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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약혼녀 구출 작전-71화 (71/102)

71. 혹시, 나 때문은 아니지?2017.08.11.

“그런데.”

시험 기간이라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준서의 옆자리에 앉은 유정은 앞을 보다가 불현듯 생각이 난 듯이 준서를 보고 입을 열었다.

“네.”

“상우 선생님은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준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대답을 망설이는 듯 준서의 입술이 열렸다가 도로 닫혔다.

“네? 저는 알면 안되는 거예요?”

“뭐 그런 건 아닌데.”

“아까 표정이 되게 안좋아 보이셔서요.”

“저도 표정 안 좋습니다만.”

그제야 유정은 준서가 왜 그러는지를 깨닫고 웃었다.

“설마, 제가, 그런 마음으로 물었겠어요? 표정 풀어요.”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준서가 유정을 힐긋 보고 다시 앞을 보았다.

“반 학생들하고 계속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유정은 다시 표정을 굳혔다.

“아, 저번에 그 일이 현재진행형인가요?”

“네.”

“마음 고생이 심하겠네요.”

준서는 잠시 입을 꾹 다문 상태로 차창 너머를 보고 있다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마음 고생은 심합니다.”

“아니, 그건 저도 아는데.”

“여하간 윤상우 선생님은 이런 모임이 생겨서 좋다고 합니다. 다른 선생님들께 먼저 다가가서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쑥스럽고. 그래서 혼자 속앓이를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렇군요.”

“저도 속앓이를 많이 했지만.”

유정은 입술을 깨문 채로 준서를 노려 보았다.

“무섭습니다, 그렇게 보시면.”

준서는 여전히 무심한 음성이었다.

“그럼 왜 자꾸 도발하는 건데요?”

“절 좀 봐 달라는 거죠. 모르십니까?”

“충분히 보고 있거든요.”

“별 것도 아닌데 질투 나네.”

준서는 혼잣말처럼, 하지만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소리로 말하고는 호텔로 들어섰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차에서 내린 후, 유정과 함께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유정은 그제야 유원에게 미리 연락하지 않은 것이 아차 싶었다. 그가 이 곳에 오는지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휴대폰을 꺼냈으나 지금 전화를 하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냥 준서에게도 모든 것을 말해버릴까. 아니, 말하면 준서는 더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그런다고 이대로 모른척하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1층에서 멈췄다. 타야 하나 망설이는데 열린 문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유정아.”

“수정......”

수정은 파스텔톤의 원피스에 흰 가디건을 걸친 차림으로 미소하고 있었다. 준서 말대로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기까지는 안와도 되는데.”

왜 준서가 미리 연락했다는 생각은 안했을까. 유정은 십년 감수한 기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정이 유정에게 다가왔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유정의 몸이 수정의 몸에 갇혔다.

“잘 지냈어?”

따뜻한 환영에 유정은 혼이 나갈 것 같았다. 그 동안의 근심이 수직 하강하면서 죄책감이 몽실 몽실 피어 올랐다.

“너, 넌?”

“난 잘 지냈어.”

“여기도 눈이 많으니까, 들어갈까?”

준서는 주변을 살핀 후에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준서 씨는, 잘 지냈어요?”

수정은 유정과 준서가 같이 오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거리낌이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 준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은 새삼, 수정과 준서를 같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의 호텔방에 들어섰다. 넓은 거실에는 벌써 그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룸서비스를 받았는지 하얀색 테이블 보 위에는 간단한 안주와 와인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 내가 주문하려고 했었는데.”

“또 기다려야 하니까.”

수정은 그렇게 말하며 혼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미리 세팅을 그렇게 해 놓은 듯이, 의자 두 개는 붙어 있고 하나는 떨어져서 맞은편에 있었다. 유정은 붙어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수정의 옆에 붙이고 앉았다.

“안 그래도 돼.”

수정이 말했으나 유정은 고집스레 앉아서 와인병을 들었다.

“난 너 보러 왔어. 한 잔 하지?”

수정이 그제야 준서와 유정을 번갈아 보면서 조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준서는 말없이 혼자 앉는 의자 위에 앉았다.

“난 조금 있다가 가 볼 거야. 오늘은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서유정 선생님은 조금 더 있다 가세요.”

“아니 뭐 그래요. 유정아, 너도 준서 씨 갈 때 같이 가.”

수정이 유정의 팔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유정은 대답 없이 수정의 잔에 와인을 따르고 나서 수정에게 와인병을 내밀었다.

“너도 따라줘.”

“어...... 응. 준서 씨는......”

“난 차 가져 왔어.”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요?”

수정이 놀라 일어섰다.

“응, 나는 그냥 얼굴이나 보러 온 거라. 내일 학교에서 뵈어요.”

준서와 유정의 눈이 마주쳤다.

“네.”

“그래도 좀 더 있다 가지......”

