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사랑해요.2017.08.07.
“맛있어요.”
유정이 빙긋 웃었다.
“다행이군요.”
“저 라면 물 진짜 못 맞추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잘 맞췄어요?”
“계량컵으로요.”
“아.”
준서는 라면을 들어 앞접시에 옮겨 담았다. 여전히 공기는 뜨거웠으나 그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중이었다.
“다 그렇게 끓이지 않아요? 타이머 맞추고.”
“타이머는 왜요?”
“거기 라면 봉지에 다 쓰여져 있잖아요. 물의 양하고, 끓이는 시간이요. 그걸 괜히 적었겠어요? 그렇게 끓여야 가장 맛있게 만들었으니까 적혀있겠죠.”
유정은 푸우 웃고는 다시 한 젓가락을 크게 라면을 집어 앞접시에 옮겨 담았다.
“처음 봤어요. 라면 그렇게 끓이는 사람.”
“저는 다들 그렇게 끓이는 줄 알았는데요.”
“준서 씨 주위에는 다들 정석대로 사는 사람만 있었나 봐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었는데. 전 레시피 대로 끓이는 게 편한데 굳이 그걸 안 따르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어느덧 라면 냄비가 다 비워졌다. 호록 호록 국물을 마시는 유정을 물끄러미 보던 준서는 괴로운 듯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리모컨을 들어 DVD를 껐다.
“어머, 미안해요. 기껏 틀어줬는데 라면 먹느라.”
“괜찮아요. 나중에 보면 되죠.”
다시 준서의 시선이 유정을 향했고, 유정은 고개를 들어 뜨거운 시선을 마주했다. 준서의 눈이 조용히 웃었다.
“뭐 하자고 안할 테니까 긴장 풀어요.”
“아, 네.”
“뭐, 이것도 좋네요. 오누이 같고.”
당장이라도 저 붉어진 볼을 매만지고 싶지만, 저 입술에 입술을 묻고 숨을 나눠 마시고 싶지만, 준서는 유정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라면 냄비에 접시를 담아 일어섰다.
대충 설거지통에 먹은 것을 넣고 다시 돌아온 준서를 유정은 말없이 올려다 보았다.
“이제 자야죠? 이 닦을 것 가져다 줄까요?”
“준서 씨.”
유정은 졸린 눈을 깜박거렸다.
준서는 말없이 그런 유정의 눈을 마주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뭐가요.”
“나...... 이해해 줘서요. 그리고 기다려 줘서.”
준서는 유정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쩔 수 없잖아요. 꼬여 버린 상황을 유정 씨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나 모른척해도 되는데.”
유정의 동공이 떨렸다. 눈 안에 옅은 눈물이 고인 것도 같았다.
준서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가만히 여자의 눈을 마주했다.
“얄밉잖아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모른척해도 된다고요. 여기까지 데려와서 이러지 않아도.”
“이러지 않아도?”
“제가 다 해결하고 돌아가려고 했어요. 은혜도 모르는 사람 아니니까요.”
준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꺾었다.
“유정 씨는, 사랑을 은혜로 합니까?”
준서의 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유정은 그의 다리 위에 올려진 주먹을 보았다. 꽉 쥐어진 채 떨고 있는 주먹은, 그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욕망을 다스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좋아서 하는 거라고 말했잖아요. 꼭, 안고 키스하는 것만 사랑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도 사랑이죠.”
쑥스러운 듯이 눈은 아래를 향한 채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정 씨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수정 씨도 파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고.”
“안 그래도 수정이한테 이번 주말에 가려고 했는데, 발이 이래서.”
“가볼 필요 없어요. 잘 있으니까.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 유정을 마주한 준서의 눈이 끝을 모르는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떠납니다.”
“떠나다니요?”
“한국에서 계속 있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고. 수정 씨도 마음대로 못 돌아다니니까요. 외국에 갈 겁니다.”
“아니,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에요?”
유정은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수정 씨 스스로 서야 하는 문제니까요. 제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정 씨가 당당하게 부모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 때까진 도와줄 생각이에요.”
“수정이도 동의했어요?”
“네.”
괜찮은 걸까. 유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정 씨 강한 사람이에요. 결국 잘 일어날 거에요. 지금도 점점 달라지고 있고요.”
“달라진다고요?”
“점점 생기가 돕니다. 자신감도 생긴 것 같고.”
준서의 말에 유정은 다시 얼굴을 굳혔다. 생기가 돈다니, 자신감이 생겼다니. 얼마나 됐다고 그런 변화를 보일까.
설마.
“수정이, 혹시 누구 만나요?”
“네?”
“준서 씨 말고, 만나는 사람 있느냐고요.”
준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일일이 감시하지는 않아요. 저는 그냥 수정 씨를 부모로부터 분리 시켜서 보호하는 입장이니까요.”
아까 유원이 나가는 것을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보내줬었다. 전에도 부모님이 놀러갔을 때, 유원은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하고 외박을 했었다. 유원의 여자 관계가 한창 복잡했을 때, 진구가 외박 금지령을 내린 까닭이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나간 것도 유정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왜요? 만나는 사람 있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을 준서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유정 씨 만큼이나.”
