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저, 나, 안하면 안될까?2017.08.09.
“왜, 알잖아?”
유원의 입에서 다시 픽 웃음이 새어 나갔다. 숨길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볼을 붉게 물들였다.
“설마, 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지금 감금 상태라 돌아다니지도 못해. 얌전히 얼굴만 보고 왔어.”
“걔, 걔를 만났어? 어디 있는 줄 알고......”
“아, 누나도 몰라? 누나한테도 연락 안했나?”
유원이 당황한 듯 입을 가리며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유정이 의자를 돌려 유원을 마주 보았다. 의자 팔걸이를 쥔 손이 불안과 흥분이 교차된 감정으로 떨었다.
“비밀인데, 이거.”
“얼마나 된 거야? 이번이 처음 아니지?”
점점 밝아지고 있다고 했었다.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고. 부모와 떨어져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던 거다.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상대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유원은 친화력 하나는 타고 났다고 칭찬을 들었었다. 상대가 누구든 금세 마음을 열고 웃게 만들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여자들이 오해를 하고 다가오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이 아니면, 뭐? 걱정하지 마.”
“왜 걱정이 안돼? 걔 부모님이 누군 줄 몰라? 너 큰일난다고......”
“큰일은, 그 약혼자 새끼가 나겠지. 난 괜찮아.”
유원이 손바닥을 위로 들어보이며 말했다. 유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약......혼자?”
“약혼했다던데. 아니 친구라면서 왜 하나도 몰라? 근데 최근에 파혼했대. 근데 그 새끼가 주제를 모르고 라푼젤처럼 가둬 버렸어. 나는 그 머리카락을 타고 성에 올라갔지. 그러니까 당해도 그 새끼가 당할 거야, 나는 아니야.”
“야, 서유원.”
유정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애써 등받이에 붙인 채로 유원을 노려보았다.
“너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듣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가족들 말은 안 들었잖아. 원래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야.”
유정은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완전히 관계는 꼬여 버렸고, 수정에게는 뭐라고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미안하기만 했던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왜, 대체 왜 내 동생하고는 그런 관계가 된 걸까.
“그래서, 어디까지 간 거야?”
“누나가 그런 말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누나는 어디까지 갔는데?”
턱을 매만지며 가만히 유정을 바라보는 시선에 유정이 미간을 구겼다.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냐.”
“음, 다 아니까 그런 거짓말은 필요 없고.”
“진짜야. 그 날은 내가 다리 다쳐서, 내가 불안해서 같이 있어 준 것 뿐이야. 아무 일도 없었고.”
“불안해서 왜 같이 있어줘? 아무 사이 아니면 집에 가든가. 수정 누나 약혼자 같네, 그 사람.”
유정의 눈이 커졌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파르르 떠는 동공을 마주한 유원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맞잖아? 아무 사이 아닌데 그러는 거. 수정 누나한테도 그 약혼자라는 놈이 그런다고 해서.”
“아, 아, 그래.”
“뭐야, 진짜 그 교장 선생님이 수정 누나 약혼자라도 되는 거야?”
유원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일어섰다. 유정은 고개를 젖혔다.
“가게?”
“기분 별로인 거 같아서. 싸웠으면 잘 풀어. 나쁜 사람 같지 않던데.”
유원은 유정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고 나자, 유정은 가슴을 부여 잡으며 숨을 훅 내쉬었다.
유원은 수정과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온 밤을 보내고 올 정도라면, 수정도 유원에게 마음이 있다는 셈이 된다.
하지만 과연 그 집에서 유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수정은 집에서 도망가 있는 상황이고, 아직 수정과 부모와의 관계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준서는 수정이 외국에 나간다고 했고, 거기에 수정도 동의했다고 하던데. 그러면 유원은 어떻게 되는 건가.
갖가지 상념이 유정을 지근 지근 밟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말하고 유원에게 관계를 끊으라고 하고 싶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유원은 관계를 끊는 대신 수정을 데리고 어디든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유정은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를 하려고 보니 전화번호를 몰랐다. 수정의 옛날 휴대폰은 이미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원에게 물어볼까 했으나 막상 전화를 해서 할 말이 없었다.
수정이 유원을 더 가까이 한다면, 그래서 유정과의 관계는 불편해 한다면, 그러면 유정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수정이 전화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도리 밖에는 없었다. 그녀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기다려야 했다. 외국을 나가든, 아니면 유원과 이 곳에서 계속 만남을 갖든, 그녀의 선택이고 유원의 선택이었다.
