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보통 사이야. 교사와 교장 사이.2017.08.16.
“고마워요.”
대리 기사를 불러 준서와 함께 집에 가는 길이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들을 눈으로 좇고 있던 유정의 귀에, 잠든 줄 알았던 준서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네?”
“잘 풀어서 다행입니다.”
“아직도 그 생각이었어요?”
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준서가 부드럽게 미소하며 유정을 마주 보았다.
“서유정 선생님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교장 선생님 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으니까 그만 말씀하셔도 돼요.”
“이건 교장으로서 말하는 겁니다. 서유정 선생님이 우리 학교 선생님이어서 좋아요. 이런 모임도 만들고. 그래서 덕분에 저도 서유정 선생님을 믿고......”
준서는 말을 맺지 않고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절 믿고요?”
“아닙니다.”
“무슨 말 하려던 거였어요?”
“서유정 선생님 믿고 좀 더 편안해 질 수 있었다고요.”
그러나 유정은 준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 뒤에 무언가가 분명 더 있었는데 준서 의도적으로 삼켜 버린 것이 너무나 티가 났다.
“말씀 안하실 거예요?”
“어? 뭐야?”
“뭐긴 뭐예요, 얘기 하기 싫으니까 말 돌리는 것......”
말하다 말고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준서를, 유정은 다그치려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준서와 같이 입만 딱 벌리고 말았다.
“쟤가, 왜......”
차가 멈추자마자 유정은 차 밖으로 뛰어 나갔다. 준서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성헌은 멍한 눈으로 다가오는 유정을 보고는 뒤이어 오는 준서를 보았다.
“아, 선생님......”
성헌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옷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자세도 구부정했다.
“하성헌, 너 술 마셨어?”
“술은 선생님이 드신 것 같은데요. 혹시 삼촌이랑?”
대리 기사가 유정의 집에 들렀다가 준서의 집에 가야 하는데, 착각을 하고 준서의 집에 먼저 들른 것을 준서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유정이 먼저 차에서 내려버리자 준서는 대리 기사에게 좀 기다려 달라고 말한 후에 뒤이어 차에서 내렸다.
성헌에게 걸어간 유정은 가볍게 그의 등을 치며 나무라듯이 말했다.
“뭐야, 너 술은 어디서 마셨어?”
“안 마셨다니까요. 그런데 삼촌이랑 사귀세요?”
“혹시 집 나온 거야?”
그제서야 유정은 성헌에게서 술냄새는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붉어진 얼굴은 흥분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하성헌.”
다가온 준서가 엄한 눈으로 성헌을 보았다. 성헌은 양 팔을 쭉 뻗고 준서에게 다가갔다.
“삼초온!”
“징그러워. 너 무슨 일이야?”
준서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안겨오는 성헌의 몸을 가볍게 받아 안아 주었다.
“삼초온, 나 삼촌이랑 같이 살려고 왔는데.”
“누구 맘대로?”
“나 집에서 쫓겨났거든.”
“또 왜?”
“자꾸 짜증나게 굴잖아. 작곡 좀 했다고......”
“뭐?”
준서가 성헌의 몸을 자신의 몸에서 뗀 후, 그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준서과 성헌과 같이 있는 것은 처음 보는 유정은 안 어울리는 듯이 묘하게 어울리는 조카와 삼촌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내가 그거 대학 가서 하라고 했잖아.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게......”
유정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성헌의 눈이 유정을 향했다. 성헌에게 작곡을 권한 것은 유정이었다. 유정은 집에서 작곡까지 막을 정도로 성헌의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공부 안될 때 틈틈이 한 거야. 공부도 했다고.”
성헌은 유정이 시켰다는 말은 안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준서의 눈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그랬겠지. 그런데 네 아버지는 음악 자체를 못하게 하시는 거잖아. 그러니까 일단은 대학 가서 성과를 낸 후에......”
“그러면 대학 가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유정은 조심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희 아버지도 마찬가지여서 알아요. 유원이도 아버지 때문에 적성에도 안 맞는 경영학과 갔다가 지금은 거의 그만 둔 상태고요. 차라리 지금 확실히 밝히고 음악 관련 학과를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성헌이 학생이어서도 그랬지만, 유원의 경우를 봐서도 유정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긍정적이고 활달한 성격인 유원도 진로 때문에 집에서 많이 부딪히면서 힘들어했다. 지금도 솔직히 완전히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준서의 눈이 유정을 향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 이 녀석 고등학생이고 성년이 아니에요. 지금 부모님하고 척을 지어 봐야 이 녀석에게 얻어지는 게 없어요.”
“그래도요. 음악 하려는 사람 못 막아요. 제가 같이 살아봐서 안다고요. 막는 게 오히려 죽이는 거예요.”
“선생님......”
성헌이 감동한 듯이 말하며 이번에는 팔을 벌리고 유정에게 안기려는 것을 준서가 뒷덜미를 잡아 막았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까 넌 집에 들어가 있어. 나 선생님 모셔다 드리고 갈 테니까.”
“삼촌도 술 마신 거 같은데, 음주 운전 하려고?”
“기사님 기다리고 계셔. 선생님, 가시죠.”
“선생님, 그럼 저 내일 상담해요.”
팔을 내리고 성헌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런 성헌을 가볍게 밀며 준서가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넌 집에 가서 공부나 해. 내일 시험 보는 거 하나라도 제대로 안하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넌 죽을 줄 알아.”
“아, 삼촌! 나 아빠랑 싸웠다니까.”
“니가 하고 싶은 걸 얻으려면 네가 해야 하는 것도 제대로 좀 해! 들어가!”