준서의 눈이 수정을 향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준서의 눈이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 그리고 항공권 메일로 보냈으니까 확인하고.”

“항공권......이요?”

“베트남 가고 싶다고 했잖아. 집이 구해졌어. 다음 주 목요일 출국이야.”

수정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왜?”

“아, 아니, 생각보다 빨라서......”

“그러게. 생각보다 빨리 집이 구해져서 다행이네. 거기에서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맘껏 하고 편하게 있다 와.”

준서는 여동생을 달래듯이 따스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유정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하려고 했던 그의 입이 다물려졌다.

준서가 나간 후에, 유정과 수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현관 쪽만 보다가 몸을 돌렸다.

“베트남, 가는 거야?”

유학을 한 미국이 아니라 베트남을 가는 것이 유정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쪽에 무슨 연고라도 있던가.

“응.”

“베트남은, 생각을 안해봤는데.”

“너도, 알고 있었어?”

수정의 눈이 아까와는 다른 빛깔로 유정을 향했다.

“뭘?”

“나 출국하는 거.”

유정이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 선생님께 들었어.”

“아......”

수정은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놓인 까나페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짭조름했다. 마치 지금 기분처럼.

“그냥 말로만 듣던 나라라서, 가고 싶었어. 신기하고 재미있을 것 같고. 알아본 바로는 꽤 안전하다고도 하고.”

“그래도......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가 낫지 않아?”

유정의 우려 섞인 말에 수정이 잠시 우물거리다가 눈을 들었다. 맑은 눈은 이미 거짓을 담고 있지 않았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곳은 비싸잖아. 집에서 돈 한 푼 안 가지고 나왔어.”

“아......”

“준서 씨 말로는, 집을 떠나서 이것 저것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할 거래. 나 유학 갔을 때도 하루 한 번씩 집에 전화 안하면 안됐거든. 무슨 일 있었는지 다 보고해야 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 만나면서, 부모님하고 떨어져 있어보랬어. 그러니 거기가 유럽이든 베트남이든 상관 없는 거잖아.”

유정은 준서의 배려심에 새삼 다시 한 번 감동했다.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파혼한 약혼녀를 위해 애를 써주는 것은 보통의 사람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약혼하고 3년 동안, 준서는 어쩌면 수정의 든든한 오빠 같은 존재이지 않았을까. 유정은 그렇게 추측하다가 공연히 질투가 나서 제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내가 어디로든 떠나는 게 나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선택이겠지.”

탄식과도 같은 말에 유정은 혼자 생각하느라 수그러졌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수정의 눈에는 쓸쓸함이 스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니?”

“아니, 부모님도...... 차라리 내가 없는 게 더 나을 거고......”

“수정아.”

“너는, 잘 지내? 그런데 준서 씨랑 왜 이렇게 어색해 하는 거야? 혹시 나 배려하느라 그래?”

수정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으나 유정의 얼굴은 굳어 있는 채였다.

“아니면 다투기라도 했나?”

“나, 준서 씨랑 헤어졌어.”

수정의 표정이 굳었다. 떨리는 손을 탁자 위에 올린 채 수정은 수초간 유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이야? 헤어지다니?”

“말 그대로야. 그냥...... 그러니까 넌 우리 사이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이유를 이야기하려다가 유정은 수정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리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왜, 준서 씨 그래도 좋은 사람인데.”

“헤어지는 이유야 뭐, 다양하지. 좋은 사람이고 안 좋은 사람이고를 떠나서.”

“그렇긴 한데.”

수정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유정의 팔을 잡았다. 가식에 길들여졌던 손이 진실함을 품고 유정의 팔을 어루만졌다.

“그랬구나. 그런데 나 때문에 같이 와준 거구나.”

“아, 뭐, 응.”

“그래.”

수정은 손을 떼고 일어섰다. 뭘하는 건가 했더니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폼 잡느라 와인 주문하긴 했는데 나는 이게 더 좋더라. 너도 할래?”

“응.”

유정이 다가와서 맥주 한 캔을 받아 들었다. 수정이 피식 웃었다.

다시 마주 앉은 유정은 아까보다도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수정의 얼굴도 전보다 밝아 보였다.

역시 나와 준서 사이를 신경썼던 걸까.

유정은 묘한 슬픔을 애써 털어내며 캔맥주를 땄다.

“건배.”

가볍게 맥주를 부딪히고 입으로 넘기자, 탄산을 품은 액체가 목으로 넘어가면서 몸 전체가 파르르 떨렸다.

유정은 마시던 맥주를 탁자 위에 놓고 눈을 돌려 야경을 보았다.

한 눈에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눈이 부셨다. 이 밤에 일하는 이들은 왜 이토록 많은 건지. 창창이 불이 켜진 높은 빌딩들을 보던 유정은 피로로 따가운 눈을 깜박였다.

“혹시, 나 때문은 아니지?”

수정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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