머릿 속에 날벌레 수천 마리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책상에 대고, 유정은 괴로운 숨을 뱉었다.
“첫 모임이네요. 반갑습니다.”
유정이 준서의 집에 갔다 오고 난 2주 후,
학생들은 중간 고사를 보는 기간에, 첫 교사 독서 모임이 열렸다. 교육청에서 교사 모임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은 며칠 전에 준서가 유정에게 직접 알린 소식이기도 했다.
다리를 다친 지 일주일 만에 유정은 붕대를 풀었다. 조심 조심 걸어다니면 된다는 진단을 받고 물리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유정은 둘러 앉은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준비해놓은 간식을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펼쳐서 세팅을 했다.
“드세요, 드시면서 같이 이야기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상우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파이 하나를 들어 겉포장지를 찢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이렇게 준비했어, 다리도 아프면서. 같이 하자고 하지.”
수연이 연이어 말하며 쿠키를 집어 들었다.
“뭐 이 정도야, 별로 무겁지도 않고요.”
“도움을 받은 건 아니고?”
수연의 눈이 커졌고 유정은 고개를 들고 절레 절레 저어 보였다.
“아뇨. 무슨 도움을요.”
회의실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의 시선을 향한 곳에 조금 지친 표정의 준서가 들어섰다.
시험에 혹여 문제가 생길까봐 하루 종일 긴장을 했다. 잘 끝나려다가 윤리 과목 하나가 말썽을 일으켰다. 틀린 것을 고르는 문제였는데 답지 중 하나에 오타가 있었다. 답은 분명히 있었지만 오타를 고른 학생들도 있어서 답이 두 개가 되어 버렸다.
이럴 경우 두 개 다 답을 인정해 버리면, 그 답을 알았던 학생들이 거꾸로 피해를 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급히 회의를 하고 재시험을 결정한 후에 그 재시험 문제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준서는 녹초가 된 몸으로 회의실에 들어서는 길이었다.
“윤리는 잘 끝났어요?”
감독관이었던 수연은 대략 상황을 알고 있었다. 준서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일 간단하게 재시험을 볼 겁니다.”
“참, 대충 답 두 개 하면 되지, 학부모들이 또 항의했나 보네요.”
수연의 말에 준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항의한 적은 없지만, 최대한 공정해야 하는 것이 시험이니까요. 제일 민감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아, 네, 뭐, 그렇겠죠. 그래도 솔직히 학부모들 너무해요. 지난 시험 때도 3번이 두개였던가, 그런 문제 있었잖아요. 3번이 5번 자리에 한 번 더 있어서 답이 5번인데 학생들이 3번 찍은 그거요. 그것도 난리쳐서 재시험 하게 만들고.”
“글쎄요.”
자리에 앉은 준서는 피곤한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유정은 긴장한 채로 준서를 보고 있었다.
“그걸, 난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학부모님들이 잘못한 게 있습니까?”
“네?”
수연의 얼굴이 굳었다. 준서는 유정이 마련한 프린트물을 가볍게 들추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저 내가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누군가의 뒷담화를 한다면, 그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린 여기 발전하려고 앉아 있는 거잖아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결국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사고에 젖게 됩니다. 발전이 없다는 말이죠.”
수연은 입을 다물었다. 공기는 빠르게 냉각되었다.
“덕분에 오후 시간 내내 시달렸습니다만, 윤리 선생님도, 그리고 피해를 당한 학생들도, 학부모님들도 저도, 다 좋게 풀었습니다. 실수한 것은 실수로 인정을 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죄 없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연이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뇨, 저에게 사과를 하란 말이 아니라. 그냥 제 의견을 말한 것 뿐입니다.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리잖아요. 아닌가요?”
“아, 네, 그렇죠.”
수연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러나 이미 처음의 푸근한 표정은 사라진 후였다.
유정은 같이 읽을 책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주문은 했으니까 내일까지는 올 거예요. 읽고 나서 1주 후에 다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요.”
유정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모임을 이끌어갔으나, 수연은 이미 완전히 표정이 죽어 있었고, 상우도 그다지 편한 표정은 아니었다.
“잠시 쉬었다가 할까요?”
유정은 그렇게 말하고 수연과 준서를 살폈다. 준서도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듯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10분 쉬었다가 뵈어요.”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입술을 꾹 깨물고 앉아 있던 수연이 문이 닫히기 직전 회의실을 나갔다.
“저, 유정 쌤.”
유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수연을 돌아보았다.
“저, 나, 안하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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