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저는 오늘 시간 괜찮습니다.2017.08.13.
“혹시, 나 때문은 아니지?”
수정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유정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전혀.”
“그 때 내가 부탁했었잖아. 그래서......”
“그 땐 니가 준서 씨랑 결혼해야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파혼했고. 그러니 아무 상관 없지.”
“그래도 혹시......”
“아니야.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너는, 그냥 네 행복한 것만 생각해.”
유정이 팔을 괸 채로 수정을 보았다.
“이제까지 그렇게 못 지냈잖아. 그러니까...... 편하게 생각해.”
“그래도 언제까지 준서 씨 밑에서 이럴 수도 없고.”
“준서 씨, 아니 교장 선생님도 자기 앞가림 하는 사람이야. 자기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도와주겠지. 그리고 너도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면 하고 싶은 것도 생길 거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부드럽게 달래는 어조에 수정은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너......”
“응?”
수정의 눈이 취한 듯 붉어졌다. 일부러 조도를 낮춘 조명 아래 그녀의 얼굴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아, 유정은 몇 번 눈을 깜박 깜박 했다.
“너, 준서 씨랑 좀 닮았어.”
“응?”
유정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의식하기 전에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아냐, 닮았어. 그렇게 배려해 주는 거. 그러면서 자기 고집 있는 거.”
“내가 무슨 고집이 있다고.”
“있어, 너.”
수정이 하하 웃고는 이미 말라버린 카나페를 집어 먹었다.
유정은 그런 수정을 가만히 주시했다.
왜 말하지 않는 거지.
그냥 알고 있다고 다그쳐 볼까.
유정은 몇 번이나 열렸던 입술을 도로 닫았다. 편안해 보이는 표정 위에 돌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수정은 베트남에 가기로 동의했다. 그러면 그녀 나름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유정이 거기에 유원과의 관계를 안다고 말을 해버리면, 수정 스스로의 선택을 그것으로 제한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유정과 준서가 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수정은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일단은 유원과 만나 해결을 볼 일이라고, 유정은 생각했다.
수정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느지막히 호텔을 나왔다.
수정은 끝까지 유원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쩐지 허허로운 마음으로 유정은 택시를 부르고 로비에 앉아 있었다.
곰곰이 수정과 나눈 이야기를 되짚어보던 유정은,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로 가는 남자의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야, 너!”
돌아선 남자가 싱긋 웃었다.
“뭐야, 수정 누나 만나러 왔어?”
“너야말로. 이제는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드는 거야? 이 밤에 여긴 왜 와?”
“오늘 아버지 상갓집 가셔서.”
슥 스쳐 지나가려는 몸을 유정이 붙들었다.
“너, 너, 수정이 계속 만날 거야?”
“응?”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이, 유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유정을 보았다.
“그러니까, 너......”
“누나는 누나 연애 사업에나 신경 써. 난 내가 알아서 잘하니까.”
유원이 유정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전에 없이 단호한 태도였다.
“야, 서유원.”
“응원까지 바라지는 않는데, 이렇게 사사건건 계속 참견하면 나도 더 못 참아.”
“야, 너......”
“갈게.”
수정에게 알고 있다고 할 걸 그랬나. 유원을 만나고 보니, 수정이 어딜 가는 지도 모른 채 그저 푹 빠져 있는 모습이 답답했다.
“야, 서유원, 너......”
그러나 유정이 말을 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닫혀 버렸다. 유정은 공연히 머리를 벅벅 긁다가, 애꿎은 휴대폰을 보았다. 아무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정말이지 일이라면 밤을 새워 하겠는데.
관계라는 것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지금이라도 유원에게 알려야 하는 건지, 수정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일단 수정이 출국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수밖에.
그 때까지 말을 안하고 있다면 나라도 나서야지.
유정은 그렇게 결심하고 돌아섰다. 그 결심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불러올 줄은 전혀 알지 못하는 채였다.
“진짜 안할 거예요?”
수연이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유정은 모니터를 본 채로 입을 열었다.
“응?”
수연은 그렇게 물었으나 유정이 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만에 생각이 바뀌었나 해서요.”
“아니, 뭐......”
수연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앉았다.
“나, 그럼......”
유정은 의자를 돌려 몸의 방향을 수연에게로 했다. 유정의 눈이 수연을 꿰뚫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윤호 선생님께 말씀 드리려고요.”
“뭐?”
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그렇게 다시 하겠다고?”
“그럼 누가 하겠어요? 책도 읽어와야 하고 퇴근 시간 넘어서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주는 거라고는 간식 나부랭이하고 책 뿐인데 누가 자진해서 하려고 할까요?”
“그래도 김윤호 선생님은......”
“어쩔 수 없죠.”
유정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저 오늘 국어 시험이라서 마지막으로 검토 좀 할게요.”
일어서서 나가는 유정의 뒷모습을 수연의 흔들리는 동공이 바라보고 있었다.
