거야, 그 녀석은.”
유원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놓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기가 선택할 수 있을 때 선택하면 돼. 선택할 수 없을 때 좌절하지 말고.”
“네.”
“포기하지 말라는 건 그 뜻이야. 지금 굽히는 게 포기가 아냐. 꿈꾸는 사람에게는 언제든 기회는 오니까.”
“그러면...... 나중에 늙어서도 할 수 있는 거겠죠?”
성헌이 망설이며 뱉은 말에 유원이 크게 웃었다.
“늙어서까지 기다릴 게 뭐 있어. 그 친구처럼 대기업만 안 가면 돼. 아니 대기업 가도 제 시간 확보만 하면 되지, 뭐. 너무 일에 치여서 살지 말고 월급은 적게 받더라도 여유 있는 직장 찾아서 어떻게든 투잡을 뛰어 봐야지.”
성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부모님이 도와주실 수도 있는 거잖아. 우리집은 그럴 정도로 형편이 좋지는 않지만 너희 집안은 다를 수 있으니까. 지금은 그냥 무조건 잘해드려. 자식이라도 예뻐야 뭐 하나를 더 해주지.”
“그러지는 않을 거에요. 음악이라고 하면 치를 떨어서.”
“네가 뭐라도 번듯하게 되고 나서 음악을 한다고 하면 누구든 응원할 거야. 그게 되게 속물적인데 현실이 그렇다. 뛰어든다고 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고 꿈이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니니.”
성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자의 현실적인 조언은 그저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해’라는 말보다 훨씬 힘이 있었다.
“저......”
같이 커피전문점을 나왔을 때 성헌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왜?”
“종종 만나고 싶은데 혹시 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유원이 가만히 성헌을 바라보다가 장난스레 입술을 비틀었다.
“나 남자는 취향 아닌데.”
“저도 취향은 아닌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색하고 대꾸하는 성헌을, 유원이 비틀린 입술로 보고 웃다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나 아무나한테 번호 알려주는 사람 아닌데.”
“황공하네요. 고맙습니다.”
“밤 열두 시에 보고 싶다고 전화하면 안된다.”
“여자 친구한테도 그런 적 없어요.”
말을 하는 족족 툭툭 받아 치는 성헌을 얄밉다는 듯이 바라보던 유원이 손을 들어 그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성헌이 피식 웃으며 유원을 마주 보았다.
“조심해서 가라.”
유원이 손을 높이 들고는 먼저 걸어갔다. 고개를 꾸벅 숙이려던 성헌은 뭔지 모를 충동에 손을 마주 들었다.
“나중에.”
유원이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는 유원의 얼굴을 마주한 성헌의 눈이 떨렸다.
“저도 드릴게요.”
“뭘?”
“제 앨범이요.”
성헌이 빙긋 웃었다. 유원은 뭔가 울컥 토해지는 감정을 이를 깨물어 삼켰다.
세상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참 잔인하기도 하지.
하고 싶은 것 꾹꾹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이, 꿈을 가졌다는 이유로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이, 그래서 때로는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 가끔씩은 서럽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니까.
나와 함께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꼭.”
유원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성헌은 멀리 사라지는 유원을 보며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내 눈 안에 머물렀던 물기가 목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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