혼이 나면서도 성헌은 뭐가 좋은지 비죽 웃기만 했다. 그것이 한없이 외로운 시절을 지났던 준서 같기도 하고, 진로 문제로 아버지와 충돌하던 유원 같기도 해서 유정은 차마 발걸음이 돌려지지 않았다.
“삼촌 시키는 대로 일단 시험 공부 열심히 해. 내일 오후에 따로 보자.”
유정이 손을 흔들며 말하자 성헌이 마주 손을 들었다.
“버릇 없게.”
그런 성헌의 머리에 가벼운 주먹 세례를 준 준서가 몸을 돌려 유정에게로 걸어왔다.
“죄송합니다. 띨띨한 조카를 둔 죄로, 선생님 시간만 빼앗았네요.”
“아니 전혀요. 제 일인데요.”
유정은 준서의 차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그냥 택시 타고 가도 돼요. 어차피 여기로 다시 올 차인데.”
“아닙니다. 제가 돈은 더 드릴 거고요. 같이 갑시다.”
떠밀리듯이 차에 올라탄 유정은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기사에게 간단히 사과했다. 기사는 자신이 순서를 착각해서 그런 거라며 손을 내저었다.
“성헌이 부모님이 녹록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어쩌면 민종훈이네보다 더 심할 수도 있어요.”
차가 움직일 때까지 입을 닫고 있던 준서가 차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학부모보다 더 중요한 건 학생이라고 말씀하셨었잖아요?”
유정이 얼굴에 반질반질한 미소를 담은 채 준서를 보았다. 준서의 얼굴이 곤란한 듯이 일그러졌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성헌이 부모님은...... 전에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지만 작년에도 학교에 찾아와서 학교를 뒤집어놓은 모양입니다. 올해 제가 있다고 해도 별로 결과는 다를 것 같지 않아요.”
“뭘 걱정하시는 줄은 알겠지만......”
유정은 준서의 눈을 마주하며 그 눈에 희미하게 피어난 근심을 읽었다.
“학교마저 부모님의 뜻에 굴복하면, 성헌이는 설 자리가 없는 거잖아요.”
“아직 미성년이에요. 지금은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내일 성헌이하고 이야기해 볼게요. 생각이 없는 친구는 아니에요.”
유정의 믿음직한 말에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유정을 믿을 도리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유정이 신념을 선택한다면, 준서는 힘써 그 신념을 지켜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준서의 역할이니까.
“들어가십시오.”
유정의 집에 도착하자, 준서는 유정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유정은 성헌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들어 보였다.
“교장 선생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준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달빛 아래 환하게 빛나는 유정의 얼굴을 보았다.
치미는 욕정을 삼키며 그는 마주 웃어 보였다.
보고 싶을 겁니다. 내 마음 속의 다람쥐.
유정이 걸어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준서는 울리는 휴대전화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로 휴대전화는 주머니에 넣고 그는 오래도록 유정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삼초온!”
“어떻게 된 거야?”
재킷을 드레스룸에 걸고 나서 준서는 쇼파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성헌에게 걸어왔다.
“싸웠다니까.”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왜, 순서대로 제대로 이야기하라고.”
준서는 아까부터 계속 울리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놓았다.
“누구?”
“누구긴 누구야, 네 아버지지.”
“아, 그럼 받지......”
“네 얘기부터 들으려고. 그러니까 빨리 말해.”
성헌은 입술을 옴죽거렸다. 겉으로는 윽박지르면서도 준서는 성헌의 말을 들어주는 단 한 사람의 어른이었다. 성헌이 준서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까 말한 게 전부야. 작곡하다가 걸렸어. 다 집어 치우라고 하고 컴퓨터도 부쉈어. 화내고 집에서 나온 거야.”
준서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를 닮아 주변의 인정을 받기만을 좋아하는 준우에게 음악을 하는 아들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유정의 말이 맞았다. 대학에 간다고 해도 준우는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었다. 성헌이 음악을 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크게 충돌을 할 일이었다.
“그래도 시험 기간인데 제정신이야? 시험이나 끝나고 가출을 하든가......”
“시험 볼 과목은 다 가져왔어.”
성헌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가방을 들어 보였다. 그런 성헌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준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은 먹었어?”
“아니. 아직.”
“왜 밥도 안 먹고 다녀?”
준서는 겉으로는 성헌을 나무라면서도 부엌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살폈다. 미혜가 만들어 놓은 반찬들이 냉장고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준서는 반찬을 하나 하나 냉장고에서 꺼냈다. 성헌이 입을 딱 벌렸다.
“우와, 삼촌이 반찬도 만들어?”
“도우미분이 해주시는 거잖아.”
자기 집은 도우미 아주머니 없는 것처럼 말하네. 준서는 뒷말을 중얼거리며 양푼에 밥을 덜고 반찬을 되는 대로 넣고 고추장을 넣었다.
“비빔밥이나 먹자.”
“비빔밥?”
성헌이 준서가 밥을 비비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양복 입고 그러고 있으니까 되게 잘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고 해야 맞지 않아?”
“어울리는데. 나중에 유정 쌤하고 같이 살면서도 이렇게 해 줄 거야?”
준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헛소리 할 거면 가고.”
“헛소리 아니잖아. 오늘도 같이 내리고.”
“이 자식이, 진짜.”
준서가 성헌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성헌이 켁켁거리며 몸을 굽혔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보통 사이는 아닌 거잖아!”
“보통 사이야. 교사와 교장 사이. 오늘은 교사 모임이 있어서 같이 퇴근한 거고. 진짜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런 생각도 말고 소문 퍼뜨릴 생각도 하지 마.”
성헌은 준서가 그의 목을 놓고 다시 밥을 비비는 것을 보다가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성헌의 앞에 다된 비빔밥을 내려주고 나서 준서는 그 동안 너무 울려서 뜨거워진 휴대폰을 그제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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