수연은 한숨을 깨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남자 셋과, 그것도 헤어진 준서와 존재만으로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윤호와 함께 모임을 하는 것이 유정도 편하지 않겠지.
그러나 막상 하려고 생각하면 수연 자신이 불편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사석에서의 준서는 매너 좋고 친절한 남자였으나 이런 교내 모임은 어찌보면 일의 연장이라고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쉽게 수락을 한 것이 잘못이었나. 준서에게 따끔하게 충고를 들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대충 대충 해서는 안되는 모임이구나. 일이 바쁘고 힘들면 책을 다 못 읽어갈 때도 있을 텐데, 준서는 그 모습도 가만 두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수연은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쉬면서 바람이나 쐴까 해서 복도를 걷다가, 수연은 큰 소리가 나는 것에 걸음을 멈췄다. 남자 목소리였다. 그런데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수연은 걸음을 빨리했다. 목소리는 복도 끝에서 나고 있었다.
복도가 끝나고 계단으로 이어지는 벽의 모서리에 한 남자의 인영이 어렴풋이 보였다.
“윤상우 쌤?”
설마 그 큰 목소리의 주인공이 윤상우였단 말인가. 수연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거의 뛰다시피하며 복도 끝으로 걸었다.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여학생은 치마를 거의 미니스커트 수준으로 줄여 입고 채워지지도 않는 교복 단추를 꽉꽉 채운 채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우는 여학생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으나, 학생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얼굴로 그런 상우를 마주 보다가 픽 웃었다.
“웃어?”
“씨발, 아침부터 지랄이야.”
“뭐야?”
상우의 손이 번쩍 들렸고 놀란 수연이 그런 상우의 팔을 잡았다.
“선생님, 그만.”
“수, 수연 쌤......”
“그만해요. 이렇게 처리할 일 아닌 거 같아요.”
수연은 눈 앞에 있는 학생을 노려보았다. 학생은 너는 뭐냐는 듯이 수연을 마주 노려보았다.
“네가 선생님한테 욕하는 거 나도 들었어. 그냥 넘어가지 않아. 일단 들어가.”
수연은 차분하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여학생은 뭐라고 또 말을 하려다가 입을 비죽이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상우는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죄송합니다. 제가 학생 하나 못 다루고......”
“상우 쌤 잘못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기만 해요. 어제는 그것 때문에 교장 선생님하고 오래 이야기했던 거예요?”
“네...... 반 분위기가 아무래도 안 잡혀서. 이제와서 무섭게 하려고 했더니 반감만 심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수연은 묵묵히 상우를 바라 보았다. 상우에게는 그 모임이 정말 필요할 지도 모른다.
상우처럼 자신감을 다 잃어버리면 학생 앞에 서는 것조차 지옥이 되어 버린다. 그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한 이유였다.
“기운내요. 저 학생 학생부로 넘겨서 처리해 버리고요.”
“네? 어떻게 학생부에......”
“한 번 무서운 맛을 보여줘야죠. 선생님이 다 안고 가려고 하지 말아요. 그러면 선생님만 고생하고, 또 선생님 바라보는 착한 학생들만 힘들어지죠. 모든 학생이 쟤 같지는 않잖아요.”
수연은 가볍게 상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상우의 얼굴이 불룩불룩했다.
“이제까지 착하게 공부만 했죠?”
수연은 분위기를 바꿔서 부드럽게 웃었다.
“네? 뭐, 네......”
“선생님들 대부분이 그래요. 저도...... 그저 시키는 거 잘하고 공부만 했던 사람이라서 첫 담임 때는 상우 쌤보다 더 심했어요. 애들한테 맨날 휘둘리고. 그런데 대하면서 점점 스킬은 늘어요. 걱정하지 마요. 잘하고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수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대충 아무 말이나 주워 섬겼는데 그게 뭐가 고마운지 상우는 고개까지 숙여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오늘 끝나고 맥주나 마시러 갈래요?”
수연은 내친 김에 물었다. 상우의 눈이 커졌다.
“시험 기간 끝나면 뭐 서로 바빠져서 얼굴 볼 시간도 없을 것 같고요. 어제 뒤풀이도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수연은 말하고 아차 싶었다. 나가겠다고 하고서는 뒤풀이 제안을 하다니.
“저는 오늘 시간 괜찮습니다.”
어떻게 말을 취소하나 고민하는 수연에게 상우가 말했다. 아까와는 달리 반짝이는 눈이었다.
“아, 네, 저......”
“어제 너무 짧게 끝나서 아쉽기도 했고요. 분위기도 좀 그랬고.”
“아...... 네......”
“그리고 모임 안 나가실 거죠?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그러신 거죠?”
“네?”
“나가지 마세요.”
수연은 입을 봉했다.
“바쁘신 건 알지만...... 그래도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럼 오늘 끝나고 뵈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 약속은 취소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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