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도망가지 말아요.2017.08.08.
“그, 그냥, 회사원.”
“무슨 회사요?”
“뭘 그렇게 자세히 알려고 해. 지금은 약혼자도 아니고. 이렇게 신경 써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이야.”
유원은 말없이 수정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찜찜한 사람이었는데. 고마운 사람이라는 말에 질투가 난 건지, 아니면 수정의 물러터진 성격 탓에 부아가 치민 건지 알 수 없었다.
“신경 써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누나 집에서 그 꼴 당하게 만든 사람이잖아요.”
“부모님이 그러신 거지......”
“그럼 누나 상황 전혀 몰랐던 거예요?”
“몰랐겠지. 내가 얘기한 적이 없으니까.”
“얘기한 적 없다고 몰라요? 끝까지 물어보고 알아냈어야죠. 약혼자라면서요.”
“유원아.”
수정의 눈이 유원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아직 어려 그런가. 그의 혈기가 수정은 조금 두려웠다.
물론 수정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내가 말을 안하는데 무슨 수로 알아? 너도 내가 말 안했을 땐 몰랐잖아. 죄 없는 사람 몰아붙이지 마. 그런 소리 들을 사람 아니니까.”
“그렇게 착하게 구니까 다들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니에요. 집에서도 그러고 약혼자한테도 그러고.”
유원이 수정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토라진 듯한 태도에 수정의 입이 달래듯이 호선을 그렸다.
“내가 뭘 착하게 굴었다고 그래?”
“나 언제 한 번 만나게 해 줘요. 누나 약혼자였던 사람.”
작심한 듯이 다시 수정에게로 고개를 향한 유원의 눈이 진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굳건한 생각을 담아낸 두 눈을 수정은 피하지 못했다.
“아니, 그건 좀......”
“왜요? 아직 내가 누나랑 아무 관계도 아니라서?”
“그것도 그렇고......”
유원이 숨을 한 번 훅 내쉬었다. 치킨 조각을 내려놓은 그는 물티슈로 손을 대충 닦고, 새 물티슈를 꺼내 수정에게도 내밀었다.
수정이 물티슈를 받아 손을 닦으려고 했을 때, 유원은 물티슈에서 손을 떼지 않고 그대로 수정의 손을 잡고 손을 닦아 주었다.
수정은 아무 말도 없이 꼼꼼하게 손을 닦아 주는 유원의 손길에 말도 못하고 손 끝만 떨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뇌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손을 다 닦아주고 나서도, 유원은 수정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만히 그 하얗고 가는 손가락을 보다가 손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약간의 기름기와 물기가 묻은 손이 유원의 손에 부드럽게 감싸였다.
“아무 관계가 아니면.”
유원의 시선이 수정의 얼굴에 박혔다.
놀란 듯이 붉어지는 얼굴을 아무 표정 없이 보던 유원이 다시 아까보다 짙은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뜨거운 피가 돌듯이 유원의 얼굴도 붉어졌다.
손 끝에서 툭툭 뛰는 맥박을 말없이 느끼던 유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부터 그거 할까요?”
“으, 응?”
“아무 관계라도 되자구요.”
유원의 손이 힘이 들어갔다. 수정은 바스러질 듯이 쥐어진 손을 빼지도 못하고 어깨까지 덜덜 떨었다.
“누나도, 나한테 마음 없는 거 아니잖아.”
“유원아, 나는, 저......”
“아니에요? 나 싫어요?”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수정의 가슴을 그대로 찔러서 꿰뚫는 것 같은.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칼로 찌른다면 마음껏 고통스러워하고 싶었다.
굳게 잡힌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어디든지 데려가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 앞에서도 쉬지 못했던 마음을 이제는 그만 쉬고 싶다고.
“왜 대답이 없어요?”
유원이 장난스레 눈을 떴다. 수정은 손을 꼬물거렸다.
“이러지 마.”
“내가 뭘 했다고.”
결국은 난 떠날 거고. 너에게 상처 밖에 남기지 않을 거야.
이렇게까지 날 배려했는데, 내가 무슨 수로 준서 씨의 말을 어기겠어. 그가 떠나달라고 하면 그럴 수 밖에.
“부담스러워.”
결국 수정은 유원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툭툭 튀는 감정을 숨기듯이 손을 말아 쥐었다. 유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누나.”
“난 너랑 친구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느닷없이 나타나서 여기서 밤을 보내겠다느니 하는 거 싫다고. 내 약혼자랑 만나겠다고 하는 것도.”
수정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심이에요?”
“이런 얘기 그만 하자. 너도 그만 돌아가. 나 자야 해.”
일어서서 떨리는 손으로 치킨 박스를 정리하는데, 뒤이어 일어난 유원이 수정의 손을 거칠게 낚아 챘다.
강제로 몸이 돌려진 수정이 미간을 모았다.
“유원아.”
“똑바로 말해요. 내가 싫어요?”
“놔.”
“대답해요.”
“서유원.”
“내 이름 부르지 말고. 대답을 하라고요. 내가 정말 싫어요?”
수정의 손을 놓은 유원이 양 손으로 수정의 어깨를 잡았다. 수정의 시선이 유원의 얼굴에 차마 닿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놓으라고 말했잖아.”
