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그럼 화해한 김에 또 짠 할까요?2017.08.15.
“어디로 갈까요?”
일과가 끝난 후에 회의실로 오라고 상우에게 전하고 나서 유정과 수연은 먼저 회의실로 들어왔다. 유정은 아직도 수연이 먼저 뒤풀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만 하겠다고 말한 것이 어제였는데.
“고기나 먹을까? 아니면...... 아 모르겠다.”
“어, 왔나봐요.”
노크 소리에 문 곁으로 간 유정은 상우와 뒤이어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준서에게는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었는데.
생각해보니 상우가 말을 한 것 같았다. 유정은 고개를 돌려 수연을 보았고, 준서를 본 수연도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 저, 다들, 오셨네요......”
“네, 저도 마침 어제 그냥 일찍 끝나버려서 아쉽던 차였는데.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준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고 수연이 양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유정 쌤, 거기 지원되는 돈은 없어? 그걸로 먹으면 안돼?”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지출 내역을 다 보고해야 하는데, 매번 뒤풀이 비용까지 보고할 수는 없잖아요? 거기에서 권장하는 건 간식비 정도와 책값이라서.”
“아, 그러면 우리가 각자 내면......”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어제 실수한 것도 있는 것 같고.”
준서의 눈이 수연을 주시했다. 수연은 부담스러운 듯이 준서의 시선을 피했다. 유정이 그런 수연의 팔짱을 꼈다.
“누가 내든 어때요. 가요.”
“어, 어, 그래......”
유정의 손이 수연의 손을 깍지를 꼈다. 준서는 그 모양을 보다가 상우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우리도 가죠.”
술자리에서는 상우의 긴 넋두리가 이어졌다.
“이수연 선생님 말씀대로 학생부에 보내도 되요. 선생님이 다 끌어안지 않아도 되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준서는 상우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 행복해야 학생들도 행복하죠.”
“하지만 학생들을 우선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교사라면......”
“교사도 사람이고, 교육이란 게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불행하면서 끝없이 퍼주면 받는 사람도 그걸 알아요.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불행해지고 말지요.”
유정은 지글 지글 끓고 있는 고기를 뒤집었다. 불행해하면서 퍼주는 건 받는 사람에게도 부담스러운 사랑이라고. 그럼 당신이 내게 주는 건 뭘까요. 유정의 시선이 준서를 향했다가 바로 돌려졌다.
“교육에서 학생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그래서 교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계속 선생님들 만나고 계신 거고요?”
상우의 질문에 수연은 어리둥절하며 상우와 준서를 번갈아 보았다. 준서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드러내놓고 말할 것도 아닙니다. 원래 해야 할 일이고요.”
유정은 준서가 계속 바빴던 것을 떠올렸다. 유정이 다리가 다쳤던 날도 아무도 없는 학교에 홀로 그 때까지 남아 있었다.
상우는 유정과 수연이 전혀 모르는 눈치이자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을 보충했다.
“아, 교장 선생님이 계속 선생님들 만나고 계시거든요. 교무실에 비치된 건의함 아시죠? 거기 들어온 내용도 다 읽어보시고요. 그래서 되게 바쁘세요. 업무도 하시고 그런 일도 하시니까.”
“아 그래서......”
수연은 얼마 전에 유정과 인기의 충돌이 있었을 때 교사들이 인기의 편을 들지 않고 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것을 떠올렸다. 예전 같으면 준서가 나가자마자 인기를 따라 준서를 욕할 사람들이 오히려 인기를 나무라는 시선을 던졌었다.
그런 노력들을 꾸준히 하고 있었구나.
준서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이 눈을 허공으로 돌렸다가 상우를 마주 보았다.
“아무튼 윤상우 선생님이 힘을 내야 합니다. 학생 한 두 명에 지지 마시고, 차라리 그들을 학생부로 넘겨 징계를 받게 하고 아예 신경을 쓰지 마세요. 나머지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그 학생들도 돌아오게 됩니다. 인간은 소외 당하는 것을 못 견디는 동물이니까요.”
“하지만 그러면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준서의 눈이 자신 없이 깜박거리는 상우의 눈을 마주했다. 진지하게 반짝이는 준서의 눈을 유정은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선생님 혼자 맡을 짐이 아닙니다. 학교는 공동체고 무거운 게 있으면 나누어 지어야 할 필요가 있죠. 아직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중이지만 저는 교사들이 좀 더 보호되는 학교법을 계속해서 상의하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수연은 떨리는 눈으로 준서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부끄러움처럼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왜 교사가 되었나, 그저 편하기만을 바라고 직장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준서는 이렇게 고민하고 행동하고 있는데. 나는 그런 준서와 모임을 하는 것마저 피하면서 나 혼자만의 안락함을 추구했던 걸까.
수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쓸쓸히 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아, 언니, 짠을 해야죠.”