준서의 곧은 시선이 유정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저도 수정 씨 행복을 바랍니다.”
“그래야, 날 만날 수 있어서요?”
“아뇨.”
준서는 앞에 놓인 손을 꼬물거렸다.
“그냥 사람이니까요.”
“사람이니까?”
“측은지심을 지닌 사람. 수정 씨 사정 알고 나니까,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행복을 누르고 내 행복을 구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고.”
“아......”
“유정 씨랑 같은 마음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같이 이야기하고, 해결합시다. 알겠죠?”
가볍게 어깨를 두들기고 자리에서 일어선 준서는 DVD 타이틀을 다시 집어 넣었다.
“이건, 나중에 꼭 같이 봐요.”
“네 꼭.”
유정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또 시작인가. 준서가 손가락을 걸자 유정이 손을 당겼다.
몸이 당겨질 줄 몰랐던 준서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의 귀에 유정이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요.”
“네?”
“그냥 말해주고 싶어서.”
새끼 손가락을 놓은 유정이 빙긋 웃었다. 준서는 그녀의 동그랗고 하얀 이마를 가만히 보다가, 그 곳에 입술 대신 손가락을 대고 가볍게 밀었다.
“자요, 얼른.”
“알았어요.”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 유정을 보고 준서가 쿡쿡 웃다가 그녀의 몸을 다시 일으켜 밑에 깐 자리에 내려 주었다.
“잘 자요.”
이불을 덮어준 준서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유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준서가 손으로 유정의 얼굴을 덮어 눈을 감기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사랑해요.”
유정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불이 꺼지고 그가 저벅 저벅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정의 눈에 물이 고였다.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린 그녀는 흐느낌이 새어나가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우리 부모님 없어요.”
유원은 오는 길에 사온 치킨과 맥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수정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서?”
고소한 치킨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그 냄새를 맡으니 배가 더 고파졌지만, 수정은 유원의 눈에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불길을 외면할 수 없었다.
수정의 퉁명스러운 말에 유원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서라뇨? 나 오늘 밤 안 들어가도 된다고요.”
“그래도 들어가. 유정이 혼자 있잖아.”
여전히 딱딱한 어투에 유원은 입을 비죽이 내밀었다. 아직도 누나만 걱정하나.
“혼자 있긴요, 애인이랑 같이 있는데.”
“애인?”
수정의 얼굴이 굳었다.
“왔더라고요, 같이.”
“아......”
“지금 가야 민폐에요.”
유원은 봉지를 뜯어 치킨 박스를 꺼냈다. 수정은 물끄러미 박스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마음 놓고 밤까지 함께 보내는 사이가 되었구나. 축하를 해 주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 쉽게 생겨나지가 않았다.
그들에게 짐이 되었었다는 생각이, 자신이 그래도 유일하게 의지했던 친구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었다는 사실이,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왜 그래요?”
유원은 수정을 보다가 손바닥으로 수정의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수정은 놀라서 그에게서 물러나 앉았다.
“무슨 짓이야?”
“얼굴이 확 죽었잖아요.”
유원은 미간을 구기는 수정을 보고는 푸흣 웃었다.
“화내는 것도 예쁘지.”
“서유원.”
“알았어요. 같이 먹어요. 배 고파 죽겠네.”
유원이 치킨 박스를 열어서 닭다리를 꺼냈다. 수정의 볼록한 입술에 닭다리를 물리자 그녀의 눈이 밉지 않게 유원을 흘겼다.
“누나는 나 와서 별로 안 좋은가 봐요?”
유원은 나머지 다리를 들고 우물 우물 뜯었다. 수정은 대답 없이 시선을 내렸다. 안 좋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두려울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좋으니까.”
유원은 잔에 맥주도 따라서 수정의 자리에 놓아 주었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코 끝이 찡했다. 수정은 말없이 침만 삼켰다.
나 같은 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외국에 나가는 것도 쉽게 동의해 버렸는데.
갑자기 나가기가 싫어졌다. 처음 느끼는 따뜻함을, 내가 있어 좋다고 말하는 사내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너는, 왜 나를.”
수정이 망설이던 눈을 들었다.
“응?”
유원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잘생긴 얼굴이 관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에 나만 집중해주는 눈빛. 그 눈빛이 버거워 수정은 밭은 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뭐예요, 싱겁게.”
“배 고프네. 얼른 먹자.”
수정은 다 먹은 뼈를 내려놓고 다음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숨기려고 일부러 닭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약혼자라는 사람은, 누나 이렇게 가둬두고 와서 들여다 보지도 않는 거예요?”
유원도 다음 조각을 집어들며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계속 신경이 쓰인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수정에게 대략적인 상황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유원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그 약혼자라는 사람에게. 끝났으면 끝난 거지, 보호를 구실로 이 곳에 붙들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련이 남은 건가. 아니면 그녀를 이용하려는 걸까.
“바쁜 사람이라. 그리고 자주 연락해.”
“뭐하는 사람인데요?”
수정은 입을 다물었다. 누군지 말하면 유원이 왠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