단호한 말투와는 달리, 수정의 몸은 유원의 손 안에서 떨었다. 그 온기가 유원의 심장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왜 말을 못하는 건데요, 눈으로는 계속 말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으면서.
“싫다면요.”
유원의 눈이 붉어졌다. 낮은 음성이 바다 모래처럼 젖어 들어갔다. 수정은 눈을 들었다. 피할 수 없는 진심이 그녀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이대로 놓으면, 누나 어디로 도망가 버릴 것 같아요.”
수정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옅은 숨만 뱉어낸 입술은 도로 닫히고 말았다. 유원의 눈이 그 도톰한 입술로 향했다.
“도망가지 말아요.”
그녀 안의 생각을 짚어내듯 단호하게 한 음 한 음 짚어내듯이 말을 한 유원이 그대로 수정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 안에 삼켰다. 순간 수정은 호흡을 참았다. 입 안에 가득 들어차는 남자의 향기에 정신이 혼미했다.
안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안긴 몸에는 이미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여린 살을 누르는 강한 욕망 앞에서 그녀는 조금씩 무너져 갔다.
유원은 잔뜩 젖어버린 수정의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미안해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정신 없이 쓰다듬으며, 유원은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미안해요.”
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난 가진 것이 없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다.
“좋아해.”
유원의 품 속에서 여린 음성이 났다. 유원은 천천히 수정의 몸을 자신의 몸에서 떼었다.
“누나.”
“너, 좋아한다고.”
원망스럽게 흔들리는 눈과 입은 다른 언어를 내뱉고 있었다.
“정말이죠?”
수정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유원의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유원의 손이 천천히 수정의 젖은 얼굴을 덮었다.
“나 보고 다시 말해줄래요?”
“말했잖아.”
“한 번만 더.”
부드럽게 유원의 손이 수정의 턱을 들었고 수정의 시선이 닿은 유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좋아해.”
“나도 좋아해, 누나.”
다시 그녀의 입 속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아까보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심장이 떨리면서 그의 혀를 안으로 받아들인다.
먼 길을 헤매던 꿈에서 비로소 돌아와 아침을 맞는 것처럼, 고요한 평안함이 햇살처럼 그녀의 마음 안에 자리했다.
“어머, 너 다리 다쳤어?”
혜신은 오른쪽 다리를 붕대로 친친 감은 딸의 모습을 보고는 미간을 모았다.
“계단에서 헛디뎠어요.”
“병원은?”
“다녀왔어요. 사진도 다 찍었는데 다행히 뼈는 이상 없다고. 1-2주 정도 이러고 있으면 된대요.”
“조심 좀 하지. 유원이는?”
“아...... 모르겠어요. 어제 자던데?”
혹시 부모님이 좀 일찍 올지 몰라서 유정은 일어나자마자 준서에게 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유원은 없었다. 정말 수정을 만나러 간 걸까. 당장이라도 연락을 하고 싶었으나 왠지 모를 불안함에 가만히 있었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잠시 누워있자고 생각했는데 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혜신이 방문을 열고 있었다.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정말? 어제 확실히 들어온 건 맞고?”
“네.”
“그럼 아침에 나갔나......”
혜신은 다행히 유정의 말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유정은 남 모르게 안심의 한숨을 내뱉고는 침대에 반쯤 기댄 채로 멍하게 허공을 보았다.
그렇게 데려다 준 후로 아직 준서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니 연락하는 것이 더 이상한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연락이 기다려지고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다.
“너, 근데 남자 친구는......”
혜신은 아픈 유정을 위해 쟁반에 담은 밥과 반찬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고마워요. 내가 나가도 되는데.”
“아니, 그러니까 남자친구는......”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준 혜신이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도대체 언제 소개시켜 주는 거니?”
“아, 엄마, 그건......”
“아빠가 뭐 또 한 소리 한 거야?”
“그게 아니라......”
유정은 난감한 입술을 가볍게 씹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세세한 사정을 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나 그 사람이랑......”
“엄마!”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혜신이 몸을 일으켰다.
“유원이 왔나 보다. 얘는 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거야.”
혜신이 방을 나가고 방문이 닫혔다. 유정은 방문으로 시선을 향했다가 몸을 일으켜 책상 의자에 앉았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나 식욕이 없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꾸역 꾸역 음식을 밀어넣는데, 방문이 열렸다.
“누나.”
뭐가 좋은지 싱글대는 눈으로 들어선 유원이 책상 위에 무언가를 놓았다.
“선물.”
“뭔데?”
“내 마음.”
전 같으면 이런 말을 들으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을 유정이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심코 집어든 봉투 안에서 큐빅이 달린 머리핀이 나왔다. 짤랑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떨어지는 머리핀을, 유정은 표정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보았다.
“아, 내 마음을 너무 쉽게 던져버리는데?”
“서유원.”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굳은 얼굴은 남의 얼굴인 것처럼 이질감이 들었다. 유원은 대답 없이 침만 삼키고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나서 유원은 유정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무슨?”
“너, 어디 갔다 왔어?”
유원은 공연히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정은 피하는 시선을 잡아 묶듯이 유원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왜, 알잖아?”
유원의 입에서 다시 픽 웃음이 새어 나갔다. 숨길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볼을 붉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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