그런 수연을 툭 건드리며 유정이 웃었다.
“그래요, 다 같이 건배합시다.”
준서의 말에 다 같이 소주잔을 들었다. 잔을 마주치면서 수연의 눈이 준서의 눈을 향했다. 준서의 눈이 미소했다. 수연은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내리고는 잔을 가져와 입 안에 털었다.
“미안합니다.”
준서는 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어제, 이수연 선생님 말씀에 토를 달았던 거...... 괜히 아는 척한 거 같아서 내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뭘 안다고. 이수연 선생님은 저 생각해서 해주신 말씀이었는데.”
뜻밖의 사과에 수연의 몸이 가볍게 진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앞에서 몸이 깃털만큼 가볍다고 느낀 찰나였다. 그런 수연을 준서는 아예 공중으로 날려 버리는 듯했다.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나간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것 때문에 나간다고 해서가 아니라, 제가 죄송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모임에 참석하고 말고는 이수연 선생님 선택이죠. 저는 다만, 그것에 대해서는 꼭 사과드리고 싶어서.”
“아니에요, 맞는 말이었는데......”
수연은 입을 닫았다. 울컥 토해지는 감정의 격정을 이기기 힘들었다.
그러나 곧 취기가 머리를 울리며 그런 감정의 끝이라도 다 토해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끝까지 부끄러워지고 싶은 마음.
취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너무 부끄러워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제가 별로, 좋은 선생님 같지가 않아요. 매너리즘이랄까,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하루 하루가 별 의미 없이 흘러가요.”
잔을 든 손이 떨렸다. 입으로 후 숨을 내뱉고 그녀는 내렸던 시선을 들었다.
“나이만 들고 할 줄 아는 것은 없고. 교장 선생님 같이 멋지게 해내지도 못하고 서유정 선생님 같이 하나 하나 배워가며 최선을 다하지도 못하고 윤상우 선생님 같이 고민을 하지도 못해요. 그냥 굳어버리고 썩어가는 것 같아요.”
난데없는 고백에 준서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얼어붙고 말았다. 수연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고백이었다. 학교에서도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잘 지내는 척만 했었다.
그만 두려고 했던 모임에서 이런 말까지 하다니. 수연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웃기죠, 경력은 제일 많아서 어리광부리는 꼴이라니.”
“아뇨, 전혀요.”
준서가 정색하고 말했다. 그의 손끝도 수연의 것처럼 덩달아 떨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신 줄 몰랐습니다. 일처리도 빠르시고 학생들하고 문제도 없고. 배울 점 많은 선생님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전혀요.”
“저야말로, 처음 맡아보는 교장직에 모르는 것도 많고 매일 실수만 합니다. 실은 여기 들어오게 된 것도...... 좀 쉬고 싶어서였어요. 편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그 날, 같이 칵테일 마셨던 날처럼 그렇게...... 비록 동료들이지만 동료라서 더 잘 이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첫날부터 이수연 선생님께 실수를 해서, 제 마음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거 실수 아니라니까요.”
수연이 좀 더 큰 소리로 말했으나 준서는 부정하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실수 맞습니다. 돌아보니 어떻게 해야 할 줄도 모르고 부끄럽기만 했어요. 전의 학교에서도 같은 이유로 얄밉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자리가 높아지면 말을 더 조심해야 하는데 제가 부주의했죠.”
“알았어요. 안 나갈게요. 있을 테니까 교장 선생님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마시고, 마음에서 지워버리세요.”
수연이 작심한 듯이 말하고는 더운 숨을 후 내뱉었다. 유정은 웃으며 수연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럼 화해한 김에 또 짠 할까요?”
“화해는 무슨 화해야.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수연이 원망스러운 듯이 유정을 노려 보았다. 유정은 미소로 그 시선을 받고는 소주병을 내밀었다.
“수연 쌤도 저 따라주세요.”
“유정 쌤이 말했어? 내가 그것 때문에 나간다고 했다고.”
“아뇨. 전혀.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유정의 말에 준서가 완강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혼자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알았어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준서가 하하 웃으며 잔을 들어 보였다.
점점 더 오르는 열기 속에서 말은 빨라지고 고백은 짙어졌다. 밤이 깊어갔으나 마음은 이상하게 풍요로웠다.
서로가 서로를 세우는 말들 속에서 무너졌던 일상들이 일으켜지고 도닥 도닥 위로를 받았다. 누구도 강자가 아니라는 것, 누구도 겉으로 보이는 남의 삶처럼 대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내려 앉으면서 서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함께 있어서 힘을 낼 수 있다. 아주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서가 아니라 결국은 다 비슷한 마음을 지니고 가는 사람인 것을 알아서.
유정은 새삼 마음이 젖어들 듯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자 대단한 지원군을 얻은 것처럼 든든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